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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 시기의 작품

하나님의 불변성(업데이트 중...)

by 엉클창 2020. 3. 3.
  • The Changelessness of God: A Discourse
  • Guds Uforanderlighed. En Tale
  • 1855
  • KW23, SKS14, SV14

여섯 번째 시기: 기독교에 대한 공격(1854-55년)

하나님의 불변성The Changelessness Of God

키르케고르의 대부분 직접적인 종교적 저술은 "강화discourses"라 불린다.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이다.(키르케고르의 종교적 강화에 대한 개요는 <18편의 건덕적 강화Eighteen Upbuilding Discourses>를 참고하라.) 이 강화들은 건덕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권위가 없다." <천재와 사도의 차이>에서 서술한 것처럼(이 부분은 <두 개의 윤리-종교적 소론>을 참고하라), 사도는 권위가 있고 절대자와 관계가 있는 반면, 사람은 천재일지라도 어떤 권위도 없다. 단지 현명할 뿐이다.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권위는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권위가 아니다. 사도의 권위는 증명될 수도 없다. 키르케고르의 가명 저자를 통한 독특한 공격 계획은 "뒤에서 상처를 주는 것"이었는데, 이는 그의 "경건한 기만"의 일부였다. 그의 철학적인 작품들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은연 중에 영향을 끼치기 위한 것이었다. 반면에 그의 건덕적 강화는 가명적인 작품들과 함께 나왔고, 직설적이고 종교적이어서 그것들과 대조를 이루었다. 그러나 건덕적 강화는 종종 철학적 작품에 비하면 무시를 당했다. 이것은 키르케고르에게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키르케고르의 저술 방법>을 참고하라.

키르케고르는 1843년의 건덕적 강화에 나오는 헌사를 동일하게 사용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에는 의류 상인이었던 나의 아버지, 고 미가엘 패터슨 키르케고르에게, 이 강화를 바칩니다. 

이 작품은 비록 종교적인 담론이라고 불렸지만 실은 키르케고르가 1851년 5월 18일 시타델 교회에서 전한 설교였다. 이 서문은 키르케고르의 41번째 생일인 1854년 5월 5일 날짜로 되어 있다. 키르케고르의 기독교계에 대한 공격이 한창이던 1855년 8월, 죽기 불과 두 달 전, 《순간》 7부 8부 사이에 출판되었다. 사용된 본문은 야고보서 1장 17절로, 그의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다:"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이 강화는 키르케고르가 분명히 설교의 명쾌하고 침착하며 헌신적 스타일에 동의했기 때문에, 몇몇 사람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그의 감각을 잃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는 이 작품을 출판하고자 하는 내적인 강박은 없었다. 이는 그가 건덕적 강화의 중요성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잃지 않았다는 증거다. 그것은 또한 H. Johnson이 지적했듯이 키르케고르의 공격이 믿는 자로서 교회 내에서 나왔다는 것을 입증하는 데에 이용되었다. 특히 그의 반(反) 교회론적인 행동들이 나중에 독자들이 그의 나머지 글들에 노출되지 않은 곳에서 번역된 이후 많은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사실 키르케고르는 항상 그의 건덕적 강화를 철학적 글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여겼다. 

키르케고르가 종교 문제에 있어서 사변적 지식에는 관심이 없다는 증거로, 그가 가장 좋아하는 신약성서의 저서는 야고보서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 책은 신약성서 중에서 가장 약한 그리스도론을 가지고 있는데, 그리스도를 두 번밖에 언급하지 않았지만, 기독교의 윤곽을 드러내기 때문에 가장 실천적인 책이다. 더구나 <야고보 서신>에는 믿음과 두 마음에 대한 그 위대한 구절이 담겨 있는데, 이 구절은 "마음의 청결이란 한 가지를 품는 것이다"의 요점이기도 하다.(이 부분은 <다양한 정신의 건덕적 강화>를 참고하라.) 반면에 하나님이 불변하면 객관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키르케고르가 주관적 지식을 강조할 때 객관성이 없다고는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주관적 개인으로서 객관적으로 무언가에 접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고와 존재는 별개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주관적 지식은 모순에도 불구하고 믿음에 의해 파악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결론의 비학문적 후서>를 참고하라. 

<하나님의 불변성>에서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항상성 안에서 쉬도록 권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항상성이란 결코 잊지 않고 우리가 행하고 말하는 것에 대해 심판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단지 안식을 위해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 비록 우리가 한 일을 잊을지라도, 하나님은 영원히 마음을 쓰신다. 그러므로 그 강화는 교화와 훈계를 동시에 의미한다. 

만물은 부패하기 쉽고, 사람은 얼마나 변하기 쉬운가! 당신, 나의 독자 그리고 나 말이다. 이 정신에는 얼마나 우울하고 지겨운가! 그 변화가 더 악화된다니 얼마나 슬픈가!... [그러나] 본문은 그 반대, 하나님은 변화 없는 것을 말하고 있다. 본문의 정신은 섞이지 않은 기쁨과 반가움이다....변화의 그림자조차 그분을 건드리지 않는다.변할 수 없는 명확성이 있다.빛의 아버지인 그분은 영원히 변하지 않고 있다.... 우리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이 생각은 무섭고, 모든 두려움과 떨림이다(p. 228ff). 

키르케고르는 그의 신학을 역사적 해석으로 평정한다. 하나님은 불변하고 상처를 입지 않는다. 하나님은 영향을 받거나 고통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이는 성서의 모든 구절은 해석을 위해 의인화된 언급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실재에서 그분은 변함이 없다. 키르케고르는 독자들에게 우리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은 가차없다는 점에서 독자들을 훈계한다. 그분의 변함이 없음을 인하여 우리가 행하는 어떤 행위도 결코 잊지 않으시다는 점에서 독자를 훈계한다. 그분은 뇌물을 받을 수도 없고 결정을 바꾸도록 설득할 수도 없다. 하나님의 본성에는 어떤 진화가 없다. 이것은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공포를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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