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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인문학

라이프니츠의 신정론

by 엉클창 2022. 2. 11.

 

들어가는 말
현재의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드러나는 것 중 하나가 악이다. 악은 가능한 세계 중에서 최상의 세계를 만들어도 피할 수 없는 결함이다. 다시 말하면 부족함이라고 할 수 있다. 구조적으로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것을 악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형이상학적인 악이라고 한다. 형이상학적 악이 우리 세계 안에서 물리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악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과 연결되어서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나타나는 것이 도덕적 악이다. 또한 인간이 인간에게 행하는 윤리적인 고통, 고난, 인간이 인간에게 전가하는 고통을 윤리적 악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우리가 다루어야 할 악이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가장 아름답게 만드신다면, 신의 조화 가운데 세상이 존재한다면, 도대체 그 악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인간이 행하는 그 악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 원인은 하나님이신가? 죄를 범하는 인간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라이프니츠는 자신의 이론, “충분이유율”을 중점으로 모나드론을 전개한다. 그리고 형이상학적인 세계를 정당화하는 예정조화론을 펼친다. 그리하여 필자는 라이프니츠의 기본원리를 다루며, 이것을 전제로 모나드론과 라이프니츠가 이야기하는 형이상학적 세계와 악과 인간의 자유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라이프니츠의 기본원리
라이프니츠의 기본원리는 모순율, 술어포함개념원리, 충분이유율, 최선의 원리, 식별불가능자의 동일성 원리가 있다. 먼저 모순율은 “어떠한 명제도 동시에 참이면서 거짓일 수 없다.” 이다. 술어포함개념원리는 “주어는 그 문장이 참일 때 반드시 술어를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어 ‘박영범은 목사다. 박영범은 교수다.’라고 하는 것처럼 술어포함원리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명제가 참일 때 가능하다. 충분이유율은 형이상학적인 한 지점을 이야기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나 발생하는 것이나 모든 것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원인이 있다. 그래서 존재하는 것이다. 충분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 사건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충분이유율은 아퀴나스와 비슷하다. 아퀴나스도 영원히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에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말과 동일하다. 원인이 영원히 거슬러 올라가면 언제 영향을 끼치는가? 끼칠 수 없다. 라이프니츠는 영원히 갈 필요도 없다. 중간에 한 지점을 딱 끊어서 충분한 이유가 있는 한 지점을 설정하면 그 지점으로부터 모든 것이 설명된다면 굳이 영원의 끝까지 돌아갈 필요가 없다. 그것이 바로 단자론이다. 이 단자론 하나로 세상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최선의 원리는 세상을 설명하기 위한 가설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은 지혜롭고, 선하고, 전능하다. 하나님의 지혜는 가능한 세상들 가운데 (우리와 같은 세상이 관념의 영역에서는 무수히 많을 수 있다.) 가장 좋은 세상을 알아차릴 수 있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가장 좋은 세상을 가져오게 하신다. 하나님의 전능은 보시고 가져오신 세상을 실재로 만들게 하신다. 하나님의 의지와 자유가 인간의 의지와 자유가 조화를 이루는 가능한 것 중에 최상의 세상을 만든다.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유를 확보하면서 '하나님의 의지와 자유'가 관철되는 세상을 놓으신 것이다. 식별불가능자의 동일성 원리는 아래와 같다. A와 B가 있다. 두 요소가 완벽하게 똑같다. 그 속에 배열만 다르다. 이것을 라이프니츠는 이 둘은 동일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식별불가능한 것이 있을 때 동일한 것이다. 관념의 세상에 있는 동일한 무엇인가가 또 다른 곳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와 같은 세상은 여기에만 있는 것이다.
여기서 악의 문제가 제기되기도 한다. 악은 가능한 세계 중에서 최상의 세계를 만들어도 피할 수 없는 결함이다. 부족함이다. 완벽한 것은 위에 있어야 하는데 구조적으로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것을 악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형이상학적인 악이라고 한다. 형이상학적 악이 우리 세계 안에서 물리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악이다. 그것이 인간과 연결되어서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나타나는 것이 도덕적 악이다. 형이상학적인 악은 피할 수 없는 악이다. 현재의 세계에서 드러나는 것이 물리적 악이다. 이것은 어쩔 수 없다. 조화를 이루고 이유를 가지고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연악은 악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 우리에게 고통은 주지만 악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 태풍이 불면 이난민들에게는 고통이고 악이다. 그렇다고 세상에 태풍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가? 지구가 멸망한다. 물리적 악은 선하다/악하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더 큰 선에 기여할 수 있는 악이다.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악이다. 라이프니츠의 이론(방법론)과 세상에 대한 개론적 이해는 이상과 같다.
 
라이프니츠 형이상학적 얼개: 모나드의 세계
라이프니츠의 신정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독특한 형이상학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의 형이상학을 대표하는 이론은 바로 모나드론이다. 여기서 모나드란 우주에 가득 차 있는 “―형이상학적인―단순한 실체”이다. 이 단순한 실체인 모나드들은 쪼개질 수 없고 태어나거나 소멸되지 않으며, 개별적이기에 서로 동일시될 수 없지만 서로 긴밀하게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연동한다. 이렇듯 ―모나드들로 구성되어 있는―우주는 모나드들의 상호적인 연동과 변화를 통해 형성된다. 온 우주는 모나드들의 집적체의 결합이며 어떤 혼란과 혼돈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순한 실체인 모나드는 서로 직접적인 물리적 영향을 주고받지는 않지만 서로 끊임없이 연속적으로 연동하며 동시에 그 원인은 내적인 원리(관념적 영향)에서 가진다. 모나드들 간의 연간성은 관념적이며, 신적인 예지 안에서 앞서 조화롭게 예정되었다는 예정조화론이라는 개념을 가진다.
모나드들은 내적인 요소로서 각기 상이한 지각과 욕구를 지니고 있다. 모나드들은 신의 무한히 많은 개체적 실체들(individual substance)로 창조되었으며, 각 실체는 우주를 향한 한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은 모든 것에 대한 모든 관점을 가지고 있다면 모나드들은 특정 관점에서 지각한다. 그리하여 신은 모든 것을 평면에서 보지만, 모나드들은 원근법적으로 지각한다. 고로 신은 이러한 신의 관점을 필자는 4차원적 혹은 그 이상인 신의 관점이라고 개념을 규정하고 싶으며, 모나드들의 원근법적 지각을 3차원적인 모나드들의 관점이라고 개념을 규정하고자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세계를 해명하는 혹은 구성하는 라이프니츠의 존재론에는 오직 개체, 혹은 모나드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물질의 실제 모습은 모나드들의 집적체일뿐이며, 우리에게는 물질의 모습으로서만 드러난다. 영혼(모나드)과 물질(정초적 현상, 덩어리, 유기적 실체, 모나드들의 집적체) 사이에는 결합체가 있는데 이것은 생명체로서 이를 물체적 실체(corporeal substance)라고 부르며, 모나드들의 실제적 모습을 물질의 모습으로 즉 상대적으로 명확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그럼에도 모나드의 역할은 고유하며, 관념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신의 예정조화론과 같은 신적 질서에 부합한 것으로 귀속된다.
이러한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적 원리는 도덕적 자율성을 폐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양자의 양립 가능성을 드러내려고 하기 때문에 그는 모나드의 내적 요소로서 지각과 욕구를 언급한다. 모나드들은 각기 상이한 지각과 욕구를 지니고 있다. 모나드의 내적 지각과 욕구에는 보편적인 원리인 “충족이유율”이 작동하고 있다. 즉 이 세상 속에 발생하는 모든 일은 그렇게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충분한 이유를 지니고 있다.
모나드(monade)는 하나라는 뜻의 그리스어 모나스(μονας)에서 유래했다. 가장 단순한 실체로서의 모나드는 순수 영혼으로서의 신을 제외한 물체를 가진 영혼으로 이해할 수 있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은 스피노자와 데카르트의 중간관점을 취하고자 한다. 라이프니츠는 이 양자의 관점을 취함으로써 신적 섭리와 의지의 자유 사이의 양립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즉 신적 예지를 긍정하며 예정조화론을 전개하여 신이 모나드의 지각에 상응하도록 모나드들을 배열한다고 말한다. 동시에 개별 모나드들의 의지적 자유를 옹호하면서 외적 강제와 절대적 필연성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장한다. 그리하여 신의 자유와 이성적 모나드의 자유 의지가 작동하고 있는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원리를 총족이유율이라고 한다. 이처럼 라이프니츠의 우주는 “―생성됨과 변화하는 세계라고 할지라도―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충분한 이유를 가진 합목적인 세계”인 것이다.
 
가능한 세계 중 최상의 세계와 악의 문제
라이프니츠가 구상한 형이상학은 위계질서를 지닌 일원론적이며 유기체적인 세계다. 모나드들로 구성된 세계에서 각각의 모나드는 개별적이지만 일정한 위계질서를 갖추면서 더불어 상호연관성 안에 놓여 있다. 모든 모나드는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거대한 형이상학적 원리 안에서 조화되어 연결되어 있다.
라이프니츠는 신의 완전성 개념을 재정립한다. 즉 라이프니츠에게 있어서 신의 완전성이란 완전성의 정도뿐 아니라 상이한 완성들 모두를 소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의 완전성을 정의한다. 이러한 신의 완전성은 우리 영혼의 완전성과 동일하지만, 그 정도와 수에 제약이 없어, 신은 자신의 완전한 지각을 통해 완전하지 못한 모든 모나드를 조화롭게 배치한다.
이러한 신의 완전성이야말로 우리가 신을 경배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근거가 된다. 왜냐하면 라이프니츠의 신은 형이상학적인 의미와 더불어 도덕적 의미에서도 가장 완전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신이기 때문이다. 신의 완전성이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은 곧 신의 완전한 세계 통치라는 실천적 이념과 상통한다. 그러므로 완전한 신이 창조한 세계 역시 신의 완전성을 담고 있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신이 최선의 것을 행하지 않았다면 신의 행동의 이유를 찾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만일 신이 불완전한 세계만을 만들었다면 그는 불완전한 아무 세계나 만들 수 있을 것이며 따라서 그다지 찬양할 만한―혹은 사랑할 만한― 존재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완전한 신이 창조한 세상은 신적 의지의 산물이라는 명제뿐만 아니라 제작과 통치의 원리에 있어서도 선의 규칙에 의존하기 때문에 세상은 선한 것이다. 신은 수에서도 완전하기에, 신의 완전성 안에서의 전능은 신의 선함과 병행한다. 고로 전능한 신은 가장 선하며,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제작하고 더불어 선의 규칙에 따라 세계를 통치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이 세계보다 더 나은 세계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여야 할 것이며, 더불어 신의 의지에 따라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서도 진정으로 만족해야만 할 것이다.
신은 가장 사랑할 만하고 우리에게 최고의 기쁨을 부여한다. 우주 안에 형성된 완전한 질서, 즉 모든 선의 근원이 되는 그 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신의 통치에 대해 만족하는 사람들―에 대한 신의 사랑은 우리의 희망도 충족시키며, 우리를 최고의 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 길로 인도한다.
신적 지혜는 무한한 선함과 연관하여 유일무이하게 최상의 것을 선택한다. 최상의 세계에 대한 신의 선택은 최고의 이성에 의한 선택이다. 가능한 세계 중에서의 최상의 세계를 구상할 때, 신은 세계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이 공존 가능한지를 검토한다. 신은 하나의 세계 내에, 그 세계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이르기까지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요소들이 서로 공존 가능한지를 검토하고 이를 토대로 가능한 최상의 세계를 구상한다. 신이 이렇게 최상의 세계를 기획했다면, 이 최상의 세계 내에 들어 있는 악이라는 요소는 결코 그렇게 부정적인 것이 아니며 제거되어야 할 대상도 아니게 된다. 오히려 이 세계로부터 악이 제거될 때, 그 세계는 최상의 가능한 세계가 아닐 것이라고 라이프니츠는 주장한다. 이러한 라이프니츠의 주장은 신의 완전성에 대한 선험적 진리에 근거하고 있다.
 
“세계는 물론 죄 없고 고통 없이 존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라이프니츠)가 반박하는 것은 그런 세계가 더 나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가능한 세계내에서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각각의 우주는 부분으로 구성된 전체다. (...) 따라서 신은 단번에 모든 것을 미리 조율했다. 모든 사물은 자신의 실존 이전에 관념적으로 모든 사물의 현존에 대한 결정에 가담했다. 만약 이 세상에 일어나는 가장 작은 악이라도 없었더라면, 모든 것 안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이 세계를 선택한 창조로부터 최상의 세계로 판단된 이런 세상은 더 이상 없었을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악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며, 신이 창조한 세계를 신의 두 의지와 연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신은 자신의 의지, 즉 선행의지와 후속의지를 가진다. 이를 통해서 자신이 상정한 가능한 세계들 중 최상의 세계를 선택한다. 고로 후속의지는 선행의지를 온전히 오류 없이 현실화시키고자 하는 의지이며, 가능한 것을 실현하는 의지를 의미한다. 이를 통해 신은 앞서 선을 원하지만 결과적으로 최상을 원하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또한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물리적 악은 종종 더 큰 악을 방지하고 더 큰 선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허용되기에, 최상의 것을 선택하는 신의 후속 의지는 다만 허용하는 의지이며, 이러한 악에 대한 허용은 신의 지혜와 덕성에서 발생한 것이다.”
신은 피조물들과의 구분을 위해 형이상학적인 악으로서의 불완전함 또는 “피조물의 제한된 수용성”을 허용하였다. 이 제약된 수용성으로 인해 악이 발생하게 되는데, 신은 모든 물질의 원인인 것은 맞지만, 그 물질의 형상에 기인한 결핍의 원인은 아니다. 이것은 악이 현실화될 수 있는 관념적 기능 토대일 뿐이다.
신은 도덕적, 물리적 악을 원하지 않지만 창조의 필수조건, 즉 형이상학적 악으로 인해 도덕적, 물리적 악을 허용해야만 하는 것이다. 물리적 악은 도덕적 악에 대한 벌로서 주어지지만 더 큰 선에 기여하는 적합한 수단이 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신은 피조세계가 고통을 통해 더 나은 완전성에 이를 수 있도록 이를 허용한다. 하지만 신이 본래 원했던 것과는 다르게, “도덕적 악은 무제약적 의무의 결과 현상이라는 점에서 허락 또는 허용되었을 뿐이다.”
 
자유와 신의 섭리

예로부터 가장 어려운 과제 중 하나가 신의 섭리를 인정하면서도 의지의 자유를 고수하는 일이었다. 라이프니츠는 선함과 지혜와 힘에 있어서 신의 완전성을 고수하면서도 신의 예지와 의지의 자유가 양립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자유의 세 요소 중에서 라이프니츠는 무엇보다도 지성을 가장 중요하게 보며, 자유의 영혼은 지성을 가진 존재만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명료한 의식으로 의지의 자유를 행동할 때에 비로소 정신적 자유에 상응하는 선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라이프니츠는 자유를 의지의 문제로 국한하지 않으며 이성의 사용과 연결되어 있음을 주장한다.
라이프니츠가 말하는 자유는 “무차별적 균형감”과는 다르다. 의지의 선택은 충분한 이유에 따른 결단으로 어떠한 선택에도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유 있는 의지의 선택은 보편적인 이성의 법칙인 ―그렇게 일어나야만 하는―충분이유율과 연결된다.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자유의 조건으로 이성적 존재의 자발성과 동시에 그 자발성은 신에게 의존해 있다. 문제는 이러한 자발성, 즉 의지의 자유가 어떻게 예정조화론과 모순 없이 양립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예정조화론은 관념의 영역, 가능성의 영역에 두고, 인간적 자유의 의지적 실행은 현실의 영역에 둠으로 양자를 혼동해서는 안 되는 입장을 가지게 된다. 예정조화론은 인간적 자유의 의지적 실행으로 일어날 우연한 일들을 그저 앞서 바라본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의지는 충족이유율에 따라 선택한 것으로, 신의 예견에 반하는 것도 아니며, 신의 예견에 부합도록 강제된 것도 아니다. 즉 신의 예지로부터 유추되는 절대적 필연성과는 무관한 인간의 독립적인 의지의 선택을 가지게 된다.
그럼에도 신적 예지는 오류가 없다. 신적 예지는 분명하게 성취되어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신적 예지는 결과적으로 필연적이다. 그러나 논리적으로는 의지적 자유의 조건들에 의해 가설적 성격을 갖게 된다. 즉 신적 예지의 결과는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점에서 가설적 필연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된다. 절대적 필연성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필연성을 의미하며, 가설적 필연성은 신의 예지와 부합하는 이성적 존재의 자유가 빚어내는 필연성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라이프니츠는 신적예지의 영역과 현실세계의 관계를 ‘거울 안의 세계와 거울 밖의 세계의 관계’로 이해한다. 신적예지의 영원의 세계는 거울 안의 세계로, 현실세계는 거울을 마주하고 있는 세계로 말이다. 양쪽에 있는 거울의 세계는 상호간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지만 서로의 세계를 그대로 비춘다. 아무런 강제력을 행사하지 않으면서 동일한 세계를 비추고 있는 것이다.
 
나가는 말
우리는 라이프니츠의 이론으로부터 라이프니츠가 말하는 신정론에 이르기까지 살펴보았다. 라이프니츠는 자신이 도출한 명제로부터 형이상학적 세계와 현재의 세계를 동일화하며, 예정조화론에 입각한 세계에 대한 정당성으로부터 하나님을 변호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우리 발제조는 “라이프니츠의 신”이라고 비판하고자 한다. 더불어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에 대해 버블란트 러셀은 “일종의 형이상학적 우화”라고 자신의 풍사 소설 속에 넣어 비판한다. 필연과 자유의 양립 가능성을 설파하는 소설 속 인물을 통해 독자들에게 웃음거리가 되게 하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신적 예지와 자유의 양립 가능성을 통해,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는 결정론이나 운명론으로 도덕적 삶을 폐기하려는 시도에 대해 반대하고자 했다. 하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일의적으로 단순하지 않으며, 오히려 다의적이고 모호하다. 라이프니츠의 가능한 세계 중 최상의 세계에 대한 이념은 신의 완전성에 근거한 순환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라이프니츠의 입장에서 신은 이 세상의 현실적 고통과 악에 대해 그저 낙관적으로만 관망하는 존재이다. 라이프니츠의 신은 전능하다. 그러나 철저히 인간의 이성적, 의지적 자유에 의해 신의 뜻이 실현되기를 원하는 이성적 자연종교의 모습을 띄고 있다. 고로 우리는 신앙 혹은 관념의 영역과 ―실천―이성적 영역의 구분하라고 요구하는 칸트의 비판을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며, 고통이 실재하는 그 곳에서 신정론의 출발점을 삼아야만 할 것이다.

[출처] [사상연구] 라이프니츠의 신정론|작성자 동쪽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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