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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시기의 작품

루델바흐 박사에게 쓴 공개 편지

by 엉클창 2020. 5. 1.
  • An Open Letter, Prompted by a Reference to Me by Dr. Rudelbach
  • Foranlediget ved en Yttring af Dr. Rudelbach mig betræffende
  • 1851, January 31
  • KW13, SKS13, Fædrelandet 26

다섯 번째 시기: 직접 전달(1848-51년)

루델바흐 박사에게 쓴 공개 편지An Open Letter to Dr. Rudelbach

이 기사는 기독교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이 작품은 1851년 1월 31일에 출판되었다. 덴마크에서 공식적으로 검열을 받았던 N. F. S. 그룬트비그(Grundtvig)와 함께 안드레아스 고틀롭 루델바흐(Andreas Gottlob Rudelbach, 1792-1862년)는 1825년에 테올로기스크 마아네즈스크리프트(Theologisk Maanedsskrift, 신학 월간지)라는 제목의 출판을 시작했다. 이 출판물은 합리주의에 대한 공격과 함께 후에 키르케고르가 공개적으로 반대할 H. L. 마르텐센에게 호소했다.

Hans Larsen Martensen

그러나 이런 연합이 금지될 것을 눈치채고, 루델바흐는 그룬트비그로부터 도망쳤다. 루델바흐는 후에 덴마크의 St. Mikkels, Slagelse, Sjælland의 목사가 되었다. 그의 저술에서 그는 교회의 개혁을 제안했다. 키르케고르는 교회의 개혁 필요성을 분명히 지적했지만, 루델바흐는 개혁이라는 정치적 수단을 제시했기 때문에 반대했고, 키르케고르는 나중에 교회를 해체하고 영적인 용어로 새롭게 재건할 필요가 있다고 썼다. 코르사르에 대한 공격과 이후 덴마크 교회에 대한 공격 모두에서 키르케고르는 공격을 시작했다.

A. G. Rudelbach

루델바흐는 약화되고 무심한 교회론을 언급하기 위해 "습관적 기독교(habitual Christianity)"라는 용어를 사용했었다. 키르케고르 역시 이 용어를 사용했고, 개혁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그는 루델바흐의 방법을 거부했다.

N. F. S. Grundtvig

나는 "습관적기독교"를 혐오한다. 이것은 사실이다. 나는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 습관적 기독교를 싫어한다. 나는 습관적 기독교가 정말로 많은 형태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이 "어떤 형태든" 만들어지는 것을 특별히 주의를 기울였으면 한다. 그리고 만약 다른 선택이 없다면, 그 선택이 습관적 기독교 사이에서의 선택일 뿐이라면, 기독교인이라는 착각 속에서 태연하게 계속 살아가는 세속적인 사고방식인 습관적인 기독교 사이에서의 선택일 뿐이라면, 아마도 기독교에 대한 아무런 인상도 갖지 못한 채, 종파, 열성주의자, 초정통주의자, 교회분리주의자에서 발견되는 습관적 기독교 사이에서의 선택이라면, 최악이 최악으로 간다면, 나는 첫 번째 것을 선택할 것이다. 첫 번째 것은 무심하게 부정적으로만 기독교를 망령되이 일컬었다. 여전히 기독교를 그 정도까지 엄격하게 판단할 수 있다면. 두 번째 종류는 기독교를 영적 교만으로 망령되이 일컬었다. 다만 어떤 경우에도 긍정적인 면에서 기독교를 망령되이 일컬었다. 첫 번째 종류의 것에는 미소짓과 싶은 유혹이 있을 수 있다. 거기에는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종류는 사람을 소름 끼치게 한다. 그러나, 언급했듯이, 내가 습관적인 기독교를 혐오하는 것은 사실이다(p. 52). 

나중에 키르케고르가 정식으로 교회를 공격했을 때, 그는 더 이상 이전 형태의 습관적인 기독교에 대해 "미소짓고 싶은" 유혹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는 교회의 완전한 해체을 요구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학식 있는 신학자 루델바흐 박사가 [그는 습관적인 기독교를 혐오하는 사람]이라는 이와 같은 말을 한다면 나는 반대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에 대해 그에게 감사할 것이다.... 이 문제에서 내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그가 앞으로 그 오해의 소지가 있는 용어인 '해방'을 나의 노력과 연관시키지 않으려 한다는 것 뿐이며, 내가 두려워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내가 스스로 이 말을 한 후, 내가 습관적인 기독교를 혐오한다고 쓰는 것이 문학적 진부함(literary cliché)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p. 52). 

키르케고르는 정치적 의도가 있는 모든 개혁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교회와 국가에는 분리가 있어야 한다. 

정치와 기독교의 이런 처참한 혼란, 아주 쉽게 새로운 종류와 방식을 가져다 줄 수 있는 혼란,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무언가 새롭고 더 나쁜 것을 대신하는 역개혁(reverse reformation), 이 모든 것들보다 더 큰 불안감을 가져다 주는 것은 없다.비록 그것이 여전히 정직한 개혁으로 여겨질지라도, 그것은 도시 전체를 조명함으로써 기념된다 해도 그렇다. 기독교는 내면성이고, 내적 성숙이다. 만약 주어진 시간에 사람이 살아야 하는 형태가 가장 완전하지 않다면, 그것들이 개선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렇게 하라. 그러나 본질적으로 기독교는 내면성이다(p. 53). 

후에 키르케고르는 교회를 공격하면서 개혁가임을 강력히 부인했고, 자주 개혁가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죄라고 탄식했다. 왜냐하면 자칭 개혁가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권위가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누군가가 그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질 수 있음을 인정한다. 

정치적으로 성취된 자유로운 제도권에서의 구원하는 능력에 대한 이 믿음이 진정한 기독교에 속한다면,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거나 그보다 더 나쁜 게, 나는 사탄의 고정 자식이다. 왜냐하면 솔직히 말해서 나는 정치적으로 성취된 자유로운 제도를 의심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것들의 구원, 새롭게 하는 능력을 의심하기 때문이다....이런 일을 위해서 전혀 다른 예언자들이 필요할지라도, 혹은 아주 간단히 말해서, 이런 과업은 그런 일을 위해 임명받고 훈련받은 자들에게 맡겨져야 한다 해도.... 내가 이것을 착각으로 여기는 것처럼, 기독교인이 되는 데 그를 방해는 외재적 조건과 형태임을 상상하게 하는 착각인 것처럼, 만일 누군가가 외재적 조건과 형태가 그가 기독교인이 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상상한다면 그것은 또한 같은 착각이다.... 기독교란... 모든 제도, 모든 구성보다 무한히 높고 무한히 자유롭다(p. 54). 

이 편지의 추신에서, 키르케고르는 그의 목적을 다시 명확히 한다. 

나는 단지, 시인적으로, 기존 질서에 실존적 수정(existential-corrective)이라 부르는 것을 제공했을 뿐이다. "단독자(the single individual)"에게 있는 내적 성숙(inward deepening)을 지향했다. 즉, 기존 질서의 가르침과 조직에 대해 단 한 마디도 지시한 적이 없다는 것은 긍정적이지만, 나는 이 가르침을 점점 더 "단독자"에게 있는 진리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어떤 오해도 막기 위해 나는 논쟁적으로 철저히 전체 과업을 통해 "군중"을 겨냥했고, 숫자를 겨냥했다. 또한, 우리 시대의 골치 아픈 죄를 목표로 삼았고, 자칭 개혁과 이 같은 선상에 있는 거짓을 목표로 삼았다(p. 56). 

여기에 키르케고르의 마지막 기록이 있다. 

양심의 문제라면 반드시 이런 식으로 맞서 싸워야 한다. 그것이 양심의 문제가 아니라면, 그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 되고 만다. 기독교는 정확히 이런 것을 의미한다: 외적인 것에 대한 무관심을 발전시키기 위해 스스로를 염려하는 것(p.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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