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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03 사람인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이북 소개)

by 엉클창 2020. 1. 27.

염려의 완전성이란?

Image: thebluediamondgallery.com (stock photo)

사람인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논의는 백합에서 새로 이동한다. 새의 수업은 백합의 가르침과는 다르다. 그는 새가 생계에 대한 염려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며 시작한다. 새는 "순간에만 살기" 때문이다. 게다가, 새는 영원에 대한 의식도 없고 시간에 대한 의식도 없다. 하지만 사람은 시간과 영원에 대한 의식이 있다. 이런 점에서 사람은 오직 미래에 대한 의식으로만 생계 making a living, Næringssorg에 대해 염려한다.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은 많은 방식에서 서로 고통스럽게 접촉한다.1) 그러나 특별히 고통스러운 접촉 중의 하나가 생계에 대한 염려이다.(본문 중에)

하지만 키르케고르는 여기에서 책망을 강조하지 않는다. 복음의 책망은 생계에 대한 염려보다는 백합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복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마6:30-31)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는 이 가벼운 책망은 아마도 새보다는 백합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외모와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주님이 백합과 직접적으로 관련하여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말했을지라도, 바로 다음에 이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나온다. 

따라서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는 복음의 책망은 외모에 대한 염려만큼 생계에 대한 염려에도 적용된다 볼 수 있다. 하지만 키르케고르는 생계에 대해 염려할 수 있는 능력은 사람에게 영원에 대한 의식이 있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생계에 대해 염려할 수 있는 능력이 완전성이고 사람의 고귀성에 대한 은폐된 표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높이 올리신 만큼, 또한 그만큼 낮게 억누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깊이 억눌리게 되는 것은 또한 높이 올라가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 중에)

따라서 염려하는 자는 새를 통해 염려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배운다. 이런 염려의 아름다운 능력은 예배와 함께 역설적 특징을 공유한다. 사람이 "예배함으로써 무nothing by worshiping"가 될 때에만 하나님을 가장 많이 닮는 것처럼, 사람의 "고귀함loftiness"은 염려할 수 있는 능력과 어울리는 "억눌림suppression"의해 가장 잘 표현된다. 

하나님은 의식 속에 있는 영원의 도움으로 새보다도 더 높이 사람을 올리셨다. 그때 말하자면,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는 새가 알지 못하는 걱정, 비천하고 지상적인 걱정에 대한 지식으로 인해 새보다도 더 아래로 그를 억누르신 것이다. 오, 새가 생계에 대한 염려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고상한가! 그러나 그런 염려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더욱 아름다운가!(본문 중에)

결국 염려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의 완전성에 대한 역설적 표현이다.

 

 

 

1)8, 171,35 Grændsen, hvor Timelighed og Evighed berøre hinanden] dvs. i 'øjeblikket', jf. hvad Johannes Climacus skriver i kap. 1, B, b, i Philosophiske Smuler (1844): »Og nu Øieblikket. Et saadan Øieblik er af en egen Natur. Det er vel [givetvis] kort og timeligt som Øieblikket er det, forbigaaende som Øieblikket er det, forbigangent, som Øieblikket er det, i det næste Øieblik, og dog er det Afgjørende, og dog er det fyldt af det Evige. Et saadant Øieblik maa dog have et særligt Navn, lad os kalde det: Tidens Fylde [Gal 4,4 om tiden for Jesu fødsel]«, SKS 4, 226,28-32. Jf. også hvad Vigilius Haufniensis skriver i kap. 3 i Begrebet Angest, at »Øieblikket er hiint Tvetydige, hvor Tiden og Evigheden berøre hinanden«, SKS 4, 392,17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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