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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인문학

불안의 개념 역사적 해설 2

by 엉클창 2020. 8. 10.

 


불안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깊은 관심이 나타난 첫 번째 출판물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를 다룰 때 나타난다. 여기에서 이 개념은 심미적인 것(sensuousness)과 관련하여 분석된다. 키르케고르는 돈 조반니의 불안이 실체적이거나 전형적인 종류의 불안(substantial or prototypical kind)이라는 것이다.[#보기  Either/Or, I, KW III (SV I 107-08).] 반면 안티고네의 불안은 비극적이다.[#보기 Either/Or, I, KW III (SV I 131-32).] 그리고 네로의 불안은 사이코패스적(psychopathic)이다.[#보기  Either/Or, I, KW IV (SV II 168-69).] 하지만 키르케고르가 “무에 대한 불안”을 처음으로 다룬 것은 「불안의 개념」이다. 저 의미심장한 불안은 미래를 향해 있고 모든 인간 안에 있는 순수한 요소다.

「불안의 개념」을 발전시킨 심리학적 관심은 많은 다른 키르케고르의 작품들 속에서도 나타난다. 「반복」은 “심리학을 실험하는 모험”이다. 「인생길의 여러 단계」에서의 “유죄인가/무죄인가?”의 부제는 “가상의 심리학적 구성(Imaginary Psychological Construction)”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의 부제는 “건덕과 일깨움을 위한 기독교 심리학적 해설(A Christian Psychological Exposition for Upbuilding and Awakening)”이고 「불안의 개념」 역시 부제를 갖고 있는데, “유전죄의 교리적 문제에 대한 심리학에 기원한 단순한 고찰(A Simple Psychologically Orienting Deliberation on the Dogmatic Issue of Hereditary Sin)”이다. 이런 부제들은 키르케고르의 개인적인 경험의 역사를 반영하고 있고, 그 정도로 이 작품들은 자신의 자기(self)에 대한 표현한다.

심리학적 사유에 대한 그의 공헌이 간과된 것만은 아니다. 1881년에 Georg Brandes는 유명한 작가이자 문학 비평가였다. 그는 니체에게 편지를 썼다.

“내 의견으로 볼 때, 그는(키르케고르) 여태껏 살아 있는 가장 심오한 심리학자들 중의 하나이다.”

역사적으로 키르케고르가 작업했던 심리학은 오늘날의 심리학적 연구하고는 상당히 다르다. 그의 심리학은 인간의 존재론적 관점에 바탕을 둔 현상학이다. 그의 근본적인 가정은 개인의 초월적 실재(the transcendent reality)로, 그것의 직관적으로 식별 가능한 특징은 영원의 구성요소의 실존에서 드러난다. 그러한 심리학은 어떤 순수한 경험 과학과 혼합되지 못한다. 그의 심리학은 몸(soma), 심령(psyche) 그리고 정신(spirit)을 인간 구조의 근본적 결정요인으로서 간주함으로써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 앞에 있는 두 요소는 일시적인 영역에 속해 있고 세 번째는 영원에 속해 있다.

실증주의 관점에서, 「불안의 개념」의 심리학은 철학자 Harald Hoffding에 의해 공격을 받았다. 그이 비판은 특별히 “질적 도약”의 사유에 집중되었다. 그는 과학은 심리 과학을 포함하는 것으로, 그것은 가능성으로부터 현실성으로의 이동이 중단되지 않은 연속성(unbroken continuity)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모든 새로운 상태는 이전 상태의 단순한 결과라고 주장한다. Hoffding에게 있어서 무가정적 도약은 모든 과학에서 요구하는 엄격한 연속성을 제거한다. 그러나 이것이 확실히 키르케고르의 관점이다. 즉, “질적 도약”은 과학적 영역의 박에 있는 범주이다. 그러므로 질적 도약의 증거(confirmation)는 과학에 의한 추론된 검증의 원리로 축소될 수 없다. 그는 인간 실존 속에 있는 심신의 차원(psychosomatic dimensions)을 정립했을 뿐만 아니라, 정신의 차원에 까지 정립함으로써 이 차이를 표현했다. 그는 과학적 관찰의 “외면성(outwardness, 객관성)”과 영적 경험의 “내면성(inwardness)”과 구별했다. 자기 의식적 주체에 있는 정신의 결정적이고 변화하는 활동성을 설명하지 못하는 심리학은 인간의 생성의 특질(quality)에 기반을 두고 발생시키는 것을 정확하게 반성하지 못한다. 「불안의 개념」은 심리학자가 이 개념을 분석하고 그 관계를 “질적 도약”과 연결시킬 것을 제안한다. 질적 도약은 인간의 조건을 형성하고 있는 존재론적 결정요인과 인간의 본질에 대해 더욱 적절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자유의 변증법에서 만들어진다.

최근에 「불안의 개념」은 철학자들, 신학자들 그리고 심리학자들에 의해서 키르케고르의 주요한 작품들 중의 하나로 인식되어 왔다. 그의 방법은 unum noris omnes [#보기 하나를 알면 모든 것을 안다는 라틴어 표현.] 원리가 열쇠이다.[#보기 프린스턴판 영역본 79쪽을 참고하라.] 이것은 실제로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와 같은 것을 표현한다. unum이 스스로 관찰자가 되는 것으로 이해된다면, 그는 omnes를 찾지 못하지만 실제로 전부인 자, 자기 자신에게 결정적으로 고정되어 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인간성의 완전한 표현을 소유하거나 자기 자신 안에 인간성의 완전한 표현이다. 그것의 본질적인 의미는 과학적 연구에 의해 획득될 수 없다. 즉, 합리적인 사변도 자연 과학도 존재하고 있는 개인에게 그의 본질과 목적을 노출시킬 수 없다. 자기 지식(Self-knowledge)은 존재하고 있는 사람에 의해 획득된다. 즉, 자기 지식은 자기가 될 잠재성의 현실화(actualizing)와도 잘 어울린다.[#보기 후서, KW XII(SV VII 307-9).]

unum noris omnes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의 원리는 실존 심리학에 깊이 매료된 사상가들에게 많은 관심을 낳았다. 하이데거는 “객관적 실체를 통해 존재에 접근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부정한다. 그리고 ‘실존적 존재’인 Dasein, 자기 관계성은 존재 자체(Being itself)에 대한 유일한 문(only door)이라고 주장한다. 객관적 세계는 직접적 개인의 경험의 부산물(late product)이다.”[보기# Quoted by Tillich, “Existential Philosophy,” 57.]  야스퍼스에 의하면, 개인의 실존(“실존적 주체성”)은 실체의 목표이고 중심이다. 그러한 개인적 경험이 부족한 어떤 존재도 “실존을 이해할 수 없다.” 이런 관계에서, unum noris omnes의 원리를 자기 지식에만 관련시키는 것이 맞다. 주체 사상가들의 과업은 그의 실존에서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스 사람들이 기독교적 가정을 소유했다면, “너 자신을 알라”는 그리스인들이 이해했던 것과 같은 그리스 방식대로 이해인 것이다.

불안에 대한 틸리히의 관점은 키르케고르와 평행을 이루고 있다. 그는 불안을 “인식된 유한성(finitude in awareness)”로 정의하고 있다. “불안은 유한으로서 유한한 자기의 자기 인식이다.” 유한성처럼 불안은 존재론적이다. 그것은 어떤 것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불안은 불안의 대상이 “무(nothingness)”이고 무는 “대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공포(fear)와 다르다. 공포는 그것을 대상과 관련시킨다. 예로, 위험, 고통, 적과 같은 것들이다. 공포는 심리학적인 것이고 정복될 수 있다. 불안은 정복될 수 없다. 왜냐하면 유한한 존재는 유한성을 정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불안은 잠복해 있을지라도 항상 현존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존재론적이기 때문에, 불안은 내면으로부터 유한성을 표현한다. 틸리히는 또한 “존재론적 구조의 상실에 대한 불안”에 대하여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본질적으로 있는 모습 그대로 존재할 수 없는 불안(the anxiety of not being what we essentially are)”이다. 이것은 “실존적 붕괴를 통해 비존재로 떨어지고 와해되는 것에 대한 불안이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존재론적 구조의 궁극적 파괴에 대한 불안이다. 아주 중요한 각주에서, 틸리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심리치료는 존재론적 불안을 제거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유한성의 구조를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안의 충동적 형태를 제거할 수는 있다. 그리고 공포의 강도와 빈도를 줄일 수 있다. 심리 치료는 ‘적당한 위치에’ 불안을 위치시킬 수 있다.[#보기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191-92, 199.]

자기와 불안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개념은 라인홀드 니버의 인간의 교리에 대한 바탕을 이루고 있다. 인간은 자연과 정신의 교차점에 서있다. 그는 자유와 필연 양자에 관여한다. 그는 또한 제한과 무제한에도 관여한다. “불안은 인간이 관여하고 있는 자유와 유한성의 피할 수 없는 공존물이다. 그것은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영적 상태이다. 인간은 자유와 유한성의 역설적 상황에 서있다.”[#보기 Reinhold Niebuhr, 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47), I, 182.] 불안은 창의성뿐만 아니라 죄의 영원한 내적 전제조건이다.

비슷한 방식으로 롤로 메이는 불안이 슬픔이나 기쁨과 같은 다른 감정들과 같은 그런 감정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것은 인간의 존재론적 특징이고 실존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공포는 실존의 변방에 있는 위협이며, 다른 감정들과 같은 감정이다. 불안은 기반(토대)에 대한 위협이며 실존의 핵심이다. 그것은 존재론적이며 오직 현존재의 위협으로 이해될 수 있다. 개인이 어떤 자유의 차원이 없다면, 불안의 경험은 있을 수 없다.[#보기 Rollo May et al., Existence (New York: Simon & Schuster, 1958), 50-1.]

키르케고르는 자기(self)의 종교적 차원을 주장한다. “절망이 완전히 제거되었을 때, 자기의 상태를 서술하는 공식은 다음과 같다. 자기와 자기와의 관계에서 자기이려 욕구하면서, 자기는 그것을 정립했던 힘에서 투명하게 안식한다.”[#보기 The Sickness unto Death, KW XIX (SV XI 128).] 키르케고르에게 있어서, 이 힘은 하나님이다.[#보기 Pap. VIII2B 170:2.] 하나님과의 관계는 자기의 존재론적 특징이다. 이 관계로부터 떨어져, 자기는 완전히 자기를 실현시킬 수 없거나 자기는 무한한 자기(infinite self)로서 알 수 없다.

자기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존재론적 구조는 하이데거, 샤르트르 그리고 실존적 분석 학파들의 심리학자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상가들은 자기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빈스방거는 자신이 키르케고르에게 빚지고 있음을 인정했고 그의 사상적 관점에 끌어들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개념을 거부한다. 키르케고르에게는 자기의 개념에서 궁극적이었던 개념을 거부한 것이다.[#보기 Ludwig Binswanger, “Insanity as Life-Historical Phenomenon and as Mental Disease: The Case of Ellen Ilse,” and “The Case of Ellen West, an Anthropological-Clinical Study,” in May et al., Existence, pp. 236, 29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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