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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인문학

헤겔의 수 개념, 미분계산의 철학적 정당화

by 엉클창 2022. 2. 26.

 

이병철 동아대 철학교수

 

1.서론

헤겔은 논리학 1장에서 수 개념에 대한 풍부한 논의를 전개했다. 또한 그는 근대 수학 철학의 핵심적인 문제였던 미분 개념의 확립과 미분 계산의 정당화를 위하여 엄청난 주석을 달아 놓았다.

물론 헤겔의 수 및 미분학에 대한 논의는 무한의 개념과 연관하여 전개되었는데, 일찍부터 그의 무한 개념에 관해서는 많은 해석가들이 주목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의 논의에서 기초가 되었던 수 및 미분학에 대한 논의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었다. 다만 수학사에서 후일 미분학의 원리를 최종적으로 확립했다고 일컬어지는 Karl Weierstass(1815-1897)가 헤겔의 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지적되고 있을 뿐, 여기에서조차 그가 헤겔의 사고로부터 어떻게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찾을 수가 없었다.

필자는 이 논문에서 지금까지 간과되었던 헤겔의 수 개념 및 그의 미분학의 정당화 논의를 설명하고자 한다. 이는 헤겔의 변증법을 근대 과학의 기초 위에서 재해석하려는 필자의 오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 자체로서도 수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풍부하게 해준다는 데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헤겔 논리학의 서술 자체가 사변적인 언어로 가득 차 있고, 그의 서술 형식이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유사한 표현들의 반복 속에서 그의 사상의 핵심을 찾아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기에 그의 글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방법적 원칙이 필요했다. 이 논문은 그러한 원칙 위에서 전개되었는데, 글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그 원칙들을 밝히자면 다음과 같다.

. 헤겔의 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학사에서 수에 대한 논의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특히 수 개념을 현대에 확립했다고 하는 프레게의 수론은 헤겔의 수 개념을 이해하는데 비추어 볼 수 있는 거울이 될 것이다.

.미분학에 대한 논의는 사실 헤겔이 시작한 것은 아니다. 미분학이 뉴톤 , 라이프니츠에 의해서 정립되었을 때, 그들 자신이 풍부한 철학적 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헤겔은 양적 무한성 개념의 주에서 그들의 논의를 다시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서 헤겔의 입장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2. 헤겔의 양 개념

헤겔은 수 개념을 연속적인 양 개념으로부터 도출하였다. 이는 프레게(Gootfried Frege)산수학의 기초(1884)에서 자연수 개념을 먼저 정의하고 이어 後數라는 개념을 통하여, 수의 연속성을 찾았던 것에 비해 볼 때, 거꾸로 된 과정이다. 따라서 이는 특별히 주목될 필요가 있다. 우선 그의 양 개념이 어떻게 도출되었는가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1)순수량

헤겔은 우선 기하학의 대상인 공간적 크기를 연속적 크기로, 그리고 산술학이 다루는 수를 불연속적 크기로 규정한다. 그리고 그는 이 두 크기는 모두 양을 지반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고 본다. 그것이 바로 순수량이다.

그런데 이 순수량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헤겔은 양을 그 규정성이 존재에 무차별하게 되었다는 것이라고 단적으로 규정하거니와, 그 의미는 무엇인가? 헤겔은 주에서 양의 특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든다.

“어떤 것이 질로서의 한계는 본질적으로 그 규정성이다. 그러나 우리가 양적 한계로 한계를 이해한다면, 예를 들어 밭의 양적 한계가 변화하더라도 여전히 밭이다. 그러나 밭의 질적인 한계가 변화된다면, 변화는 것은 그것을 밭으로 만드는 규정성이며, 그것은 목초지나 숲으로 된다.”

즉 양은 증감 가능한 것(etwas, das sich vermehren oder vermindern laesst)’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증감 가능하다니, 규정성이 무차별하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증감가능성이란 어떤 것들이 일정한 순서집합을 이루기 때문에 가능하다. 만일 어떤 크기들이 순서집합을 이루지 못한다면, 크기의 증감이란 불가능하다. 따라서 헤겔이 순수량의 의미는 수학적으로 일정한 순서집합을 이룬다고 이해해도 될 것이다.

헤겔이 공간적 크기나 수를 순수량으로서 일반화한 것은 모두가 이런 순서집합이라는 점에 있는데, 우선 이런 순서집합으로서 순수량이 헤겔에서 어떻게 도출되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2) 순서집합으로서 양적 크기의 도출.

. 대자존재

대자존재(das Fuersichsein)는 자기 자신과의 단순한 관계이다. 그런데 이 대자존재에는 두 가지 계기가 있다. 그 하나는 일자(das Eins)이고, 다른 하나는 현존재(dasein)이다.

“이런 대자존재의 단순히 자기에 관계함을 일자라 한다. 이 자기관계 속에서 그 계기는 자체 내에 귀속하며, .이 자기 관계 속에서 대자존재는 직접성의 형태를 지니며, 그 계기는 현존하는 것으로 된다.”

여기서 대자존재, 일자, 현존 등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선 다음과 같은 예들을 들어보자.

하나의 상품과 다른 상품이 서로 교환된다고 하자. 이 양자가 교환 관계 속에 있을 수 있음은 두 개의 상품이 교환가치를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교환 관계에서, 한 상품의 다른 상품과의 관계는 질적인 측면에서는 타자에의 관계이지만, 그러나 가치의 측면에서는 자기에의 관계이다. 따라서 하나의 상품이 교환의 공통적인 가치를 갖는다는 점에서 곧 대자존재이다.

그런데 상품의 교환관계의 이런 특징들은 다양한 자연 사물들 사이의 관계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두 개의 공간적 사물이 있다고 하자. 우리는 두 사물들 사이에 대응관계를 찾을 수 있다. 이 대응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가능한데, 예를 들어서 부피의 측면에서도 가능하며, 무게의 측면에서도 가능하다. 어느 측면에서 대응시키던지, 서로 대응되는 두 개의 공간적 사물들의 관계에서, 두 가지는 대응시키는 그 측면을 제외하고는 서로 대립된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반면 대응시키는 측면에서는 공통적 지반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대응시키는 측면에서 그 사물의 타자와의 관계는 곧 자기 관계이며, 따라서 하나의 공간적 사물은 이 측면에서 대자존재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헤겔의 대자존재는 일단 사물들의 공통적 지반을 의미하지만, 이 공통적 지반은 단순한 주관적 비교를 통해서 나오는 사물의 추상적인 성질과는 구별된다. 왜냐하면 이런 대자존재는 실제의 관계가 존재하는 경우에 성립한다. 즉 교환이나 대응과 같이 이미 실재하는 관계가 있는 경우에만 성립되며, 따라서 주관에 의해서 자의적으로 추상되는 공통적 성질과는 구별된다.

그러기에 이런 공통성은 하나의 속성이지만 개개의 사물이 가지고 있는 속성 중의 하나는 아니다. 이 속성은 사물들이 어떤 실제적 관계 속에 있음으로 해서 가지는 속성이며, 따라서 이런 관계가 없어도 사물들이 내재적으로 가진다는 본성과 같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앞의 상품의 예에서 이제 교환되는 두 개의 상품 관계 속에서 각각의 역할이 구분된다. 하나의 상품은 다른 상품의 가치의 단위가 되며, 반면 다른 상품은 그 상품에 의해서 그 크기가 규정된다. 마찬가지로 두 개의 공간적 사물의 부피를 대응시킨다고 할 때, 하나는 대응의 단위이고, 반면 다른 하나는 그것에 의해서 그 크기가 규정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어느 것이 단위이고, 어느 것이 그것에 의해 규정되는지는 전적으로 우연적이다. 어느 것도 단위가 될 수 있으며, 또 다른 것에 의해 규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헤겔을 대자존재는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일자이며 다른 하나는 현존재인데, 일자란 관계되는 것들 가운데 다른 것의 단위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을 의미하며, 반면 직접적 현존재이란 그것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단위가 되는 일자도 물론 직접적 현존재의 측면을 가지고 있으나 여기서 그 측면은 단순히 단위로서의 역할을 담지하는 것으로서의 의미를 지닐 뿐이다. 반면 규정되는 것에서 그 공통적 지반이란 관계가 가능하도록 하는 측면으로서 내면적으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일단 그것은 직접적으로 감각에 표상 되는 구체적 물질적 존재, 즉 현존재로서 나타날 뿐이다.

. 반발과 견인의 관계

대자존재가 출현하는 이런 관계에서 각 사물은 내면적으로 공통적 지반을 가지고, 표면적으로 대립되는 질적 성질을 지닌다.

그러므로 이런 관계는 한편으로는 비록 같은 것과 같은 것의 관계이되, 질적인 대립이 있음으로 해서 여기서 서로 관계 맺는 것들은 서로 반발한다. 물론 이 반발은 이미 내면적으로 관계 맺는 것들 사이에 벌어지므로, 이미 그것들은 상호 견인하고 있다. 따라서 반발은 견인과 통일되어 있다.

“다수의 일자들은 존재하는 것(구체적 사물로서)들이다. 그 현존 또는 상호 관계는 비관계이고, 그 관계는 그 다수의 일자들에 외면적이다. 이것이 추상적 공허이다. 그러나 그들 자체는 타자에 대해서 관계하되 자기 자신에 관계하는 것들이다. 여기서 제시된 모순은 무한성이 직접적 존재 속에 정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발은 일자들이 일단 다수에로 자기 분열하는 것이지만, 그 부정적 태도는 무력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반발은 서로를 존재하는 것으로서 전제하기 때문이다. 반발에서 관념성(내면적 연관)은 당위일 뿐이며, 이 관념성은 이제 견인에서 실현된다”

앞에서 대자존재가 출현하는 관계의 예로서 상품의 교환관계나, 공간적 크기의 대응관계를 들었지만, 이런 관계들의 일반적 형식을 헤겔은 반발과 견인의 관계로 규정하고 있다. 헤겔은 이 관계를 비교(Vergleichung)라고 규정하기도 하는데, 이런 관계는 자연의 인과적 관계나, 정신의 합목적적 관계와도 구분되는, 오직 양적인 것에서만 나타나는 고유한 관계라 하겠다.

. 단위로서 순수량

일자들 사이의 반발과 견인에 의해서 어떤 일자가 보편적 단위로서 규정되고, 다른 일자들은 그것에 의해 크기가 규정되는 수다성(die Mehrheit)으로서 규정된다. 물론 다양한 일자들 가운데 어느 것이 보편적 단위가 되는가는 사물들의 실제적 관계에 의해서 결정된다. 어떻든 이렇게 사물의 보편적 단위로 규정되는 것을 헤겔은 순수량이라 한다.

예를 들어 길이 부피 무게 등 모든 양적 크기는 일정한 것을 보편적 단위로 하여 규정되어 잇다. 길이의 단위는 그 어느 것이나 될 수 있다. 사람의 키도 단위가 될 수도 있고, 나무의 크기도 단위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이제 보편적 단위로서 피트(보폭)이나 미터가 선택되었고, 크기는 이러한 일정한 구체적 사물들을 보편적 단위로 삼고 있다. 마찬가지로 상품에서 어떤 특정한 상품 예를 들어 금이나 은이 이제 보편적 단위가 되는데, 이런 보편적 단위가 바로 화폐이다. 화폐는 상품 가치의 단위이다. 여기서 왜 보폭이 또는 금과 은이 보편적 단위가 되는가는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관계 속에서 결정되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보편적 단위로서 순수량과 순수량의 개념인 순서집합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어떤 것이 다른 것들의 단위가 됨으로써, 즉 그것들 사이의 비교를 통해서 하나의 순서가 세워질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아직 여러 가지가 단위로서 사용되고 있다면, 그 각각의 순서가 생길지는 모르지만, 여기에 일의적인 순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비로소 보편적인 단위가 성립함으로써, 이는 다시 말해서 다른 모든 것들이 서로 관계 맺는 경우에만, 하나의 일의적인 순서가 세워질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만일 어떤 사회에서는 길이가 보폭을 단위로 하고, 어떤 사회는 길이가 미터를 단위로 한다면, 그런데 두 사회에서 보폭과 길이 사이에는 어떤 비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물들의 길이에는 일정한 순서가 생길 수 없다. 비로소 하나의 단위, 즉 미터가 유일한 단위로 됨으로써 길이의 순서집합이 생겨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상품과 상품의 교환에서 세계적인 보편적 단위로서 금이 확정되어야 비로소 상품의 가치에 관한 순서집합이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3) 보편적 단위로서 양적 크기의 도출의 의미 분석

헤겔이 양을 보편적 단위로 규정했다는 점은 수 개념 및 양에 대한 그의 독특한 이해를 보여준다. 그 의미를 포착하기 위해서는 프레게의 수 개념과 비교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프레게는 수를 대응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도출하였다. 즉 서로 다른 사물의 집합이 대응될 때, 이는 수적 동일성이다. 이러한 서로 대응하는 사물들의 집합들 가운데 대표적으로 선택된 것이 바로 수이다. 예를 들어서 다섯은 본래 손가락 집합을 의미하는데, 이는 발가락 집합과 대응한다. 이런 손가락 집합에 대응하는 다양한 집합들 가운데, 손가락 집합이 대표적으로 선택됨으로서 수가 나타난다고 한다.

이런 프레게의 수개념에 비해볼 때 헤겔의 양의 개념은 다음과 같은 공통성과 차이점을 보여준다.

(1) 프레게가 사물 집합의 대응 관계를 통해 수개념을 도출하였다고 한다면, 헤겔은 사물들 사이의 반발과 견인의 관계, 또는 비교관계를 통해서 양 개념을 도출했다. 대응이 반발 관계의 일종이라는 점에서 양자는 공통성을 가진다고 하겠다.

(2) 그러나 프레게가 대응을 통해서 직접 수 개념을 도출하였던 반면, 헤겔은 수 개념을 통해서 순수량을 도출하였으며, 이로부터 다시 수의 개념을 도출하려 했다.

(3) 또한 프레게가 수개념을 확립한 다음, 後數라는 개념을 정의함으로써, 자연수의 순서집합을 규정하려 했던 것에 비해 본다면, 헤겔은 견인과 반발의 관계를 통해서 순수량의 순서집합이 성립되는 것으로 보았다.

문제는 결국 헤겔의 이른바 반발과 견인의 관계를 통해서 순서집합으로서 순수량이 도출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만일 견인과 반발의 관계를 단순히 동등성과 부등성의 대응관계와 같은 의미로만 해석한다면, 수많은 사물들의 상호 동등성과 부등성의 관계만 가지고는 일정한 순서집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AB와 다르고, BC 와 다르다는 것만으로는 AC 의 순서를 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헤겔이 견인과 반발이라는 관계를 통해서 순서집합으로서 순수량이 나온다면, 그 관계가 대응이 아니라 비교임을 전제해야 한다. 즉 A는 B보다 크고, B는 C보다 크다는 관계가 있어야 A는 C 보다 크다는 순서집합이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

 

3.

1) 기하학과 산술학

기하학은 공간적 크기를 대상으로 한다. 반면 산술학은 수를 대상으로 한다. 공간적 크기는 연속적, 불가분적이고, 반면 수는 가분적, 불연속적 크기이다. 수학의 이 두 영역은 역사적으로 각기 다른 전통 위에서 발전했다. 기하학은 그리스적 전통에서 발전하면서 엄격한 연역적이며, 이론적인 학문으로 성립되었다. 반면 산술학은 이집트 등에서 실용적으로 발전하였고, 아직은 경험적으로 발견된 성질들에 의존했다.

그런데 양적 크기의 두 종류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오랫동안 수학자 및 철학자들을 괴롭혔던 문제이었다. 거슬러 올라가 고대 제논의 역설에서 다루어졌던 문제도 이것과 관계된다고 하겠다. 그의 문제는 불가분적 크기로서 기하학적 선을 가분적 점의 집합으로 구성할 수 있는가의 문제라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중세를 거치면서 대수학의 발전으로 수학의 두 영역은 서로 교차하기 시작하였다. 기하학은 대수학을 받아들이면서 구체적인 공간표상으로부터 해방되어 보다 일반적인 수학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반면 산술학은 연역적인 체계를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와서 해석학의 문제가 제기되면서, 다시 이 문제는 철학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해석학의 문제가 본래 공간적 크기들을 대수학을 통해 구성하는 문제인데, 이는 곧 연속적 크기인 공간을 불연속적인 수를 통해 재구성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해석학은 무한의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미분 적분학으로 발전하였는데, 이것이 근대철학에서 무한의 개념이 문제되는 철학적 배경인 것이다.

무한의 문제는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 관념론의 주요한 철학적 문제로 제기되었는데, 특히 칸트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문제를 제2의 이율배반으로서 다루었다. 연속적이라고 가정하더라도, 불연속적인 것이며, 또 불연속적인 것을 가정하더라도, 연속적이라는 결론이 나온다는 점에서, 그는 두 가지 주장이 모두 자기 모순적이고, 결과적으로 이는 인간의 오성적 인식에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 보았다. 칸트의 이런 이율배반으로서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개념은 헤겔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는 칸트가 오성적 인식의 불가능성을 주장한데 대해서는 비판하였지만, 적어도 그가 양 또는 수의 내적 모순을 밝혀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있다.

헤겔의 수론, 더 넓게는 양론에서 밝히고자 했던 문제도 바로 이 문제, 즉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다. 또 이에 대한 논의는 필경 무한의 문제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2)

헤겔은 순수량의 두 종류를 연속적 크기와 불연속적 크기로 구분하였다. 이는 전통적으로 공간적 크기와 수로 구분한 것과 대응되지만, 왜 그는 연속성을 그 기준으로 삼았던 것인가?

. 먼저 헤겔의 연속성이란 개념의 의미가 정확히 밝혀져야 할 것이다. 데데킨트는 실수의 연속성을 절단을 통해서 정의하였는데, 헤겔이 이런 의미에서의 연속성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그의 연속성 개념은 양적 크기들이 동질적이며, 그러므로 그것들이 본질적으로 상호 관계를 지닌다는 의미라 하겠다. 반면 이에 비추어 볼 때, 불연속성이란 양적 크기들이 서로 관계를 하지 않고, 서로 대립적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연속성과 불연속성은 순수량에 내재하는 두 계기로서 파악하고 있고 이는 양 자체에 내재하는 본질적인 모순이다.

“양은 본래 공존(Aussereinandersein)이다. 연속적 크기는 부정성이 없이 지속하는 것으로서 또 자체 내 동등한 연관으로서의 공존이다. 그러나 분리는 연속적이지 않고 중단하는 것으로서의 공존이다. ”

양은 본래 보편적 단위이다. 이것에 의해서 다른 사물들의 크기가 규정된다. 이 때 양들이 서로 관계되고, 이렇게 서로 관계될 수 있다는 것은 이 양들이 동질적인 지반 위에 있기 때문이다. 바로 각각의 양들이 동질적 지반에 있다는 측면이 바로 연속성의 측면이다.

그런데 하나의 양을 단위로 해서, 다른 사물의 양이 비교되어질 때, 비교되어지는 것은 일정한 크기를 가지는데, 이런 일정한 크기를 지니는 측면이 바로 불연속적인 측면이다. 여기서 각각은 고유한 크기이다.

. 공간적 크기

“공간적 크기는 단지 제한 일반성만을 갖는다. 그것이 단적으로 규정된 정량으로서 고찰되려면 수를 필요로 한다. 기하학은 그 자체로서는 공간도형을 측정하지 않으며 측정술이 아니고, 단지 비교할 뿐이다. ..그 규정에서도 변이나 각의 동등성이나 동일한 거리에 대한 규정이 부분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동등성과 부등성이 진정한 기하학의 규정이다”

공간적 크기, 길이나 부피나 등등은 아직 수적인 측정이 없을 경우에는 단지 연속적인 측면만을 나타낸다. 그것들은 일정한 순서집합을 이루지만, 그 각각의 크기가 얼마 만큼인지는 규정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원에 외접하는 사각형과 원, 그리고 원에 내접하는 사각형은 크기의 순서를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아직 각각이 어느 만큼 큰지는 규정되지 않는다. 물론 이후 그것은 수에 의해서 측정될 가능성은 가지고 있다.

.

“수는 그 현존을 이루는 다수의 일자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무규정적인 방식으로서가 아니라 , 한계의 규정성이 그것에 속하게 된다.”
“수는 일자들이 자기 내로 복귀하여, 다른 수에 대해 무차별하다. 이런 다른 수에 대한 무차별성이 수의 본질적인 규정이다.”

다양한 양적 크기 가운데 수는 다른 양적 크기를 측정하는 단위로 사용된다. 이때 이제 수는 독특한 성격을 지니게 된다. 우선 어떤 양적 크기가 수에 대응한다는 점에서 각각의 수는 고유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사과는 엄지에 대응되며, 배는 검지에 대응된다. 엄지와 검지는 서로 비교 불가능한 고유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경우 수는 불연속적이다.

그런데 수 역시 하나의 양적 크기이다. 즉 엄지나 검지는 손가락을 단위로 하는 양적 크기라는 점에서는 일정한 순서집합이고, 따라서 연속적이다.

헤겔은 공간적 크기나 수가 모두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을 본다. 다만 공간적 크기는 하나의 양적 크기로 다루어지고, 반면 수는 그것의 측정에 사용된다는 점에서 불연속적인 것으로 규정되었다.

. 수의 특징

(1) 수의 추상성

물론 수 역시 일정한 구체적 사물을 단위로 해서 성립한 일정한 공간적 크기이었다는 점에서, 구체적 사물성을 지니고 있다. 수는 예를 들어 손가락을 단위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공간적 크기들의 보편적 측정 단위로서의 수는 이제 이런 일정한 구체적 사물적 특징을 지니지 않으며, 따라서 순수한 추상적 존재만을 가질 뿐이다.

수가 가지는 추상적 존재는 일찍부터 철학에서 자주 논의되어 왔다. 플라톤은 수가 감각적 물질과는 구별되는 독립적 실재를 가진 것으로 간주한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수가 감각적 물질과 구별되며, 동시에 추상적으로 실재하는 이데아와도 구별되는 중간적 존재라 했다.

이런 논의에 비추어 본다면, 헤겔의 입장은 오히려 후자와 가깝다. 헤겔에서 수는 마치 화폐와 같다. 양자는 모두 구체적 사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러나 양자에게서 그 사물로서의 의미는 사라진다. 양자는 모두 다른 것에 대한 측정단위로서의 역할만을 담당하여, 따라서 추상적인 존재이다.

(2) 수의 외면성

그러데 이 수가 성립하는 공간은 극단적으로 외면적이다. 길이나 부피, 무게 등등의 서로 다른 물질을 단위로 한 공간적 크기들과는 달리 수는 이런 공간적 크기들이 관계하는 그야말로 순수한 공간에서 성립하는 것이므로, 수가 성립하는 공간은 물질에 대해서 전적으로 외면적인 공간이다. 이는 기하학적 공간이 전적으로 물질에 외면적인 공간이었던 것에 비견된다. 헤겔에 의하면 기하학적 공간조차 사실은 물질적 단위를 사용하므로, 제약되어 있다고 볼 수 있으며, 가장 추상적인 존재인 수의 공간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공간이다.

수가 외면적인 것이므로 수는 조작 가능하다. 수가 외면적이라고 함은 수들 사이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관계는 어떤 내적인 필연성을 지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수가 전적으로 외면적이기 때문에, 수의 결합과 분리와 같은 연산작용은 수에 외부적인 것인 것으로 간주된다.

“수는 무차별한 규정성으로서 타성적이다. 그러므로 수는 외부에서 움직여지거나 관계 맺어져야 한다. 그 관계 방식 곧 계산 방식이다.”

 

4. 수의 모순과 양적 무한성

1) 외면적 수와 내포적 수

“어떤 것이 얼마나 큰가 하는 수적 규정성은 다른 크기로부터의 구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크기의 규정성은 일반적으로 고립적으로 규정된, 무차별한, 단순히 자기에게만 연관되는 한계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이 (고유한) 한계를 지닌 다수는 다수 일반처럼 서로 부등한 것이 아니라, 연속적인 것이다. 다수의 각각은 다른 것과 같은 지반에 있다. ..다수는 스스로 연속성 속에 결합되며, 단순한 단위가 된다.”

수는 일반적인 측정 단위로서 다른 공간적 크기는 이에 대해 대응한다. . 이런 의미에서 수들(손바닥과 엄지)은 서로 비교 불가능한 것이며, 외면적인 것이고, 고립적으로 규정된 것이다. 헤겔은 이런 대응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수의 규정성을 외연적 크기, 또는 집합수(기수)라 이름한다.

그러나 이러한 수들은 그 자체가 하나의 공간적 크기이었으며, 그런 점에서 이 수는 본래 순서집합을 이루는 것, 즉 연속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이런 외면적으로 서로 비교 불가능한 것들 사이에는 내면적인 연속성, 순서가 이미 존재한다. 이런 수들이 내면적인 연속성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 내포적 크기로서의 수, 정도(서수)이다. 이는 앞의 5, 2와 구분되는 5번째, 2번째로서의 수인데, 헤겔은 이를 단순한 규정성 속에 있는 수다(Mehres in einfachen Bestimmtheit), 이런 외면적 수와 내포적 수의 구별은 앞에서의 연속적 크기와 불연속적 크기의 구별과는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다. 후자의 구별은 양적 크기의 종류 상의 구별이다. 이것은 실재 존재하는 공간적인 크기들의 구분이다. 반면 전자의 구별은 수가 가지는 규정성의 두 가지 구별이다. 다만 수의 규정성이 지니는 이런 차이를 추상화함으로써 기수와 서수라는 두 가지 수가 나오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사유에서의 추상적인 구별일 뿐 실제의 수들의 구별은 아니다.

 

2) 양자의 모순과 그 지양

이런 수의 두 가지 측면의 상호 연관된 속에서의 대립이 수의 모순을 이루며, 이런 모순으로 인해서 수적인 운동이 일어난다. 이 수의 운동은 탈자(sich-ausserich-sein)이며, 즉 수는 무한히 증감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정도는 이러한 내포성 속에서의 수다성 아래 있는 단순한 크기 규정이다. 이 크기 규정은 각각이 단지 자기 관계하며 동시에 본질적으로 서로 관계한다. 그러므로 각각은 다른 것과의 연속성 속에서 자기규정을 갖는다. .정도의 자신을 통한 타자와의 관계로 인해서, 정도의 좌표에서의 상승과 하강이 가능하며, 중단되지 않는 불가분적 변화로서 흐름이 출현한다.”

수가 운동한다는 이런 개념은 언뜻 상식과 어긋난다. 왜냐하면 상식에서 수는 그 자체는 타성적인 것이고, 그 수의 조작은 수 밖에서 주관의 개입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헤겔은 물론 수가 가장 외면적인 것, 서로 不等한 것이므로, 이런 표상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수가 본래 내면적인 연속성을 지니고 있는 양적 크기라는 점에서, 수가 본래 운동하는 것이라고 하는 입장을 취한다. 물론 수의 이런 운동은 질적인 변화나, 생명체나 영혼의 운동과는 구별된다. 질적인 변화는 존재로부터 무로의 단적인 이행이고( 어떤 성질이 있다가 없어지고, 없던 성질이 다시 생겨난다는 점에서), 생명체의 운동은 일정한 목적을 주어진 조건에서 실현하는 합목적적인 운동이다. 그러나 수의 운동은 또 다른 수를 낳는다. 그러므로 여기서 수들의 계열, 또는 급수가 발생한다. 수가 이처럼 계열적이거나 급수적인 우동을 하는 것은 앞에서 말했듯이 수가 외면적인 대립 속에서 내면적인 연관을 지니는 것이고 , 즉 같은 양적인 지반 위에 있으면서 서로 다른 것이어야 한다는 점 때문이다.

 

3)악무한 , 무한진행

오성적인 사고에서는 수의 이런 계열 운동, 급수는 무한히 진행된다. 이런 무한진행을 통해서, 무한대와 무한소의 개념이 만들어진다. 무한소나 무한대는 한편으로는 양의 단적인 부정이므로, 양과는 질적인 차이를 가진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계열적 운동의 결과이므로, 새로운 하나의 양이다. 무한소와 무한대라는 개념은 따라서 이런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한대나 무한소를 생각할 때, 한편으로는 무한에 무한히 가까워지는 것같이 생각되지만(계열운동이라는 점에서), 그러나 무한이 양의 타자라는 점에서는 이 사이에는 단절이 존재한다. 그래서 무한은 결코 가까워지지 않는 것이다. 무한에 대한 오성적 표상으로서 무한대, 무한소를 헤겔은 악무한 개념이라고 한다.

“무한진행은 무한자를 과제로 하지만 그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무한자를 영속적으로 산출하지만 정량을 벗어나지 못하고, 무한자는 긍정적이고 현재적인 것이지 못한다.”

 

5. 미분학과 진정한 무한성

1) 미분학의 문제

미분학은 라이브니츠와 뉴톤에 의해서 확립되었다. 그 목표는 대수적인 방법으로 기하학적 양, 즉 연속량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런 미분학은 결국 산수과 기하학의 종합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그런데 해석학은 미적분 계산을 하는데 있어서 무한의 개념을 사용한다. 라이프니츠에서처럼 무한소라든지, 뉴톤에서처럼 사라지는 양이라든가 하는 것이 그런 것인데, 이 자체가 개념적인 모순을 품고 있기에 철학적으로 무한 문제를 제기하게 되었다. 그에 못지 않게 문제된 것은 미분 계산에서의 문제이다. 물론 이 문제 역시 무한개념을 사용함으로써 발생하는 문제이므로, 사실 같은 문제라 하겠는데, 간단히 그것을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일단 만일 미분을 무한소의 크기로 규정한다면, 이제 예를 들어 미분은 (이것은 자유낙하 운동의 법칙을 다루는 등식이다.) 다음과 같이 계산될 수 있을 것이다.

무한소의 증분을 dx, dy를 가정하자.

y+dy= 1/2g (x+dx)(2)

dy=gx dx+g dx(2)

따라서 미분함수는 dy/dxgx+ gdx인데

여기서 gdx에서 dx0에 가까워지면 0으로 간주할 수 있으며, 따라서 무시할 수 있다. 결국 미분함수는 gx이다. (이것이 속도를 나타내는 등식이다.)

이같은 미분계산의 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미분함수의 두 번째 항목인 gdx를 아주 작은 수이므로 무시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는 데서 출발한다. 그런데 아무리 적은 수이기는 하지만 수학과 같은 엄밀한 체계에서 이를 무시한다는 것이 정당한 일인가?

헤겔은 수학이 무한 개념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이를 개념적으로 정당화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비록 미분학이 그 성과에 의해서 올바르다는 것을 입증했다고 하더라도,(이는 주로 기하학적 증명의 결과와 해석학적 결과가 일치한다는 것에 의존하는데), 이런 성과에 의한 입증은 수학이라는 학문에서는 어디까지나 우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우연한 증명을 통해서는 미분학의 적용범위를 결정할 수가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적용범위가 변화됨으로써, 지금까지 우연적으로 타당했던 것이 타당하지 않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다 결정적인 문제는 미분학이 잘못된 증명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미분 계산에서 무한소의 크기가 처음 가정되었다가, 나중에는 아주 작은 수이므로 무시할 수 있다는 이유로 이를 부정하고 마는데, 이는 수학의 엄밀성을 해치고 있다고 한다. 더욱 기이한 것은 이렇게 부정확한 과정을 통해서, 나오는 결론은 기하학적 증명에서의 엄밀하게 입증된 것과 동일한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다.

헤겔은 미분학이 부딪힌 이런 문제는 미분학이 무한 개념을 올바로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한 이해는 잘못하는데서 비롯된다고 본다. 그는 미분학에서 스스로 이해함이 없이 사용하는 무한성 개념에는 진정한 무한 개념이 근저에 깔려 있다고 본다. 다만 수학자들이, 또는 그 수학의 기초가 된 오성적 형이상학자들이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곡해하고 있을 뿐이다. 대표적으로 수학적 무한성의 개념을 곡해한 사람은 칸트이었다.

칸트는 수학적 무한에 전제되고 있는 무한한 전체라는 개념이 성립할 수 없음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그에 의하면 무한하다는 것은 자신의 크기보다 더 크거나 더 작은 크기가 없는 크기를 말하는데, 여기서 무한은 일정한 단위에 대해서 성립하는 것, 즉 무한 번째로서 무한이다. 단위가 무엇이던가에 그것에 대한 관계에서, 그보다 큰 수가 없다면, 그것은 동일한 무한이다. 그런데 이제 단위의 크기가 서로 다르다고 한다면, 동일한 무한이 그 단위의 차이에 따라서 크거나 작을 수 있다. 그런데 무한이 어떻게 크거나 작을 수 있는가? 그래서 그는 이러한 사고는 모순을 내포하는 것이므로, 무한한 전체란 존재할 수 없다고 한다. 그는 무한한 전체라는 개념 대신 선험적 무한 개념을 제시하였는데, 이는 주관의 계기적 종합에 의해서 성립한다.

헤겔은 이 개념은 사실 무한진행이라는 개념과 다를 바가 없으며, 다만 이를 주관의 종합작용에 기인시킴으로써 , 무한진행의 모순을 객관과 주관의 모순으로 옮겨놓았을 뿐이라고 비판하였다.

 

2). 진정한 무한개념.

. 뉴톤의 流率 개념.

헤겔이 무한의 개념을 확립하는데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은 바로 뉴톤이다. 뉴톤은 운동과 속도라는 구체적 표상으로부터 미분학의 기초개념인 흐르는 양이라든가, 모멘트(Momentum)이라는 개념을 끌어냈다.

속도는 운동의 순간적인 변화율을 의미한다. 가속도는 다시 이런 속도의 순간적인 변화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가속도의 적분을 통해 속도가 규정되며, 속도의 적분을 통해 운동거리가 규정된다.

마찬가지로 뉴톤은 유한의 양은 생성된 크기(流量)이라 한다. 이런 유한의 양을 그 순간에서 생성시키는 것이 바로 모멘트이다. 그런데 이 모멘트는 무한소 개념이 가정하는 것과 같이 하나의 유한한 양은 아니다. 그것은 생성하는 순간에서 그 생성의 비율이다. 마치 속도가 운동의 순간적인 변화율(유율)인 것과, 그리고 가속도가 속도의 순간적 변화율인 것과 같다.

뉴톤은 이런 유율을 최종적 비율이라는 개념을 통해 찾으려 하였다. 즉 어떤 함수에서 일정한 유한한 크기의 증분(Zuwachs)을 가정한다면, 그때의 가로축과 세로축의 증분의 비율이 계산될 수가 있다. 그런데 만일 이 증분이 무한히 사라지게된다면, 다시 말해서 가로축이 출발점에 무한히 가까이 다가간다면, 그때 최종적으로 접근했을 때의 비율이 곧 최종의 비율이다. 그는 이 최종 비율은 앞에서의 미분계산에서 첫 번째 항목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앞에서 미분계산 dy/dx=gx+g dx ....에서 dx=0 라면 미분값은 바로 gx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증분이 무한히 사라지게 될 때, 이때도 가로축의 증분과 세로축의 증분 사이에 비율을 가질 수 있는가? 그것은 수학적으로 표현하자면 0 /0이 일정한 값을 갖는다는 주장과 같기 때문에, 많은 의심을 자아냈다. 최종적인 비율이 있기 위해서는 오히려 증분이 사라지는 크기가 아니라, 무한소라고 가정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이에 대해 뉴톤은 소멸하는 크기의 최종비율이 있다는 것으로부터 최종 크기가 불가분적이다 는 것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소멸하는 양의 최종의 비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른다. 이러한 양이 소멸하는 직전에 있어서는 그 비는 아직 최종의 비는 아닐 것이며, 소멸해 버린 다음에는 이미 비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최종의 속도라는 것은 물체가 일정 위치에 도달하여 운동을 그만두기 이전에 물체가 지닌 속도가 아닐뿐더러, 그렇다고 그 후에 생기는 속도도 아니고 사실은 물체가 그 위치에 도착한 순간에 있어서의 속도가 최종속도인 것이다. ..즉 최종의 비란 그것으로 이들 양이 소멸하는 비이며, 마찬가지로 바야흐로 생기려하는 양의 최초의 비도 그것으로 이들 양이 생기는 비를 가리키는 것이다.”

 

. 헤겔의 무한 개념.

2, 7은 단순한 수이다. 여기서 수들은 외면적인 것이며, 그 관계는 내재적일 뿐이다. 그런데 이제 이와 같은 분수를 보자. 이러한 수들은 4/14 그리고 6/21로 대체되어도 동일한 분수가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수들은 그 자체로서 독립적인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하나의 관계(분수) 속에서 그 계기로서만 의미를 지닌다. 이처럼 관계 속에 있는 수는 이제 고유한 질적인 특성을 지닌다. 과 에서 2는 같은 수이지만, 그 질적 특성은 다르다. 동일한 2가 한 번은 기울기 의 직선함수 상에서 존재하는 것이며, 다른 한 번은 기울기의 직선함수 상에서 존재하며, 따라서 이미 그 자체에서 서로 다른 기울기라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관계 속에 있는 수는 그 자체에서 규정된 수, 질적인 형식 속에서의 크기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수의 규정성, 양의 질적인 특성을 일러서 헤겔은 그것이 바로 수의 무한성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개념적으로 무한성이란 양의 타자이면서, 양의 지반 위에 있다는 두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이런 관계 속에 있는 수가 위와 같은 개념에 일치하기 때문이다.

 

헤겔은 이런 진정한 무한성의 개념과 악무한의 개념이 어떻게 서로 관련되어 있는가를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보여준다.

= 0.295714 295714.....

전자는 분수적 표현이고 후자는 이를 단순한 수적인 표현이다. 후자는 무한히 진행된다. 그것이 정확히 표현하기 위해서는 소수점 이하의 규정들이 끊임없이 추가되어야 한다. 이렇게 추가되면 될수록 분수에 가까워지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분수에 도달하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이 분수와 단순한 수라는 두 가지 표현이 모두 무한 개념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후자는 이를 무한진행을 통해서 보여주며, 전자는 진정한 무한으로서 관계를 보여준다고 한다.

그러므로 헤겔은 무한급수가 무한히 더해져도 결국 분수에 도달하지 못하는 이유는 분수가 단순한 수가 아니라, 이미 질적인 성질을 가진 수이고, 양적으로는 이런 수의 질적 성질이 표현될 수 없기 때문이라 한다.

“집합수는 급수의 진행을 통하여 필요한 만큼 정확하게 된다. 그러나 급수를 통한 표현은 당위이고, 피안이다. .....왜냐하면 질적 규정성에 기초하는 것을 집합수로 표현한다는 것은 지속적인 모순이기 때문이다.”

이제 무한성의 개념과 미적분의 개념 사이의 관련을 살펴보기로 하자.

분수에서 분모와 분자를 이루는 수들에 대해서 분수 즉 그 지수는 외면적인 관계를 갖는다. 왜냐하면 이 수들은 그 관계를 떠나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분수에서 지수가 외면적임으로 해서 이것은 고정된 값을 가진다.

그런데 이제 y(2)/x=k라는 표현에서 보자. 이 이차함수에서 각 점에서의 기울기는 서로 달라진다. 그 기울기의 변화는 그 도함수로 표현될 수 있는데 즉 y/x=2이다. 이런 점에서 이 이차함수에서는 수들의 관계로서 지수가 자체적으로 변화하며, 이대 지수의 값은 이차함수의 각 점에 고유한 것이므로, 여기서 지수는 수에 대해 내면적인 관련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도함수를 표현하는 dy/dx라는 표현에서 dy, dx는 각각 단순한 양적 크기(무한소)가 아니다. 미적분에 대한 자주 벌어지는 오해는 이에 대한 잘못된 파악에서 기인한다. 만일 이 양자를 단순한 무한소라고 본다면, 어째서 이 무한소의 비례(dy/dx)가 어떤 때는 4가 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9가 되기도 하는지가 이해되지 않는다. 이런 차이는 이 양자가 오직 이 관계 속에서만 성립하는 것이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해소될 수가 있다. dy dx는 오직 그 관계 dy/dx에서만 존재하는 것이고, dy/dx는 질적인 특성을 지닌 수이다. 이처럼 질적인 것이기에, dy/dx는 각 점에 따라서 기울기가 변화하는 2차함수의 각 점에 따라서 다른 값을 지닐 수 있다.

“dy, dx는 정량이 아니다. ...단지 서로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 즉 계기로서만 의미를 지닌다. 이들은 정량으로서의 어떤 것이 아니며, 유한한 차이가 아니다. 그 비율 밖에서는 순수한 영이며, 그러나 비율의 계기로서 즉 미분계수의 규정들로서 받아 들여져야 한다.”

 

무한을 수의 질적 특성으로, 또는 수의 기울기라는 표상을 통해 파악한다면, 이제 이런 생각은 다음과 같은 함축을 지닐 것이다.

) 헤겔은 이미 수를 운동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비록 수가 외면적인 것들이고, 그 관계는 내재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 내재적 관계가 바로 연속성이었는데, 이제 무한성 속에서 수의 이런 연속성이 드러나게 되었다.

) 그런데 수가 어떤 관계 속에 있는가에 따라서, 이런 연속성은 다르게 규정된다. 이런 생각은 수적인 비율을 통해서 사물의 질적 성격을 규정하려는 시도와 연관된다.

 

3) 미분계산의 정당화

헤겔은 일단 무한의 개념을 비례로서 이해한 이후, 이어서 미분 계산의 정당화 문제에 접근해 들어간다. 그는 그에 앞서 라이프니츠나, 뉴톤, 라그랑제 등이 이 정당화 문제를 어떻게 접근했는지에 대해 비판하며, 마지막으로 자기의 입장을 제시했다.

. 라이프니츠, 볼프

우선 무한소를 가정했던 라이프 니츠와 볼프는 미분계산의 정당성에 대해 설명했다.

“산의 높이의 측정에서 바람이 그 동안 모래알을 정상으로부터 제거한다고 하더라도 못지 않게 정확하게 측정되는 것과 같이 , 또는 월식을 계산하는데 집이나 담의 높이를 무시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헤겔에 의하면 수학에서는 경험적 정확성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수학적 측정은 경험적 측정과 구별된다는 점, 또한 사실 기하학적 방식으로 획득되는 결과와 미분계산으로부터 획득되는 결과는 동일한데, 정확한 결과가 부정확한 수행으로부터 나올 수는 없다는 점에서 볼프의 생각은 잘못이라고 한다.

 

. 뉴톤

뉴톤의 유율 개념이 헤겔이 무한 개념을 확립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지만, 그러나 헤겔은 그 역시 미분계산의 정당성을확립하는데 서는 실패했다고 한다.

뉴톤은 미분계산의 정당성을 보여주기 위해 이렇게 설명했다.

우선 dy, dy를 가정했을 때,

먼저 1/2 dy, 1/2dx 만큼 증가되었을 때 xy 의 증가는

(1)xy+1/2 dy x +1/2 dx y +1/4 dy dx이다.

이번에는 1/2 dy, 1/2dx 만큼 감소되었을 때 xy 의 감소는

(2)xy-1/2 dy x -1/2 dx y +1/4 dy dx이다.

따라서 이제 dy, dx만큼의 증가를 계산해 본다면

이는 (1)에서 (2)를 빼면 되는데, 그러면 dy x+ dx y만이 남는다.

따라서 뉴톤에 의하면 xy 의 미분계산에서 dy dx항목을 무시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헤겔은 이것은 계산 상 잘못이다고 한다. (x+dx)(y+dy)의 값은 위와 같은 방식으로 계산한 결과와 일치하지 않으며, 이것은 위와 같은 계산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 라그랑제(Lagrange)의 미분계산의 정당화

이런 미분계산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근대 수학 철학자들 가운데, 헤겔은 특히 라그랑제의 방식에 대해서는 특별히 주목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이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라그랑제는 뉴톤과 마찬가지로 운동과 속도라는 물리학적 개념으로부터 미분계산의 정당화를 얻으려고 하였다. .

그는 운동거리는 형식적 등속 운동과 그 증가분의 합성으로 이루어진다는데 주목하였다. 즉 시간의 순간적인 증가분은 d 라고 할 때, 그 운동거리는 s=vt+1/2 gd(2)로 규정할 수가 있다. 이때 그는 이런 등식에서 첫 번째 항목의 질적 의미와 두 번째 항목의 질적 의미가 서로 따른다는 것에 착안하였다. 즉 첫 번째 항목은 등속운동을 다룬다. 두 번째 항목은 등가속운동을 다루고 있다.

그는 운동의 이런 의미에 비추어서 , 이른바 미분함수에서 각 항목들은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다고 하였다. 예를 들어 y= ft+ f't+f''t....의 미분함수가 있다고 할 때 첫항목의 의미와 두 번째 항목의 의미, 그리고 나머지 각 항목들의 의미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미분함수에서 두 번째 이하의 항목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무시할 수 있는 차이이기 때문이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어서, 무의미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역학에서 운동함수가 발전해 들어가는 급수의 항들에게 특정한 의미가 주어지며, 그래서 최초의 항 또는 최초의 함수는 속도의 모멘트에, 그리고 두 번째 항은 가속력에, 그리고 세 번째 항은 힘들의 저항에 관계한다. 따라서 여기서 급수의 항들은 그 합의 부분들로 간주될 뿐만 아니라, 개념의 전체의 질적인 계기들로 간주된다. 그것에 의해서 나머지 항들의 제거는 그것들을 상대적으로 사소하다는 이유로 제거하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의미를 가진다.”

라그랑제의 이런 입장은 헤겔의 입장으로도 이어지는데, 단 헤겔은 그의 주장이 운동이라는 구체적 표상을 통해서만 설명되는 것이지 사상의 본성을 일반적, 개념적으로 파악한 것은 아니라고 규정하였다. 즉 그것은 하나의 유추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 헤겔의 문제해결

그렇다면 미분학은 고대 기하학적 증명이 가지는 엄밀성에 도달할 수는 없는 것일까? 헤겔은 무한해석의 원리가 유한 크기의 수학원리보다 고차적이므로 무한분석은 유한수학의 명증성을 포기했어야 한다고 했다. 마치 철학이 자연사 과학이 가지는 명료성을 요구하지 않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그는 무한개념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통하여 미분 계산의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한다.

) 먼저 헤겔이 무한을 비율로서 간주한다는 점은 앞에서 설명했다. 이 무한은 어떤 수가 가지는 다른 수에 대한 내적인 관계, 비율이다. 만일 물리학적 구체적 표상을 사용한다면, 속도가 거리의 변화율인 것처럼, 무한은 수의 변화율, 또는 기울기인 것이다.

미분 즉 dy/dx에서 각각의 dy, dx는 단순히 x축과 y축의 일정한 크기, 유한한 양을 의미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미분계수의 한 측면으로서만 의미를 지닌다. dydx에 대한 dy 이며, dx역시 dy 에 대한 dx인 것이다. 따라서 이 dx, dy는 주어진 함수가 어떤 함수인가에 의해서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다.

) 이어서 헤겔은 미분계산에서 두 번째 항목 이하의 제거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미분규정을 단지 가변적 크기가 성장한 다음 얻는 일정한 변화로부터의 함수를 차이를 규정한다는 과제로 보는 형식주의 대신에 원리의 질적 의미가 주어지고, 계산이 이것에 의존하게 된다면 우리의 전체 어려움은 제거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x(n)의 미분은 (x+dx)(n)의 전개에 의해서 주어지는 급수의 최초의 항에 의해서 전적으로 충분하게 주어진다. 나머지 항들은 고려되지 않는 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작기 때문이 아니다.

........합이 문제가 아니라 비례가 문제이므로 미분은 전적으로 최초의 항에 의해서 발견되어 진다. 그 다음의 항들, 고차적 미분이 요구되는 곳에서 그 규정상 급수의 증식은 합으로서가 아니라 동일한 비율의 반복으로서 존재한다. 우리는 단지 그 비례만을 원하며 이것은 최초의 항에서 이미 완전하게 주어진다. 급수형식의 요구, 즉 합이 요구는 비례의 관심에서부터 격리되어야 한다.“

헤겔은 결국 두 번째 항목 이하는 비례의 관점에서 무관계한 것이므로, 제거되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대체 헤겔의 이런 주장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예를 들어 어떤 3차함수가 있다고 하자. 일정한 점에서의 그 도함수는 2차함수로 규정된다. 그런데 바로 이 도함수의 동일한 점에서의 이차적 도함수는 1차함수로 규정된다. 이대 하나의 점은 3차함수, 그 도함수인 2차함수, 도함수의 도함수인 1차함수의 한 점이라는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헤겔은 미분계산에서 나타나는 두 번째 항목이란 바로 첫 번째 항목의 모멘트이며, 3번째 항목은 2번째 항목의 모멘트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 다음 항목의 모멘트는 바로 앞의 항목의 변화에 이미 영향을 주었으므로, 다음 항목의 값은 이미 앞의 항목의 값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그는 이것을 반복이며, 따라서 미분계산에서 불필요하다고 주장했다.

 

6. 결론

결론적으로 헤겔의 수에 관한 논의나, 미분 계산의 정당화는 수철학에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1) 프레게는 수를 정의하고, 다음으로 수의 연속성을 규정하려 했는데, 헤겔은 이 과정을 거꾸로 짚어나갔다. 즉 먼저 연속적인 양을 구한 다음, 이어서 그로부터 수를 도출하였다.

(2) 무한히 곧 수의 비율이라는 헤겔의 주장은, 칸토르와 같은 무한집합론에 대해 비판적인 함축을 가지고 있다. 칸토르는 무한 역시 유한의 양과 마찬가지로 대응을 통해서 규정하였는데, 헤겔에 따르면 무한은 유한의 양과 전적으로 구별되는 것이므로, 이런 대응이라는 개념으로 규정할 수 없게 된다.

필자로서는 헤겔의 수론에서 제기되는 이런 수 철학적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 이는 앞으로의 논의에 맡겨두고, 이 논문으로서는 헤겔의 수론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복원한다는 목적에 제한하기로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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