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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인문학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정리

by 엉클창 2022. 2. 12.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은 여러 부문에 걸쳐서 대단히 큰 것이었으나, 어느 부문 보다도 논리학(論理學)에서 가장 컸다. 고대 말기, 형이상학에 있어서는 아직도 플라톤이 우월성을 보이고 있었을 때, 논리학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권위자로 인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의 이 지위는 중세를 통해 존속되었다. 기독교 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부문에서도 우월성을 인정하게 된 것은 13세기에 가서야 비로소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 우월성은 문예부흥 이후에는 대체로 퇴색되었다. 그러나 논리학에서 그의 우위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모든 카톨릭의 철학 교사들과 그 밖의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완고하게 현대 논리학의 새로운 발견들을 거부하며,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과도 같이 낡은 이 체계에 집착한다. 이런 점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역사적으로 정당하게 평가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오늘날까지 미치고 있는 그의 영향은 분명한 사색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의 선인(先人)(플라톤까지 포함하여)에 대한 그가 이루어 놓은 진보가 어떤 것이었는가를 생각하기 곤란하며, 또 한편으로 그가 이루어 놓은 논리적 업적이 막다른 골목이 되어 버려, 뒤따르는 2000년 이상의 기간이 정돈상태(停頓狀態)에 머물지 않고 계속 발전해 나가는 한 단계가 되었더라면 얼마나 더 경탄할 만한 것이었을까? 아리스토텔레스 이전 사람들을 고찰할 때, 여러분이 그 사람들에게 감화를 받지 않도록 하라는 주의를 환기시킬 필요는 없다. 또 그들을 다룰 때 그들의 능력에 대해서 마음껏 칭찬하면서도 그들의 학설에 여러분이 찬동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특히, 그의 논리학은 오늘날에도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단순한 역사적 태도만 가지고는 다룰 수가 없는 성질의 것이다.

논리학에 있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업적 중의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삼단논법(三段論法, syllogism)에 관한 학설이다. 삼단논법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는 한 추론(推論)인데, 대전제(大前提, major premiss)와 소전제(小前提, minor premiss)와 결론(conclusion)이다. 삼단논법은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데, 스콜라 철학자들은 기억하기 편하도록 각각에 대해서 이름을 붙였다. 그 중에 가장 일반적인 것이 '바버러(Barbara)'라고 불리는 형식이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대전제)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소전제)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결론)

또는,

모든 사람은 죽는다.
모든 그리스 사람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 사람은 죽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두 가지 형식 사이에 차이를 두지 않았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나중에 고찰하겠지만 잘못이다. 또 다른 형식은 이렇다.

어떤 어류(魚類)도 이성적이 아니다. 모든 상어는 어류이다. 그러므로 어떤 상어도 이성적이 아니다. 이 형식을 '켈라런트(Calarent)'라고 부른다.

모든 사람은 이성적이다. 약간의 동물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약간의 동물은 이성적이다.이 형식을 '다리이 (Darii)'라고 부른다.

어떤 그리스 사람도 검지 않다. 약간의 사람은 그리스 사람이다. 그러므로 약간의 사람은 검지 않다. 이 형식을 '페리오(Ferio)'라고 부른다.*(여기서 'Barbara, Celarent, Darii, Ferio' 등은 무슨 의미를 가진 단어가 아니라, 순전히 작위적인 것이다. 가령, 거기서 모음을 각각 따 보면 'AAA, EAE, AII, EIO' 등의 각 형식을 나타낸다.)

이 네 가지 형식이 '1(first figure)'을 이루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외에 제 2 격과 제 3 격을 첨부했다. 스콜라 철학자들은 제 4 격을 더 첨부했다. 1 격 이외의 각 격()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제 1 격으로 변격(變格)할 수가 있다는 것을 보이고 있다.

단일한 전제로부터 할 수 있는 추리도 있다. 가령, "약간의 사람은 가사적(可死的)이다."로부터, 우리는 "약간의 가사적 존재는 사람이다."를 추리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이 결론은 "모든 사람은 가사적이다."로부터도 추리할 수 있다. "어떤 신도 가사적이 아니다."롤부터 우리는 "어떤 가사적 존재도 신이 아니다."를 추리할 수 있으나, "약간의 사람은 그리스 사람이 아니다."로부터 "약간의 그리스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상술한 바와 같은 추리를 도외시하고서,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후계자들은 모든 연역적 추리(deductive inference)가 그것을 엄밀히 표현할 때는 삼단논법적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종류의 참된 삼단논법을 사용하며, 또 삼단논법의 각 형식에 포함되는 모든 추리를 분명히 할 때는 모든 오류를 피할 수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 체계가 형식논리학(形式論理學)의 시초였다. 그리고 형식논리학의 시초로서는 중요하기도 하고 경탄할 만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이 논리학의 시초로서가 아니라 결말로 생각할 때는, 다음의 몇 가지가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1) 이 체계 자체 속에 내포되어 있는 형식적 결함
(2) 여러 다른 형식의 연역적 추론에 비할 때 삼단논법에 대한 과대평가
(3) 논리형식으로서 연역에 대한 과대평가

 

(1) 형식적 제 결함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모든 그리스 사람은 사람이다." 이 두 진술을 비교함으로써 시작해 보자. 이 두 가지 진술은 예리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서는 이 구별을 하지 않는다. "모든 그리스 사람은 사람이다."라는 진술은 보통 그 속에 이미 그리스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 뜻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 가운데 어떤 것은 참되지 못한 결과가 될 것이다.

예를 들면, "모든 그리스 사람들은 사람이다. 모든 그리스 사람들은 백인종이다. 그러므로 약간의 사람은 백인종이다." 이것은 그리스 사람들이 존재해야만 참되고, 그렇지 않다면 참되지 못할 것이다. 가령, 내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하자.

"모든 금()으로 된 산은 산이다. 모든 금으로 된 산은 금이다. 그러므로 약간의 산은 금이다." 이 결론은 참되지 못하다. 그러나 여기서 전제들은 어떤 의미에서 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용을 분명히 표현하려면, 우리는 "모든 그리스 사람은 사람이다."라는 진술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표현해야 할 것이다. , 첫째로 "그리스 사람은 존재한다."와 다음으로 "만일 어떤 존재물(存在物)이 그리스 사람이라면 그것은 사람이다."의 두 부분인 것이다. 그리고 이 둘째 부분은 순전히 가언적(假言的)이며, 그리스 사람이 존재한다는 뜻은 그 속에 전연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리하여 "모든 그리스 사람은 사람이다." 라는 진술은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라는 진술보다 그 형식에 있어 훨씬 더 복잡하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는 소크라테스가 이 문장의 주어로 되어 있는데, "모든 그리스 사람은 사람이다."는 그 주어가 될 '모든 그리스 사람'을 실제로 가지지 못한다. "그리스 사람은 존재한다."라는 진술에도, "어떤 존재물이 그리스 사람이라면 그것은 사람이다."라는 진술에도, '모든 그리스 사람'에 대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순전히 형식적인 과오가 형이상학과 지식론의 여러 가지 과오의 근원이 되고 있다. 가령,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모든 사람은 죽는다."의 두 명제에 대한 우리들의 지식이 어떤가를 생각해 보자.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라는 진술이 참된 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 대부분은 증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만일 그 증언이 신뢰할 만한 것이 되려면, 소크라테스를 알고 있었고, 또 그가 죽은 것을 본 사람에게로 우리를 이끌고 가야 한다. 소크라테스의 사체(死體)를 지각한 사실과 또 그 사체가 과거에는 '소크라테스'라고 불려졌다는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소크라테스의 가사성(可死性)에 대해 확신케 하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모든 사람은 죽는다."의 경우가 되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러한 일반적 명제에 관한 우리들의 지식의 문제는 풀기에 용이한 것이 아니다. 때로는 그런 명제는 다만 언어상(言語上)의 것에 불과하다. 가령, "모든 그리스 사람은 사람이다."와 같은 명제는, 사람이 아니면 '그리스 사람'이라고 부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알 수 있는 명제이다. 그런 일반명제는 사전을 찾아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명제는 실제로 세계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 주는 것이 없고, 다만 그런 말은 어떻게 사용되는가 하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죽는다."와 같은 명제의 경우는 종류가 다르다. , 죽지 않는 사람에 대한 논리적 모순은 하나도 포함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명제는 귀납(歸納, induction)에 의해 믿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세상에 150세 이상 산 사람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 준 예는 없다. 그러나 살고 있는 사람이 아직도 존재하는 한 단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서 형이상학적 오류는, "모든 사람은 죽는다."에서 '모든 사람'이 주어가 되는 것이, "소크라테스는 죽는다."에서 '소크라테스'가 주어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 데서 일어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사람''소크라테스'가 어떤 존재물을 나타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존재물을 나타내고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종(, species)도 어떤 의미에서 실체라고 말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진술을 다른 것과 주의하여 구별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들은, 특히 포르피리오스(Porphyry)는 이 점을 주의하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마찬가지 과오로 실패하게 된 또 한 가지 오류는, 어떤 술어의 술어(a predicate of a predicate)도 또한 그 처음 술어의 주어(the original subject)의 술어가 된다는 것이다. 만일 내가 "소크라테스는 그리스 사람이다. 모든 그리스 사람은 인간이다."라고 말할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생각하기를 '인간''그리스 사람'의 술어이며, '그리스 사람''소크라테스'의 술어이므로, 분명히 '인간''소크라테스'의 술어가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사실은 '인간''그리스 사람'의 술어는 아닌 것이다. 이름(name)과 술어(predicate)의 차이는, 즉 형이상학적 용어로 말하면 특수개념과 보편개념의 차이는 이와 같이 되어 애매해져 버린다. 그 결과는 철학적으로 볼 때 아주 나쁜 결과이다. 이와 같은 결과에서 일어난 혼란 가운데 하나는, 한 개의 구성요소를 가지는 하나의 유(, class)를 그 한 개의 구성요소와 동일시하는 혼란이다. 이 때문에 하나라는 수에 대해 올바른 설을 세울 수가 없었으며, 이로부터 통일성(unity)에 관한 개념이 끝없는 형이상학적 미궁으로 빠져들었던 것이다.

 

(2) 삼단논법에 대한 과대평가

삼단논법은 다만 연역적 논증(deductive argument)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수학은 그 전체가 연역적임에도 불구하고 삼단논법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수학적 논증을 삼단논법의 형식으로 고쳐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대단히 기술을 요하는 일이며, 또 그렇다고 해서 더 알기 쉬워지는 것도 아니다. 산술을 예로 들어 보건대, 4.63달러에 해당하는 물곤을 샀다고 하자. 그리고 5달러 지폐를 지불했다고 하면, 얼마의 거스름돈을 받게 될 것인가? 이 간단한 계산을 삼단논법으로 고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며, 또 이 문제의 참다운 성질을 잊어버릴 가능성이 있다. , 논리학 자체 내에서도 삼단논법이 아닌 추리도 있는 것이다. 가령, "말은 한 동물이다. 그러므로 말의 머리는 동물의 머리다."와 같은 추리다. 사실은 참된 삼단논법은 참된 연역(演繹)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며, 다른 연역법들에 대해서 하등의 논리적 우위를 차지하지 못한다. 연역에서 삼단논법에 우선권을 주려는 태도가 철학자들로 하여금 수학적 추리의 성격에 관해 오인하게 만들었다. 수학이 삼단논법으로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칸트는, 수학은 특수한 논리적 원칙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원칙도 논리학의 원칙과 마찬가지로 확실한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결국 그 성격은 달리하지만, 칸트도 그의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과오를 범하게 되었던 것이다.

 

(3) 연역에 대한 과대평가

그리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현대 철학자들보다 연역(演繹)에 대해 지식의 근원으로서 중요성을 더 많이 두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보다 과오를 덜 범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반복하여 귀납(歸納)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고, 또 그는 다음 문제에 대해서 상당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 우리는 연역의 출발점이 될 그 제일 첫째 전제(first premiss)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른 그리스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연역에 대해서 부당한 과대평가를 하였다. 가령, 우리가 스미스 씨는 죽는다고 생각했다고 하자. 그 때, 우리는 대체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우리가 스미스 씨가 죽는다는 것을 아는 것은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아니고, "150년 이전에 태어난 사람은 다 죽었다. 그리고 100년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도 모두 마찬가지이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스미스 씨는 죽을 것이라고 우리가 생각한 이유이다. 그러나 이 논의는 귀납이고, 연역이 아니다. 귀납은 연역보다 확신은 덜 간다. 그리고 다만 개연성(蓋然性)을 가질 뿐이어서, 확실성을 가진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한편 귀납은 새로운 지식을 줄 수 있다. 연역은 이런 일을 하지 못한다. 논리학과 순수수학을 제외하고 모든 중요한 추리는 전부가 귀납적이며, 연역적은 아니다. 다만 예외는 법률과 신학이다. 이것들은 어느 것이나 그 첫째 원칙을 의심의 여지 없는 원본으로부터 끌어낸다. , 법령전서(法令全書)라든지 성경에서 끌어내는 것이다.

삼단논법을 다루고 있는 분석론 전서(分析論前書, The Prior Analytics)이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 가운데는 철학사에 상당히 중요한 것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비교적 짧은 것으로 범주론(The Categories)이 있다. 신플라톤주의자 포르피리오스가 이 책에 대한 주석서(註釋書)를 썼는데, 그 책은 중세기 철학에 상당히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는 포르피리오스는 그냥 지나치고, 다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만 국한해서 언급하기로 하자.

'범주(範疇, category)'라고 할 때, 아리스토텔레스나 칸트나 헤겔에 있어,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나는 이제까지 한 번도 이해해 본 일이 없다는 것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로서는 이 '범주'라는 용어가 철학에서 필요한 말이라고는 믿고 있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는 10개의 카테고리가 있다.

실체(substance), (quantity), (quality), 관계(relation), 장소(place), 시간(time), 위치(position), 상태(state), 능동(action), 수동(affection) 이다.

'카테고리'라는 용어에 대한 정의가 단 한 곳에 있는데, 그것은 '그 대용이 결코 중복되는 일이 없는 그런 표현'이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위에 열거한 것이 곧 이어서 열거되어 있다. 이 뜻은 이런 것 같다. 한 단자(單子)의 뜻이 다른 단자의 뜻과 결코 중첩되지 않는 각 단어는 실체를 의미하든지, 또는 양을 의미하든지 등등인 것 같다. 10개의 카테고리가 어떤 원칙에서 나온 것인가 하는 데 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다.

'실체'는 제 1 차적으로 주사(主辭, subject)의 빈사(賓辭, predicable)가 아닌 것, 또 주사 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여기서 "주사 속에 존재한다(present in a subject)."란 말은 다음의 설명에도 나타나는 바와 같이,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면 '형용사'가 된다는 의미이다. 그것을 존재론적으로 말하여 "주사 속에 존재한다."고 한 것이다.) 어떤 사물이 "주사 속에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그 사물이 그 주사의 일부분도 아니면서 주사 없이는 존재하지 못할 때 하는 말이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다. 문법지식의 일편은 마음 속에 존재하며, 또 어떤 백색(白色)은 몸 속에 존재한다. 위에 말한 제 1 차적 의미에 있어서 실체는 어떤 개개의 사물이나 개인, 또는 한 마리의 동물일 것이다. 그런데 제 2 차적인 의미에 있어서, 종(種, species)이나 유(類, genus)예컨대, '사람' 또는 '동물'도 또한 실체라고 불릴 수가 있다. 그런데 이 제 2차적 의미란 것은 변호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동시에, 그것으로 인해 후세 철학자들이 많은 좋지 못한 형이상학으로 빠져들어갈 문호가 열린 셈이다.

『분석론 후서(分析論後書, The Posterior Analytics)』는 대체로 연역론에 있어서 언제나 문제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문제삼고 있다. , 우리는 어떻게 하여 첫째 전개를 얻게 되는가의 문제이다. 대개 연역은 어떤 출발점을 가져야 하므로, 우리는 결국 증명되지 않은 어떤 것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이것은 증명 이외의 다른 어떤 방법으로 알아야만 한다. 나는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을 상세히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의 학설은 본질이란 개념 위에 서 있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정의(定義)는 사물의 본질적 성질에 관한 진술이라고 한다. 본질(essence)의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모든 철학의 본질적인 부분이 되어 왔다. 내 의견으로는, 그 개념은 아주 절망적으로 혼란에 빠진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역사적 중요성 때문에 우리는 이에 관해 몇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사물의 '본질'이라는 것은, '그 사물에 있어서 그 성질이 없이는 그 사물의 동일성을 유지할 수가 없는 그런 성질'을 의미하는 것 같다. 소크라테스는 때로는 행복할 것이며, 때로는 슬플 것이며, 때로는 건강하며, 때로는 병든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특성들은 그의 본질의 일부분이 아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사람이라는 그런 특성은 소크라테스의 본질에 속한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피타고라스 학파에서는 윤회설을 믿고 있으므로 이것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은 '본질'에 관한 문제는 단어와 사용 문제에 불과하다. 우리는 때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달라지는 사건들에게 동일한 이름을 붙이는데, 그것은 우리가 그 상이한 사건들이 다 한 개의 단일한 '사물' 또는 '인격(人格)'에서 나온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에 있어서는 이것은 다만 언어상의 편의에 불과하다.*(, 그와 같이 여러 상이한 사건들에게 공통된 이름을 주는 것이 언어상 편리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사실에 있어서 실재하는 것은 그 상이한 사건들뿐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의 '본질', 그것이 없다면 우리가 '소크라테스'라고 부를 수 없는 그런 성질들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문제는 순전히 언어상의 문제이다. 왜냐 하면, 한 낱말은 본질을 가질 수가 있을 것이나, 한 사물은 본질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왜냐 하면, 본질이란 것은 역시 여러 사건들에게 공통된 이름에 대해서 그 이름이 파괴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의 성질을 의미하며, 또 그 개개의 사건들이야말로 참다운 사물인데, 그것들은 본질을 가질 수 없다.)

'실체'의 개념도 '본질'의 개념과 같이 다만 언어상의 편의에 불과한 것을 형이상학적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 우리는 세계를 기술(記述)함에 있어서, 일정한 수()의 사건들을 '소크라테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의 생애에 일어난 사건들로서 기술하고, 또다른 일련의 사건들은 '스미스' 에게 일어난 사건들로서 기술하는 것이 편리한 것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스미스'를 일정수(一定數)의 연()을 통해 존속해 온 사물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며, 그리고 그것들은 그들에게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들보다 더 '확고(solid)'하고, 또 더 '실재성을 가진(real)'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병들었다고 할 때도 그가 다른 때는 건강하다고 생각하므로,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존재는 그 병으로부터 독립적인 것으로 본다. 그런데 병으로 말하면, 병에 걸릴 다른 어떤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병에 걸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존재할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일(something)이든지 그에게 일어나고 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사실상 그에게 일어나는 사건들보다 더 '확고'하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실체'라는 개념은 심각하게 다루면 존란을 면키 어려운 한 개념이다. 실체는 여러 특성들의 주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 특성들과도 구별되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 이 특성들을 다 버리고 실체 그 자체를 생각하려 할 때, 거기에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문제를 다른 방향으로 고찰해 보면, 즉 한 실체와 다른 실체를 구별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실체의 논리에 의하면, 그것은 특성의 차이가 아니다. 특성의 차이가 문제되기 전에 수()의 다양성이 예상(presuppose)되어 있다. 그렇다면 두 개의 실체는 그들 자체에 있어서 어떤 구별점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둘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들이 둘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될 것인가?

'실체'는 사실상 사건들을 한 묶음으로 모으는 한 가지 편리한 방법에 불과하다. 우리가 스미스 씨에 관해 아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그를 볼 때 한 모습의 빛깔들을 본다. 우리가 그에게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일련의 소리를 듣는다. 우리는 그도 우리와 같이 느낌과 생각을 가지리라고 믿는다. 이 모든 사건들을 떠나서 스미스 씨가 무엇일까? 다만 여러 사건들이 걸려 있는 한 개의 상상적인 갈고리인가. 이 사건들은 사실상 갈고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땅이 그 위에 놓일 코끼리를 필요로 하지 않음과 같다. 우리는 지리학의 지명에 관해 유사한 경우를 본다. 가령, '프랑스'란 말을 생각해 볼 때, 그것은 한 개의 언어상의 편의에 불과하다. '프랑스'란 사물은 어디에도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여러 부분이 있을 뿐이다. '스미스' 씨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집합명사에 불과하다. 우리가 그것을 그 이외의 어떤 것이라고 보려 할 때 그것은 완전히 불가지(不可知)의 어떤 것이 되어 버리고, 따라서 우리가 아는 것으로 표현할 필요도 없는 어떤 것이 되어 버린다.

'실체'는 한 마디로 말하면 형이상학적 오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오류는 주어와 술어로 구성되는 문장상의 구조를 세계의 구조로 전환시키는 데서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장에서 다루어 온 논리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은 전체적으로 틀린 것이라고 결론내리고자 한다. 삼단논법의 형식에 관한 학설은 틀린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중요성은 가지지 못할 것이다. 오늘에 있어서 논리학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나, 또는 그의 학도들의 저서를 읽는 것은 시간낭비밖에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작물들은 큰 능력을 나타내고 있으며, 만일 이 작품들이 지적 독창력이 아직도 충분하게 살아 있을 때 나왔더라면 인류에게 크게 유용한 것이 될 뻔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작품들이 나온 것은 그리스 사상의 창조기가 다 지나갈 무렵이었다. 논리적 창조력이 다시 살아나기까지는 2000년 동안을 기다려야 했고, 2000년 동안 통치해 온 아리스토텔레스를 그 왕위(王位)로부터 끌어내리는 일은 대단히 어렵게 되어 버렸다. 현대 전반을 통해, 과학·논리·철학 등에 있어 실용적인 모든 부문의 진보는 아리스토텔레스 학도들의 정면 반대에 부딪치면서 이루어져 왔던 것이다.

[출처] 22 장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작성자 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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