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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사람인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해제3)

by 엉클창 2020. 2. 23.

첫 번째 강화는 우리가 새와 백합을 본받을 수 있도록 권면한다. 두 번째 강화는 우리가 그들의 불충분성을 믿음의 모범으로 유념하기를 촉구한다. 또한 하나님-사람을 우리의 "실제적" 모범으로 추천한다. 그렇다면 세 번째 강화는 새와 백합에 대해 우리에게 어떤 태도를 말하려 하는 것일까? 이상하게도, 새와 백합과 관련하여 세 번째 강화의 가장 강력한 진술은 복음의 요점이 완전히 다른 데에 있다고 제시한 곳에서 나온다. 

복음이 권위를 갖고 이야기할 때, 복음은 영원의 진지함earnestness of eternity으로 말한다. 그때 꿈꾸는 것처럼 백합에 대하여 생각할 틈이 없고 그리워하며 새를 따라갈 틈도 없다. 백합과 새에 대한 간결하고 교훈적인 언급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때 그것은 영원eternity이 진지하게 요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종교적 소향을 가진 청자를 향한 복음의 엄격한 수업은 새와 백합에 대한 그리스도의 언급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진지함의 영원한 요구"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완전히 맘몬(재물)을 포기함으로써 하나님을 선택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때, 복음이 새와 백합을 언급한 것이 어떻게 "교훈적인가?" 키르케고르는 설명한다.

사람이 일을 하고 길쌈을 한다 해도, 그가 일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 백합처럼 되었을 때만, 사람이 심기도 하고 거두기도 하고 창고에 모아들인다 해도,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는 새처럼 될 때에만, 오직 그때에만 그는 재물을 섬기지 않는다. 

다른 말로 말한다면, 우리가 새와 백합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해도(일하고, 계획하고, 보관해야 하는 방식에서), 복음은 우리에게 새와 백합을 본받으라고 지시할 때, 이는 우리가 믿음을 가짐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제거 불가능한 차이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해야 함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곧, 우리의 일과 계획과 저축에서의 차이다. 한 마디로, 우리의 노력의 투입investment이다. 

요약하자면, 믿음은 우리가 생존해야 할 우리의 필요를 받아들이도록 요구한다. 하지만 또한 우리가 이런 노동을 함에 있어 어떤 염려나 소망을 갖고 투입하지 않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의 염려와 소망이 이 땅의 문제들에서 안식을 얻지 못한다. 오직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문제에서만 안식한다. 믿음의 영원한 요구, 약속된 영원한 보상에서 안식한다. 이런 영원한 요구와 보상을 위해, 우리는 이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심지어는 우리의 생명도 차분하게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내리뜬 눈을 갖고 있는 슬픔은 자연이 쇠락으로 침몰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반면, 믿음의 눈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광을 구한다. 구원받은 노아가 세상의 파멸을 보았듯이, 또한 슬픔도 눈에 보이는 세계의 파멸을 본다. 반면에 구원받은 믿음은 영원한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 

우리는 자연의 전체 세계가 파멸되는 것을 볼 준비를 해야 한다. 복음이 언급한 아름다운 백합과 새도 포함되며, 우리의 삶도 여기에 포함된다. 하지만 홍수로 가득찬 아담의 세계에서 새로운 자연의 세계로 구원을 경험한 노아와는 달리, 우리는 자연의 세계에서 하나님 나라의 "영원하고도 보이지 않는 세계"로 구원되는 자기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엄격한 해석은 일반적은 복음의 약속과 충돌되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더하실 것이라고 약속하기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땅의 염려의 대상을 믿는 자에게 더한다는 것인가? 믿음이 재물의 완전한 거부를 요구한다면, 이것이 이 땅의 염려의 논리를 더욱 강화하는 한, 어떻게 "이 모든 것"의 약속이 청중에게 믿음에 이를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가? 따라서 믿음의 엄격한 요구에 대한 설명을 끝내기 위해, 키르케고르는 마지막 강화를 하나님의 일반적인 약속과 이런 요구를 조화시키는 해석을 제공함으로 끝을 맺는다. 

이 모든 것들, 혹은 다른 복음서에 쓰인 대로라면, 나머지. 오,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복된 행복인가! 당신이 새와 백합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얻는다면, 자연이 갖고 있는 아름다운 모든 것을 얻는다면, 그것은 모두 이 단어에 포함되어 있다. 즉, 나머지, 이 모든 것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이 모든 것들과 비교할 때, 마치 이 모든 것들을 무시하는 것처럼, 경멸하는 것처럼, 그것들에 초연한 것처럼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 . . 
오,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복된 행복인가!
그러나 그때 슬픔에 잠겨 저 밖에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와 함께 있는 염려하는 자는 그의 염려를 제외하고 생각할 만한 무언가를 얻었다. 그는 사람인 것에 얼마나 복된 행복이 약속되어 있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때, 백합이 그대로 말라 죽게 내버려 두라. 그녀의 아름다움은 알 수 없게 내버려 두라. 나뭇잎은 땅에 떨어지게 하고 새는 멀리 날아가도록 내버려 두라. 들이 어두워지도록 내버려 두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계절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머지”는 오랜 시간이든, 짧은 시간이든 필요에 따라 존재하게 내버려 두라. 나머지가 풍족하게 오든, 부족하게 오든 내버려 두라. 이 모든 것들이 부족하든, 이 모든 것들을 소유하게 되었든, 이 모든 것들은 그들의 순간을 갖도록 내버려 두라. 죽음에서 이 모든 것들이 잊혀질 때까지, 이 모든 것들이 강화의 주제로서 그것들의 순간을 갖도록 내버려 두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여전히 먼저 구해야 하는 것이고, 또한 궁극적으로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없어질 것도 영광 가운데 있다면, 길이 있을 것은 훨씬 더욱 영광 가운데 있을 것이다. 그리고 빈곤 가운데 사는 것이 힘들다면, 빈곤에 대하여 죽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이별인가!

"이 모든 것"이 이 땅의 전부를 의미하는 것이고, 새와 백합 뿐만  아니라 자연의 세계의 어디에서든 발견될 수 있는 염려로부터의 자유와 모든 영광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라면, 더 강력한 이유로a fortiori "하나님의 나라"는 훨씬 더 큰 영광을 의미하며, 염려에서 해방된 더욱 큰 자유를 의미한다. 키에르케고르에게서,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약속의 요점이 아니다. 요점은 세상적이지 않는 거룩한 보상unearthly divine reward이다. 이것과 비교할 때, 전체 자연의 세계는 "나머지"에 불과하며 잡다한 "이 모든 것들"이다.1)

첫 번째 강화는 초신자들에게 이땅의 염려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는지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새와 백합의 자유를 본받기 위해 분투라하려는 순간, 염려할 수 있는 인간의 불가항력적 능력과 맞닥뜨리고 만다. 이것은 의식의 필연적 특징으로, 새와 백합에게는 낯설다. 따라서 두 번째 강화는 믿음으로 앞으로 전진하기 위해, 믿음으로 염려를 패배시킬 수 있는 동일한 능력, 불가항력적인 동등한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능력은 새와 백합에게서는 배울 수 없다. 오직 하나님-사람이신 믿음의 진정한 모범을 통해 배울 수 있다. 

세 번째 강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점을 더 분명히 하고 있다. 새와 백합은 믿음에 있어서는 불완전한 존재다. 그들이 그들의 자유와 그들의 아름다움으로 제시하하는 한 그렇다. 세속적 염려에 대한 세속적 해결책일 뿐이다. 오히려, 내가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젖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여전히 새와 백합의 환상에 홀릴 정도로, 그들과의 닮은 점과 차이점에 홀릴 정도로, 나는 믿음의 저 진정한 과업에 아직 직면하지 않았다. 

그냥 백합이 시들게 내버려 두라. 그냥 새가 날아가게 내버려 두라. 나의 고통과 생존과 관련된 모든 염려를 포기하기 위해 그렇게 하라. "이 모든 것들"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선택할 수 있도록, 나 자신의 삶보다, 새와 백합의 삶보다, 자연 전체의 세상보다 하나님 나라를  선택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라. 

여기에서 건덕적 강화는 작별을 고한다. 새와 백합과, 저 아름다운 공식인 "염려에서 자유로운 믿음"과 작별을 고한다. 이 세 편의 강화는 일종의 한 세트로, 맘몬보다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도록 청자들에게 손짓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도 청자에게 그 방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각각의 강화는 청자들에게 그것들에서 젖을 떼게 함으로써 영향을 끼칠 뿐이다. 다시 말해, 각 강화는 자신을 넘어선 곳을 가리키고 있고, 자신의 단점을 고백하고 있고, 모든 청자에게 엄격한 선택을 맡기며 물러서고 있다. 저 모든 "단독자"에게 말이다. 키르케고르가 "우리가 배우는 것"에서 제시한 방법은 건덕의 방법과 동일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이 강화는 우리를 고발하지도, 명령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이 강화는 우리에게 자기 고발self-accusation, 자기 명령의 때occasion for self-command를 제공한다. 믿음의 엄격한 요구를 자고 있는 자기 직면self-confrontation의 때를 제공한다. 

 "우리가 배우는 것"에 대한 세 편의 강화를 실존 단계와 일치하게 구성하면서, 키르케고르는 단순히 그의 표준적인 해석학적 범주를 따라 복음의 본문을 해석한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해석학적 범주란, "심미적," "윤리적," "종교적," "건덕적" 범주를 가리킨다. 오히려 그는 이미 이런 범주들이 강화의 내용과 방법에 깊숙히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각 강화는 말하자면, 새로운 범주와 조우한다. 복음의 본문에서 이것을 발견한다.2) 따라서 "심미적"인 것은 믿음이 적은 자들이 초조해하고 걱정하는 방식으로, 그는 오늘과 내일을 비교하고, 스스로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상상하고 있는 것을 현실과 비교한다. "윤리적"인 것은 믿음에 대한 초신자의 개념으로, 그리스도의 약속으로 작용한다. 또한 이것은 우리 각자는 이 의무로 "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종교적"인 것은 믿음의 엄격한 요구다. 이것은 다음과 전적으로 동일하다. 

"하나님인가, 맘몬(재물)인가?"

마지막으로 "건덕적"인 것은 새와 백합이고, 그들은 염려로부터 자유로운 존재고, 믿음의 자유다. 그들은 각 청자들에게 다르게 말한다. 우리에게 어떤 방법을 가르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단독자"를 손짓한다. 믿음의 엄격한 요구로 손짓한다.3)

 

 

 

1) The Lily of the Field and the Bird of the Air: Three Devotional Discourse에서, 동일하게 엄격한 면을 본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고통일지라도, 하늘의 보상과 비교할 때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WA, 44-45를 참고하라. 

2) 이것은 Gregor Malantschuk가 말한 요점을 강화시킨 것이다. 

3)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 이미 깊이 있는 견해를 갖고 있는 Gordon Marino, Robert L. Perkins, David Tracy, 그리고 IKC와 David D. Possen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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