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리 이 강화의 원 제목은 <사람인 것에 얼마나 복된 행복이 약속되어 있는지>이다. 이 강화는 시작할 때, 염려하는 자가 위로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이런 저항에서 더 강자가 된다. 위로하는 자는 그를 설득할 수 없고, 위로하려 할수록 그의 마음 문은 더욱 굳게 닫힌다. 따라서 이 강화는 염려하는 자를 다른 사람의 고통에 참여할 수 있도록 방향을 바꾼다.
이런 일이 발생하면, 싸움은 망각되고 요새화된 도시 같았던 사람은 이제 항복한 도시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하지만 더 "다른 누군가"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라는 것이 밝혀진다. 염려하는 자는 들의 백합이 결국 내일은 "아궁이에 던져진다"는 생각에 더욱 슬퍼진다. 복음에 등장하는 새는 마태복음 10장 29절에 등장하는 참새처럼 시장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거나 거의 가치 없는 가격에 팔려 죽고 만다는 생각에 슬퍼진다. 자연에는 아름다움이 있다. 다양한 아름다움이 존재하는 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 만물은 결국 그 속에서 죽고 만다.
하지만 염려하는 자는 슬픔에 굴복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절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안내를 받는다. 곧, 사람인 것에 얼마나 복된 행복이 약속되어 있는지 생각한다. 이런 성찰은 마태복음 6장 24절로 시작한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키르케고르는 이 말씀이 얼마나 "엄격한" 것인지 말한다. 엄격한 말은 받아 들이는 자가 얼마나 반응할 수 있는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치명적인 병에 걸려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환자에게 의사는 엄격한 말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의사는 진실을 말하기를 주저한다. 하지만 환자가 살 수 있는 경우, 의사는 어떻게 말하는가? 아주 엄격하게 말한다. 살 수 있는 방법을 아주 엄격하게 제안한다.
키르케고르는 복음이 엄격하게 말할 때, 그것은 일반적인 엄격함과는 달리, 영원의 진지함earnestness of eternity으로 말한다는 것이다. 그때 복음이 요구하는 것은 반응이다. 자연과 달리, 인간은 애매모호하게 행동할 수 있다. 한 번에 두 주인을 섬길 수 있다. 하나님도 섬기고 세상도 섬길 수 있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 이것이 그럴 수 있느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설명대로 말하자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세상을 미워하는 것이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는 복음의 엄격함을 더욱 깊이 있게 다룬다. 아주 치밀하게 복음의 엄격함을 분석한다. 곧, 이미 말했던 것처럼 사람에게 두 개의 증오와 두 개의 사랑 사이에서 싸움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세상 혹은 "맘몬(재물)"이 어마어마하게 크든 단돈 1원으로 작든, 그것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싸움은 동일하다. 염려하는 자는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가"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세 번째 강화의 핵심적인 부분에 이른다.
이제 끔찍한 싸움에서 슬픔은 망각된다. 그때 우리는 아름다운 것에 도착한다. 즉, 사람에게 선택이 허락되었다는 것. 이로 인하여 올바르게 선택한 사람에게 얼마나 복된 행복이 약속되어 있는가. (본문 중에)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선택에서 키르케고르가 강조하고 있는 지점이 있다. 먼저 중요한 점은 반응이다. 사람은 자신의 윤리적 결단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반응을 보인다. 하나님은 영원히 강자이시다. 그런 분이 나약한 사람에게 제안하신다. 이런 선택에 대한 몇 가지 변증법적인 통찰력이 있다. 이는 초대에 대한 반응이므로, 선택을 거부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해 키르케고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택. 이것은 진실로 아름다운 보물이다. 그러나 이 보물은 파묻히거나 숨겨질 운명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용하지 않은 선택은 무nothing보다 더 나쁘니까. 사용하지 않은 선택은 사람이 선택하는 데에 자유롭지 못했던 노예처럼 자기 자신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덫이다. 선택은 당신이 결코 제거할 수 없는 행복a good이다. 선택은 당신과 함께 머문다. 만약 당신이 선택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저주와 같다.
하지만 그에 따르면, 선택하지 않는 것은 결국 세상을 선택하는 신성모독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명확히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선택, 이것은 윤리적 명령이 아니라 종교적 명령이다. 왜냐하면 이 선택은 하나님의 제안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이 선택에 중요한 기독론적인 차원이 존재한다. 이 선택은 하나님이 스스로를 선택될 수 있는 존재로 낮추실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빌립보서 2장의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비하konosis를 암시하고 있다. 하나님이 스스로를 낮추셨기 때문에 인간의 선택의 대상이 되신 것이다.
하나님은 지켜보기 위해 현존하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 선택당하기 위해 현존하고 계셨던 것이다.
하나님이 단지 지켜보는 자였다면,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 의해 선택을 개시하는 윤리적 대리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제안하는 분으로 현존하신다. 그분은 인간을 초대하여 하나님과 세상 둘 중에 선택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현존만이 이 종교적 선택을 창조하신다. 이 선택은 일반적인 일생생활에서의 선택이 아니다. 이 선택은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의 선택이다. 이것은 키르케고르가 "하나님이 선택의 대상으로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선택이 파기되었다면, 그때 재물은 어떤 선택도 아니다."라고 말했던 이유다. 대안이 없었다면 재물은 선택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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