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1-1842년 겨울 베를린 대학에서 신화와 계시의 철학(Philosiphie der Mythologie und Offenbarung)에 대한 W.F.J. Schelling의 강의에 참석했던 사람들 중에는 프리드리히 엥겔과 키르케고르가 있었다.[#1 Paul Tillich, “Existential Philosophy,” Journal of the History of Ideas, V (1944), 44.] 두 번째 강의를 들은 후에 키르케고르는 다음과 같이 썼다.
“셸링의 두 번째 강의를 듣고 나는 매우 행복하다. 형용할 수 없이. 나는 이미 오랫동안 음울한 사유들(mournful thoughts)을 생각했고, 비통해 하고 있었다. 그가 철학과 현실성의 관계와 관련하여 ‘현실성’이라는 단어를 언급했을 때, 엘리자베스처럼 내안에 사유를 잉태한 어린 아이가 기뻐 뛰놀고 있었다.”
이런 초기의 열정이 급속히 쇠퇴했지만, 키르케고르는 강의를 계속해서 참석했고, 엄청난 강의 노트를 남겼다. 특별히 그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헤겔의 합리주의적 체계에 대한 셸링의 비판이었다. 1842년 코펜하겐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Adolph Trendelenbrug의 반헤겔적인 작품들과 W. G. Tennemann의 철학의 역사의 일부분뿐만 아니라, 라이프니츠, 데카르트,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구로 돌아갔다. 이런 각각의 연구를 통해 그는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형성할 수 있었고, 헤겔과 사변적 이상주의와의 가차없는 싸움에 무기를 공급받을 수 있었다.
자유문제와 관련된 논제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비평은 특별히 키르케고르의 관심사였다. 심판과 의지 사이의 관계는 사람이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는 신정론에서의 라이프니즈의 논점에 대답하며, 키르케고르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의지는 어떤 관계로 이해의 마지막 행위를 고수하는가...?”
그는 완전히 무관심한 의지란 모순(absurdity)과 키메라(chimera)[#2 사자의 머리에 염소 몸통에 뱀 꼬리를 단 그리스 신화 속 괴물, 불가능한 생각]라는 라이프니츠의 견해에 동의한다.[#3 JP II 1241(Pap. IV C 39)] 다른 일기에서, 그는 라이프니츠가 사람을 성가시게 하는 두 개의 어려움을 언급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자유와 필연 사이의 관계였고 문제와 그것과 분리된 부분들의 계속성에 관한 것이었다. 첫 번째 문제는 모든 사람들을 사로잡는 것이었고, 두 번째 문제는 철학자들만 사로잡고 있는 것이었다. 그 후에 키르케고르는 그의 세 개의 가명의 작품들 속에서 자유의 문제를 다룬다. 「철학의 부스러기」는 자유와 그 영역의 존재론적 측면을 정의하고 있는 반면, 「불안의 개념」과 「죽음에 이르는 병」은 자유의 인류학적 측면을 고려한다. 자유에 대한 데카르트의 생각에 대답하며, 키르케고르는 그의 기록물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내가 자유롭게 들어간 것에서만 자유롭게 나올 수 있다. . . . 내가 자유롭게 의심에서 나오려면, 자유롭게 의심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Act of Will)”
따라서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데카르트는 생각과 의지 사이의 관계를 뒤집어놓았다.
덧붙여 말하자면, 이것은 주목할 만하다. 데카르트는 명상의 한 방법으로 사람의 자유(freedom)가 생각(thought)보다 우월하다고 상기시킴으로 오류의 가능성을 설명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유가 아니라, 생각을 절대적인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명백히 이것은 연장자였던 피히테의 입장이었다. Cogito ergo sum이 아니라, 나는 ergo sum을 행동한다. 왜냐하면 이 코기토는 파생된 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이 코기토가 “나는 행동한다”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자유에 대한 의식은 행위 안에 있고 그때 cogito ergo sum이라 읽지 말아야 하든가, 아니면 자유에 대한 의식은 이후에 나타난 의식이다.
여백의 기록에서 키르케고르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이런 이동은 명확히 열정이 가득한 이동(pathos-filled transition)이지, 변증법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변증법적으로 아무 것도 파생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에게 중요하다. 열정이 가득한 이동은 모든 사람에 의해 수행될 수 있다.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왜냐하면 무한자(the infinite)로의 이동은 열정으로 구성되어 있어, 용기만을 필요로 한다.”
키르케고르는 방법론적 회의에 대한 데카르트적인 원리를 비판했다. 왜냐하면 이것은 오류를 범하여 행동(의지)하는 것보다는 반성(생각)에 더 큰 강조점을 두기 때문이다.
회의론자들이 사로잡혀 있는 것은 윤리적인 것이다. 데카르트 이후로, 그들은 모두 의심하는 기간 동안, 지식과 관련하여 명확한 것을 감히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반면에 감히 행동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런 측면에서 그들은 확률에 만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엄청난 모순인가! 하지만 의심하는 것에 대해 무언가를 하는 것이(이로 인해 책임을 초래하면서) 진술하는 것보다 더 두렵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혹은 그것은 윤리적인 것이 본질적으로 확실하기 때문인가? 그러나 거기에는 의심이 도달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데카르트의 인식론적인 문제는 키르케고르에게는 실존적인 것이다. 즉, 의심의 해결책은 반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결심에 있다.
1842년 가을 Trendelenburg와 Tennemann에 집중된 키르케고르의 남은 연구와 이를 통해,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생각할 수 있는 통찰력을 얻었다. 그의 기록물이 자료들은 그가 또한 1차 자료를 활용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운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리에 대한 논의 중에, Tennemann은 다음가 같이 말한다.
“가능성과 현실성은 모든 것에서 구별가능하기 때문에, 그것이 변화인 한, 변화란 가능한 것의 현실화(the actualization of the possible)이다. . . . 가능성의 현실화, 가능성으로부터 현실성으로의 이동이 변화(kinesis)다. 이것은 변화, 운동은 그것이 가능한 한, 가능한 것의 현실화라고 말함으로서 명확히 표현될 수 있다.”
이런 변화에 대한 개념은 키르케고르에게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는 Tennemann의 kinesis에 대한 해석을 그의 이동에 대한 이론을 위한 출발점으로 삼았다. 「불안의 개념」에서는 “질적 도약”으로 언급되는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질적 도약의 개념을 Trendelenburg의 생각에서 도움을 얻었다. 그는 최고의 원리는 오직 간접적으로(부정적으로) 입증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그가 그런 원리들의 유효성을 인식하기 위해 질적 도약의 필연을 인식하는 데에 실패한 것에 대하여 비난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근본적인 비판은 진정한 자기(the real self)가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사고하는 영역에 있다는 것과 결과적으로 사유하는 삶(the contemplative life)이 인간의 최고의 행복을 구성하고 있다는 관점에 있다. “6,3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제공하고 있는 과학의 정의는 매우 중요하다. 과학의 대상은 오직 유일한 길에 있을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과학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필연적인 것, 영원한 것이다.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모든 것은 또한 절대적으로 영원하다.” 엄밀하게 말해서 실존의 본질적인 규정(자격, qualification)은 자유이지 필연이 아니므로, 인간 실존에 대한 과학적 지식은 없다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그는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그렇지만, 키르케고르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자기(self)를 깊게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오직 윤리적인 의미에서 사유하는 생각은 entelechy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신들(gods)의 지고의 행복(felicity)은 사유(comtemplation)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소통(eternal communication)에 있다.” 그러므로 키르케고르에게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윤리적 삶의 절정이 사유하는 태도에 있다고 이해할 만큼 생각이 짧았다.
키르케고르는 라이프니츠, 데카르트 아리스토텔레스를 연구한 후에, Phenomenology of Mind와 Encylopedia of the Philosophical Sciences에 구심점을 두어 헤겔을 깊이 있게 연구하기 시작했다. 헤겔과 그의 추종자들이 철학적 이상주의와 기독교를 조화로운 관계로 만든 곳에서, 그는 기독교와 철학(헤겔의 사변적 이상주의)이 양립할 수 없는 반대관계에 있다는 것을 주장했다. 그가 사유의 역사(history of thought)에서 다르게 분류되어 있을지라도, 그는 그의 시대에 철학적 이상주의에 직접적 반대 입장에 있었다.
키르케고르가 헤겔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영향의 본질과 정도에 대하여는 의견의 불일치가 있다. Per Lønning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헤겔 철학이 키르케고르의 생각을 형상하는 대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의견이 일반적으로 지배적이다. 특별히 역사와 관련하여 그의 역사와 역설의 개념이 그렇다. . . . 이런 관점은 키르케고르의 해석이 종교에 대한 헤겔적인 철학과 어떻게 완전히 독립적인 입장에 있는지를 인식하는 데에 대한 완전한 실패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많은 키르케고르의 개념의 형성은 헤겔과의 관계 때문일 수 있다.
Stephen Crites와 Mark Taylor의 관점은 키르케고르가 상당히 많이 헤겔에 빚지도록 했다. 증거로서 그들은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자기의 개념과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자기의 개념이 동일하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렇지만, Niels Thulstrup은 키르케고르와 헤겔 사이에 언어상, 전문용어상에서 일치점 때문에 잘못 오도되는 사태를 경고하고 있다. 특별히 키르케고르의 「불안개념」과 다른 작품들에서 자아(selfhood)에 대한 삼각 구조가 그렇다.
「불안의 개념」은 1844년 6월 17일에 출간되었고 바로 그 해에 니체가 태어났다. 키르케고르은 31세였다. 같은 날, 키르케고르는 또한 Prefaces라고 부른 책을 출판했고 4일 일찍 「철학의 부스러기」가 나왔다. 이런 작품들과 더불어, 그는 같은 해에 「두 개의 건덕적 강화」와 「세 개의 건덕적 강화」 그리고 「네 개의 건덕적 강화」글 출판했다.
Jens Himmelstrup에 의하면, 「철학의 부스러기」, Prefaces, 그리고 「두개의 건덕적 강화」는 동시대의 논평이 있었다. 마지막 작품은 논평에서 덴마크 교회의 대주교였던 Bishop J. P. Mynster에 의해 찬사를 받았다. 그렇지만 「불안의 개념」에 대하여는 어떤 논평도 없었다. 다시 말해, 가장 중요한 책들 중에 하나이고 그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어려운 책인 이 책은 당대의 학자들 중에 어떤 동요를 일으키지 못했다.
「불안의 개념」은 저자의 개인의 역사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 그가 이 작품을 쓰기 전과 후에도 그의 작품과 일기에서 이 생각들이 다양한 참고자료들 속에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1837년의 일기에서 그는 어떤 예감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일어난 모든 일에 선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불안한 의식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그것에 의해 “순진하지만 부서지기 쉬운 영혼들이 자신들이 죄가 있다고 믿도록 유혹을 받는다.”
그렇지만 그에게 있어서 불안은 명백히 단순한 예감(simple presentiment)보다 더욱 만연해 있고 근본적인 것이다. 1839년 5월 12일에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가장 작은 파리에서부터 육화의 신비까지, 모든 존재[Tilvœrelsen]는 나를 불안하게 한다.” 「불안의 개념」을 출판한지 3년 후에, 그는 “하나님에 의해 잊히고, 이 거대한 세대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에 의해 간과된 채, 모든 인간 내면의 깊숙한 곳에 세계에 홀로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불안이 여전히 살아 있다”고 관찰했다.
다시, 1848년의 기록에서 그는 자신의 양육 받은 것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가 그의 영혼을 얼마나 불안으로 채웠는지를, 얼마나 소름끼치는 우울로 채웠는지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이 불안을 기독교로 이끌어내었다.[#보기 다음을 참고하라. Pap. IV A 107 그리고 IX A 411] 마지막으로 1850년 그는 “ 우울한 불안”과 “타고난 불안”에 대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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