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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인문학

다섯 번째: 키르케고르와 피터 드러커

by 엉클창 2020. 7. 31.

 

이 글은 1933년 피터 드러커가 쓴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피터 드러커

The Unfashionable Kierkegaard (인기 없는 키르케고르)

Peter F. Drucker, 1933: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다섯 번째

19세기는 로마 제국 말기에 이교도 세계가 도달한 바로 그 지점에 도달했다. 그리고 고대와 마찬가지로, 이 세기는 순전히 윤리적인 것으로 도피함으로써 출구를 찾으려 했다. 즉 인간의 이성에 근거한 덕성을 바탕으로 출구를 찾으려 했던 것이다. 독일 이상주의의 위대한 철학 체계 - 무엇보다도 칸트의 철학은 물론 헤겔의 철학 체계도 이성을 덕과 선한 삶으로 동일시했기 때문에 시대를 지배했다. 윤리 문화와 자유주의 개신교의 이 상표는 예수 안에서 "여태껏 살았던 최고의 사람"이라고 본다.다시말해, 황금률의 슬로건과 함께 칸트의 "정언 명령"을 살아낸 최고의 사람을 본 것이고 이런 윤리적 봉사에 만족스러울 만한 최고의 사람을 본 것이다. 이러한 관련된 윤리적 공식들은 마치 대부분이 옛날부터 있었던 것처럼 19세기에도 친숙해졌다. 그리고 그들은 2천 년 전에 실패했던 것처럼 현대에서도 인간 존재의 근거를 제공하지 못했다.

이를 가장 잘 대표하는 사람들에게서, 윤리적 개념은 정말로 도덕적 성실성과 도덕적 위대성으로 이끈다. 플루타르크를 반반, 뉴턴을 반반으로 하는 19세기 휴머니즘은 고귀한 것일 수 있다.(우드로우 윌슨, 마사릭, 자우로스, 맘센 등 마지막 19세기 세대의 위인들을 기억하기만 하면 된다.) 키르케고르는 자신도 깨달은 것보다 그것에 더 끌렸다. 비록 사사건건 싸웠지만, 그는 헤겔의 영향으로부터 결코 자신을 완전히 해방시킬 수 없었다. 그리고 윤리적 삶의 상징인 소크라테스는 인간 자연사의 아포지(apogee, 절정)로 그에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또한 윤리적 개념이 성실성, 용기, 그리고 꾸준함을 주기는 하지만 생명에도 죽음에도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것이 줄 수 있는 것은 금욕적 체념(stoic resignation)뿐이다. 키르케고르는 이 자리를 낙관적인 입장보다 훨씬 더 큰 절망의 하나로 여겼다; 그는 그것을 "개인이 되고자 하는 절망"이라고 부른다. 윤리적 입장이 스토아 철학처럼 고상하고 일관된 어떤 것으로 이어지지 않고 전체주의의 알약에 설탕 코팅으로 변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이것은 소련에 대한 많은 옹호자들의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인간이 이웃을 행복하게 하는 윤리적 시도에 있어서 개인의 성취감을 찾기를 소망한다. 이것이 전체주의의 현실을 상쇄하는 데 충분하기를 바란다. 혹은 윤리적 입장이 순수한 감상주의가 된다 - 악은 폐지될 수 있고 선한 의도에 의해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입장이 된다.

그리고 모든 경우에 있어서 윤리적 위치는 상대주의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미덕이 사람에게서 발견되려면 인간에게 받아들여지는 모든 것이 미덕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약 200년 전 루소와 칸트가 그랬던 것처럼 인간이 만든 윤리적 절대성을 확립하려는 입장은 윤리적 입장의 가능성에 대한 완전한 부정으로 끝나야 한다. 이런 식으로 절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그렇다면 유일한 결론은 인간의 존재는 비극과 절망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인가? 자아의 파괴, 인간이 열반에, 무(nothingness)에 굴복하는 데 있어서 유일한 해답을 찾았던 동양의 현자들이 옳은가?

키르케고르는 다른 해답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존재는 절망에 있지 않은 존재로서, 비극에 있지 않은 존재로서, 믿음의 존재로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회에서 순수하게 존재를 위한 전통적 용어를 빌리자면, 죄의 반대는 미덕이 아니다. 그것은 믿음이다.

믿음은 하나님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다. 하나님에게는 시간과 영원이 하나라는 믿음이며, 삶과 죽음이 모두 의미 있다는 믿음이다. 믿음은 인간이 피조물이라는 지식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율적이지도 않고, 주인도 아니고, 종말도 아니고, 중심도 아니다. 다만 책임을 질 수 있고 자유롭다. 믿음은 인간의 본질적인 외로움을 받아들이는 것(acceptance)이다. 또한 '우리의 죽음의 시간으로'까지 하나님이 항상 인간과 함께하신다는 확신에 의해 승리하는 것이다.키르케고르의 책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인 <두려움과 떨림>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의문을 제기한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희생시키려는 의지와 보통의 살인과는 어떤 점이 구별되었는가? 만약 아브라함이 그 희생을 견뎌낼 생각은 전혀 없었으며, 단지 쇼를 통해 하나님께 순종할 생각이었다면, 아브라함은 정말로 살인자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기꾼이라는 좀 더 비열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삭을 사랑하지 않고 무관심했더라면 기꺼이 살인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거룩한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명령은 그에게 무조건 처형하라는 절대적 명령이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자신보다 이삭을 더 사랑했다고 들었다. 답은 아브라함이 믿음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 안에서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믿었고,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면서도 이삭을 지킬 수 있었다.

아브라함은 키르케고르 자신을 위한 상징이었고, 이삭의 희생은 그의 가장 내면적인 비밀, 위대하고 비극적인 사랑을 위한 상징이었다. 그는 비록 그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했지만 그것을 도륙한 사랑이었다. 그러나 자전적 암시는 부수적인 것일 뿐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오직 믿음에서만 가능한 인류존재의 보편적인 상징이다. 믿음에서 개인은 보편이 되고, 고립되는 것을 멈추고, 의미 있고, 절대적이 된다. 그러므로 믿음에는 진정한 윤리가 있다. 그리고 믿음에서 사회에서의 존재는 진정한 자선에서의 존재로서도 의미가 있게 된다.

이 믿음은 오늘날 흔히 "신비한 경험"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적절한 호흡 운동이나 바흐(Bach)에 대한 장기간의 노출에 의해 유도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절망을 통해, 고난을 통해, 고통스러운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믿음은 비이성적이거나, 감상적이거나, 감정적이거나, 자발적인 것이 아니다. 믿음은 진지한 사고와 배움의 결과로서 나타난다. 엄격한 규율, 완전한 냉철함(sobreity), 겸손함, 그리고 더 높은, 절대적인 의지에 종속된 자아의 결과로서 나타난다. 하나님에 대한 통일의 내적 지식은, 사도 바울이 소망이라 부른 것이고, 우리가 성스러움(saintliness)라고 부르는 것으로, 소수의 사람들만이 성취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믿음을 얻을 수 있다. 누구나 절망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는 종교 체험의 위대한 서양 전통에 정면으로 서있다. 성 어거스틴과 보나벤투라(Bonaventure), 루터, 십자가의 요한, 파스칼의 전통이다. 그를 차별화하고, 오늘날 그에게 이 특별한 절박함을 주는 것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시간과 사회에서의 삶의 의미를 강조했다는 데 있다. 키르케고르는 "현대적"이다. 심리학, 미학, 변증법과 같은 현대적 어휘를 사용했기 때문이 아니다. 즉 키르케고르가 열광하는 덧없는 특성들을 사용해서가 아니라, 현대 서구의 특정 질병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의 붕괴, 정신과 육체에서의 삶의 동시성의 부정, 타자를 위한 각자의 의미심장함의 부정을 염려한 것이다.

대신, 오늘날 우리는 상호 배타적인 가능성으로서, "요기(Yogi)"와 "코미사(Commissar)"의 대칭인, 완전한 결별이 있다. 물론 이 용어는 아더 코이스들러(Arthur Koestler)의 것이다. 시간과 영원 사이에서, 자선과 믿음 사이에서 이것이냐 저것이냐이다. 여기에서 인간의 이중적 존재의 한 극이 절대적인 것이 된다. 이는 완전한 신앙의 포기에 해당한다: '코미사'은 권력과 효과를 위해 정신의 전 영역을 포기하고, '요기'는 시간(즉, 사회생활)에 인간의 존재를 악마에게 할당하고, 자신의 '나'만 구원받으면 수백만 명이 목숨과 영혼을 잃는 것을 기꺼이 보고자 한다. 둘 다 어떤 종교작인 사람에게는 취할 수 없는 입장이다. 하지만 정신 속에서 살아야 하지만, 그러면서도 진정한 신앙이 자선(즉, 사회적 책임과 사회적 책임)에 있어서, 자선을 통해 영향을 끼쳐야 하는 그리스도인에게는 가능한 입장이다.

그러나 적어도 둘 다 파산을 정직하게 인정한다면, 정직한 입장이다. 이는 유럽, 개신교, 가톨릭의 다양한 "기독교" 정당, 혹은 이 나라에서 여전히 강력한 "사회 기독교"를 위한 운동을 통해 문제를 회피하려는 시도와는 대조적이다. 이러한 시도는 믿음과 종교적 경험을 행위로서 도덕과 선의로 대체하기 때문이다. 성실하고 진지한 반면, 때로는 선에 의해, 성스러운 사람들에 의해, 지지되고 이끌리는 반면, 그들은 정치에서 '요기'처럼 비효과적일 뿐만 아니라 영적 생명을 주기 위해 '코미사'처럼 실패해야 한다. 그들은 시간에서의 삶과 영원에서의 삶 모두 타협하기 때문이다. "그는 적어도 혼욕(mixed bathing)에 반대한다"는 주장으로 히틀러를 지지하기위해 나온 30대의 오스트리아 성직자와 가톨릭 정당 지도자는 정치에서 기독교 도덕주의자의 끔찍한 희화화였다. 그러나 그는 도덕이 믿음과 혼동되는 곳에 존재하는 것을 희화화했다.

키르케고르는 쉬운 출구를 제공하지 않는다. 실로 이성과 도그마보다는 경험에 치중하는 모든 종교 사상가로서 그는 정신 속에서 삶을 크게 강조하여 인간 존재의 두 극을 하나의 전체로 통합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임무를 보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과 작품에서도 긴장 속에 있는 인간 존재의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키르케고르의 엄청난 문학적 산출물 중 한 부분이 가명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으로 낸 작품인 "건덕적 강화"가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가 다른 작품들에 대한 그의 저술을 숨기려했던 것이 아니다. 가명의 저자들은 아무도 속일 수 없었다. 그러나 "건덕적인" 책만 믿음을 사회적 효과(social effectiveness)로 바꾸어 놓았고 따라서 "요기"만이 아니라 진정으로 종교적이다. 또한 키르케고르의 20년간의 은둔생활, 글쓰기, 사고, 기도, 고통의 전부가 단지 그의 생애 마지막 몇 달을 바친 폭력적인 정치행동의 준비였을 뿐 아니라, 도덕과 전통을 자선과 믿음으로 혼란에 빠트린 덴마크의 기성교회와 고위 성직자들을 향한 격렬한 1인 전쟁이었다.

키르케고르의 믿음은 인간 존재의 고립과 불협화음을 극복하지 못하지만, 그것을 의미 있게 만들어 버림으로써 견딜 수 있게 만들 수 있다. 전체주의자의 철학은 인간이 죽을 수 있게 한다. 그런 철학의 힘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슬픔과 고통의 시대, 재앙과 공포의 시대(즉, 우리 시대)에서 죽을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충분하지 않다. 키르케고르의 믿음 또한 인간이 죽을 수 있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그가 살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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