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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02 사람인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이북 소개)

by 엉클창 2020. 1. 26.

백합의 외모에 대한 논의 중에서 실제로 지배적인 다른 주제가 있다. 그것은 믿음이다. 그러나 이 믿음은 키르케고르가 주로 이야기했던 체념resignation이나 역설parodox(종교성 A와 B에서처럼)로서의 믿음이 아니다. 여기에서 제시하는 믿음은 하나님을 창조자로, 공급자로 믿는 믿음이다. 이 주제는 다음과 같이 복음이 말한 "부드러운 책망"으로 시작된다.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너희를 더욱 입히시지 않겠는가?(마6:30)

이 책망을 통해 염려하는 자는 키르케고르가 말한 "첫 번째 생각," 곧 사람인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상기하게 된다. 사람은 세상에서 지배자가 되고 싶어한다. 혹은 어떤 분야에서 "신동prodigy"이 되기를 바란다.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이런 생각은 비교의 산물이다. 염려하는 자가 이런 생각에 빠질 때, 저 첫 번째 생각을 좋아하기보다 비교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염려하는 자가 자신의 옷과 다른 사람의 옷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백합과 비교할 때, 우리에게 옷을 공급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할 때, 적합한 인간적인 옷을 공급하셨다. 이 "첫 번째" 생각은 창세기 1:26절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것은 이미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담은 것처럼 보인다. 곧, 사람은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일에 더 관심이 많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

키르케고르에게, 정복하고 다스리는 창세기의 명령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거의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의 정복사상인, 제국주의는 이 창세기의 구절에서 비롯된다.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제국주의라는 미명 아래에 얼마나 많은 악행을 저질렀는가! 창세기 1장 28절이 얼마나 많이 증거본문으로 활용되었는가. 

토머스 하이네,『식민지를 지배하는 방식』, 『심플리치시무스』, 1904년

 위의 그림은 독일 화가 토머스 하이네Thomas T. Heine가 잡지 『심플리치시무스Simplicissimus』에 실은 작품이다. ‘식민지를 지배하는 방식’이라는 제목이 달린 이 그림에서 영국의 상인과 군인과 성직자는 각자의 역할을 통해 아프리카인을 쥐어짠다. 그 과정에서 아프리카인의 입에 들어간 럼주는 금화로 재탄생한다. 지구상의 낯선 지역에 무역망을 만들고 무력으로 지배하고 개종을 시키는 모든 작업의 궁극적인 목적은 경제적 이익의 획득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 화가는 식민주의 자체에 대해 부정적이었을까? 아니면 식민지쟁탈전에서 뒤쳐졌던 독일을 대표해서 영국식 식민주의를 비판하고 독일식은 더 낫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심플리치시무스』가 현실비판에 치중한 잡지였고 한때 황제 빌헬름 2세로부터 논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탄압을 받기도 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아마도 화가는 국가를 막론하고 제국주의 정책 자체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가졌던 것 같다.1)

사람은 정복하고 다스리는 일에만 관심이 많았지 저 첫 번째 생각,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닮았는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했다는 저 핵심적인 구절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관심을 갖는이가 없다. 이것은 비극적으로 기독교의 타락을 가져왔다. 정복자의 영광이 무엇이 중요한가. 이런 타락의 온상인 정복자의 영광은 이 강화에서 무참히 박살난다. 그러니 다시 창세기 1장 26절의 이 핵심이 되는 말씀을 상기해보자.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정복자의 영광에 대한 최고의 상징은 바로 솔로몬이다. 성서의 솔로몬은 정복자의 영광, 정복자의 아름다움 그 자체다. 솔로몬이 입은 정복자의 옷을 상상해보라. 얼마나 값비싼 금은보화로 장식했을까. 하지만 복음에 의하면 백합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백합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하나님을 닮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닮은 사람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따라서 사람의 영광이란, 사람의 아름다움이란 하나님을 닮았다는 데에 있다. 하지만 이 아름다움은 백합에는 없다. 게다가,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따라서 사람과 하나님이 닮았다면, 그것은 영적인 것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이다. 이에 반해 백합의 영광은 눈에 보이는 영광이고,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이 아름다움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본연의 아름다움을 되찾을 수 있을까? 백합의 옷이란 존재 자체다. 다시 말해, 백합이 된다는 것은 그 옷 자체가 되는 것이다. 이와 똑같다. 솔로몬의 옷이란 지배자의 영광이다. 곧,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기 위해서는 지배자의 영광을 버려야 한다. 겉보기에 화려한 영광은 마치 백합이 눈에 보이는 영광인 것처럼, 지배자의 영광은 눈에 보이는 영광이다. 이 영광을 포기할 때만 영이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닮는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할 때 영적인 것이고, 영적인 "옷"이란, 존재 자체다. 

키르케고르가 이런 닮음, 이런 본받음을 위해, 사람인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백합을 통해 배우기 위해 추천하는 것이 예배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은 직립보행을 한다는 점이다. 저, 들에서 오직 직립보행을 하는 자는 인간 밖에 없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연의 지배자요, 정복자다. 마치 솔로몬이 정복자의 상징인 것처럼, 인간은 자연에서 지배자요, 정복자다. 이 지배자가 "역으로inverse"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을 때에만 더욱 하나님을 닮는다. 

사람이 마치 하나님인 양, 지배자로 있을 때에는 오히려 하나님을 닮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 이방인은 지배하는 데에서 하나님과 닮은 점을 찾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배에서는 닮은 점을 찾을 수가 없다. 그것은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다.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이 지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과 하나님은 서로 직접적으로 닮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닮는다.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무한히 영원하고 편재하신omnipresent 예배의 대상이 되시고 인간은 언제나 예배자가 되었을 때에만, 오직 그 때에만 그들은 서로를 닮는다. 사람이 지배함으로써 하나님을 닮기 원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잊어버린다. 그때 하나님은 떠나시고, 하나님이 부재하는 곳에서 그들은 지배자로 등극한다. 
이것이 이교도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부재한 곳에서의 인간의 삶이다. 이것이 이교도가 여전히 자연처럼 존재하는 이유이다. 이교도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가장 통탄스러운 것은 이교도는 예배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심지어 저 고상하고, 소박한 현자였던 그도 놀라움 가운데 침묵할 수는 있었어도, 그가 예배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멋있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의 아름다움에 놀란다. 여행을 갈 때, 가능하면 그런 아름다운 장소를 찾기 마련이다. 그때, 무엇을 하는가?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주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에 대해 감탄한다. 그때 자연에 대해 감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자연을 지으신 하나님에 대해 감탄한다. 하지만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이것은 예배가 아니다. 이것은 이교도이다. 이교도는 자연에 대해 감탄하듯, 하나님께 감탄하는 법을 가르친다. 

이 지점은 오늘날 한국 교회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하심에 찬양하는 것이 예배인가? 크고 놀라운 주님의 은혜에 대해 찬양하며 경배하는 것이 예배인가? 하지만 이런 감탄, 이런 찬양은 눈에 보이는 하나님, 눈에 보이는 영광에 대한 놀라움은 아닌가? 하지만 예배란 하나님의 형상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영광이다. 예배란 예배하는 자를 입히신 것이 하나님의 형상이고, 이 형상의 비가시적 영광이란 말이다. 

키르케고르는 백합의 직접적 영광, 이방인의 직접적 영광과 예배하는 자의 역전된 영광과의 차이를 간략하게 설명한다. 

백합화처럼 옷 입혀지는 것은 아름답다. 똑바로 선 지배자가 되는 것은 얼마나 훨씬 더욱 아름다운가! 그러나 예배함으로써 무nothing가 되는 것은 얼마나 가장 아름다운가!

 

 

1) 중앙일보 신문 인용, https://news.joins.com/article/18979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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