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소개

들의 백합 공중의 새(해제2)

by 엉클창 2020. 2. 16.

산상수훈은 믿음의 행위를 하기에는 주눅들게 하는 요구조건을 제시한다. 율법은 살인자를 심판하지만, 복음은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마5:22-23) 곧, 복음의 잣대에 의하면, 형제를 미워한 자는 이미 살인자다. 율법은 간음하지 말라고 말하지만, 복음의 잣대에 의하면 마음에 음욕을 품은 자는 이미 간음한 자다.(마5:28) 율법의 요구조건보다 복음의 요구조건이 더 엄밀하다. 인간 중에 누가 이런 잣대로 이 요구조건을 다 지킬 수 있는가!

주님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 오셨다고 말씀하신다.(마5:17) 누구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마5:18) 한 마디로, 복음은 율법의 요구조건보다 더 힘들고 고통스럽다. 그런데 어떻게 이것이 좋은 소식인가! 게다가, 복음은 마지막으로 권면한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완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마5:48)

이 길은 좁다.(마7:14) 누구도 이 길을 쉽게 갈 수 없다. 더 정확히 말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 산상수훈의 명령을 액면 그대로 실행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불가능한 윤리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은 5장, 6장과 7장에 나와 있다. 마태복음 5장 끝 절인 위의 구절을 보면, 그리스도인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완전성을 본받아야 할 것처럼 보인다. 이런 점에서 6장 중반부부터는 조금 이상하고 역설적인 면서도 도저히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다. 

산상수훈의 전체 어조는 심각하고 때로는 책망하는 듯 보인다. 믿는 자들의 삶에 놓여 있는 어마어마한 요구조건들이 제시된다. 하지만 갑자기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가 등장한다. 하나님 아버지의 완전성을 본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저 말도 안 되는 새와 백합을 본받아야 한다니! 마치 농담처럼 들린다. 

도대체 복음은 갑자기 겉보기에 저런 비천한 존재들을 언급하는 것일까?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위한 것일까? 이번에는 이런 물음에 대답해야 한다. 

키르케고르는 복음이 새와 백합을 선생으로 제시하는 것이 “익살맞은 것(humorous)”으로 생각한다. 이 모범은 질적 차이가 있어, 인간의 책임과 “역으로” 관계한다. 그는 염려가 무엇인지 그 본질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익살맞은 본문 자체가 염려의 긴급성을 강조한다.

독자들은 여기에서 “역으로” 관계한다는 말이 무엇인지 명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곧, 사람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하나님을 닮은 방향으로 완전해질 수 없다는 뜻이다. 인간은 긍정성의 방향으로 하나님의 완전성을 닮을 수가 없다. 오히려, 비천한 방향으로만, 새와 백합처럼 비천해지는 방향에서만, 부정성의 방향에서만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닮는다. 이에 대한 더 구체적인 서술이 이 강화의 두 번째 주제다. 

“들의 백합, 공중의 새를 보라.” 누가 이 말을 말하는가? 키르케고르는 무엇보다 모범이 이 말을 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1) 경솔한 자, 게으른 자, 혹은 구두쇠가 시적인 분위기에서 이 말을 했다면, 진지한 것이 아니라 그냥 노리갯감으로 말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을 하신 분이 모범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새와 백합의 모범은 마치 농담 같은 진지함이 있다는 것이다.

진지함이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를 소개함으로써 거의 농담처럼 부드러워졌다. 참새가 지금 교수가 된다 해도, 가장 심각한 과학 분야의 교수가 된다 해도, 내일은 이 참새가 겨우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고 구워지고 먹혀도(마10:29), 이것은 결코 웃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2) 수업이 있는 동안, 선생의 현존은 감히 아무도 웃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새와 백합이 등장했다고 해서 갑자기 산상수훈의 심각성이 제거되거나 사라진 것이 아니다.  키르케고르의 저서 <스스로 판단하라>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한 주인을 섬긴 유일한 모범이다. 누구도 한 주인을 섬긴 사람은 없다. 역사 속에서 한 주인을 섬긴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평생 동안 한 주인을 섬긴 것이 아니라, 결국 두 주인을 섬겼다는 것이다. 

한 주인을 섬기기 위한 모범이 되시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쉬울 리 없다. 뿐만 아니라 그 길을 살아야가야 할 제자의 삶도 얼마나 힘들지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한 주인만을 섬긴 것을 표현했던 그 사람, 그것으로 인해 생명을 대가로 지불할 것을 알고 있는 그 사람, 그때, 그 사람이 모든 것을 잊고, “나에 대해서 말고, 우리가 새와 백합에 대해 말해보자”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람은 어떨까? 조그만 일이라도 근심거리가 생기든가, 생각할 거리가 생기면 들의 백합이나 공중의 새와 같은 하찮은 존재들은 아무런 관심거리도 아니다. 하물며 세상에서 온갖 중요한 일을 위해 애쓰고 있는 사람이라면, 참새나 백합 같은 존재들은 안중에도 없다. 이런 존재들은 어린이들, 여자들, 빈둥거리는 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매 시간마다 영혼의 고통을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 사람이, 생명을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 사람이, 주일 오후나 휴일에 아무 할 일이 없는 사람처럼 말한다. 

“들의 백합을 보라, 공중의 새를 생각하라.” 

 

 

 

1) 쇠얀 키르케고르, <스스로 판단하라> 이창우 역, 149쪽

2) Ibid.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