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ree Discourses at the Communion on Fridays: The High Priest, The Publican, The Woman Who Was a Sinner
- Tre Taler ved Altergangen om Fredagen: Ypperstepræsten, Tolderen, Synderinden
- 1849
- KW18, SKS11, SV11
다섯 번째 시기: 직접 전달(1848-51년)
금요일 성만찬 때의 세 편의 강화Three Discourses at the Communion on Fridays
키르케고르의 대부분 직접적인 종교적 저술은 "강화discourses"라 불린다.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이다.(키르케고르의 종교적 강화에 대한 개요는 <열여덟 편의 건덕적 강화Eighteen Upbuilding Discourses>를 참고하라.) 이 강화들은 건덕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권위가 없다." <천재와 사도의 차이>에서 서술한 것처럼(이 부분은 <두 개의 윤리-종교적 소론>을 참고하라), 사도는 절대자와 관계가 있는 반면, 그는 천재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해시 태그 "권위"를 참고하라.
키르케고르의 가명 저자를 통한 독특한 공격 계획은 '뒤에서 상처를 주는' 것이었는데, 이는 그의 '경건한 기만(godly deception)'의 일부였다. 그의 철학적인 작품들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은밀하게 주입하기 위한 것이었다. 반면에 그의 건덕적 강화는 가명적인 작품들과 함께 동반된 것으로, 직접적이고 종교적이어서 이 작품들과는 대조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종종 철학적 작품들에 비해 별로 관심이 없었다. 이것은 키르케고르에게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키르케고르의 저술 방법을 참고하라.
첫 번째 강화는 성서 본문 히브리어 4장 15절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키르케고르의 주된 관심사는 독자들에게 위로를 주는 것이다. 우리가 직면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고통은 그리스도가 직면했다. 그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미움을 받고, 맞고,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또 다른 친구로부터 부인당하고, 동시대 사람들에 의해 불신당하고, 대중의 비웃음을 받고, 심한 오해를 받고, 무고하게 처형당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죄 없는 사람이었다면, 그때 그는 죄와 관련된 고통을 경험하지 못한 것 아닐까? 키르케고르는 성경을 인용하며 부정적인 대답을 한다. 그분은 모든 면에서 유혹을 받았다는 것이다. 사탄이 그를 시험할 때 광야에서 금식하는 동안, 그는 마태가 제시한 순서에 따라 시험을 받았을 것이다: 굶주림, 권력의 과시, 제국 통치에 대한 시험이다. 그리스도는 고난당하는 자로서 우리를 위로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그분은 다른 사람들에게 위로를 원했던 그런 고난당하는 자가 아니다. 하물며 다른 사람에게서 위로를 찾겠는가. 하물며 다른 사람에게서 위로를 찾을 수 없다고 불평하겠는가. 아니, 그분은 고난당하는 자였다. 오직 그분만이, 오직 그분의 위로만이 다른 사람을 위로한다. 보라, 여기에서 당신은 고난의 최고의 지점에 도달했다. 또한 모든 것이 역전되는 고난의 변두리에 도달했다. 왜냐하면, 그분, 그분 홀로, 위로자(Comforter, 보혜사)이기 때문이다.(요14:26) -(번역 초안, 8쪽)
그러나 인간적인 고통 전체를 겪는 것만이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가 인간의 고통과 관계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속죄에서 그는 문자 그대로 희생양으로 우리를 대신한다.
두 번째 강화의 제목은 "세리"이다. 누가복음 18장 18절의 성서 구절에 기초한다. 예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한 사람이 자신의 죄에 대해 가질 수 있는 두 가지 종류의 태도를 비교한다. 바리새인은 자신이 어떤 죄인들만큼 나쁘지는 않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한다. 세리는 따로 서서 하나님께 긍휼을 구한다. 키르케고르는 이 구절을 자신의 영원한 주제인 하나님 앞에 홀로 있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다. 본문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 세리는 따로 서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창조주 앞에 단독자로서 죄책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문자 그대로 따로 서 있다. 바리새인은 문자 그대로 따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한다. 이런 식으로 그는 도덕적으로 우월한 사람으로서 자신을 떼어놓는다. 키르케고르는 이것을 독자에게 직접 전달하기 위해 사용한다.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 홀로 있을 때, 당신의 비명이 아무리 다른 누군가를 불러도 그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배웠다. 거기에서, 당신은 단독자라는 것을, 문자 그대로 당신 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배웠다. 당신 말고 거기에 누군가 있을 수 있다는 것, 거기에 누군가 올 수 있다는 것은 모든 불가능한 것들 중에서 가장 불가능한 일이다. 바로 그때, 필요가 기도를 만들 듯, 공포가 이 비명을 만든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지만 바리새인은 위험 가운데 있지 않았다. 그는 자랑스럽게, 안전하게, 자기만족을 하며 서 있었다. 그에게는 어떤 비명도, 울부짖음도 들리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다른 의미,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곧, 그는 하나님 앞에 있지 않다....
그는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다. 그는 눈을 떨구었다. 하지만 그가 눈을 아래로 향할 때, 하나님을 “본다.” 눈을 아래로 향한다는 것은 마음을 “위로 향한다는 것”이다. 진실로 어떤 눈도 믿음이 눈만큼 날카롭게 볼 수 없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말해, 믿음의 눈은 맹인이다. 오히려 보는 것은 이성, 이해이다. 믿음은 이해에 반한다....(번역 초안, 18-9쪽)
키르케고르는 믿음보다 앞선 어떤 이해도, 혹은 믿음을 돕는 어떤 이해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믿음은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믿음에 대한 이러한 주관적인 접근은 <결론의 비학문적 후서>에서 훨씬 긴 길이로 서술하고 있다. 믿음의 우선순위와 하나님 앞에 홀로 있을 필요성에 대한 일치는 오직 하나님 앞에 자신을 고발하는 자아만이 하나님 앞에 정당화될 수 있다는 키르케고르의 주장이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찌르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비난이 아니다. 자기 고발은 “칭의(justification)”의 가능성이기 때문이다.(번역 초안, 19쪽)
세 번째이자 마지막 강화는 키르케고르의 더욱 감동적인 작품 중 하나이다. 이 작품은 누가복음 7장 47절에서 나온 것으로, 죄 많은 여인에 대한 것이다.동일한 본문이 <한 편의 건덕적 강화>에도 사용되었다. 그가 지적했듯이, 이 구절은 두드러진 대비로 가득 차 있다. 이 연회는 축제의 장이지만, 이 여자는 이 자리를 죄를 고백하는 곳으로 사용한다. 그녀는 바리새인의 집에 간다. 바리새인은 전형적으로 율법적이고 영적인 교만을 나타낸다. 키르케고르의 말처럼 바리새인의 집은 그런 여자가 용서는커녕 위로를 찾는 마지막 장소가 될 것이다. 그녀는 연회에 향유를 가져와 눈물을 흘리며 주님의 발에 붓는다.
예수님은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라고 말한다. 이것은 물론 은혜와 행위의 효과에 대한 논쟁을 불러 일으킨다. 키르케고르는 토론에 참여하기를 거부한다. 그는 그의 일기와 다른 곳에서 구원은 은혜에 의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야고보서에서 말한 것처럼, 행위는 은혜와 사랑의 중요한 열매다. 그리스도인은 행위가 있어야 한다. 만약 그가 기독교인이라면. 여자의 행위는 사랑이다. 그녀는 예수를 너무 사랑해서 자신을 망각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연회에 와서, 이어지는 어떤 반응에도 개의치 않는다는 점에서 겸손함을 보인다.
자기 자신을 기억한다면, 확실히 사랑할 수는 있으나 많이 사랑하지 못한다. 자기 자신을 많이 기억할수록, 같은 정도로 덜 사랑한다. 그렇지만 그녀는 자신을 완전히 망각했다.(번역 초안, 5-6쪽)
이러한 강화가 발표되기 전인 1848년 키르케고르는 자신의 죄가 용서될 뿐만 아니라 잊혀졌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이 믿음이 이 강화에서 밝혀진다.
그러나 “그녀의 많은 죄는 정말로 사함을 받았다.” 어떻게 이보다 더욱 진실하게, 더욱 강력하게 표한할 수 있겠는가! 모든 죄는 망각되었다. 이 큰 죄인이었던 그녀는 그림으로 바뀌었다. “너의 죄는 사함을 얻었다”고 말할 때, 얼마나 쉽게 그녀의 기억은 되돌아오는가? 그녀가 그녀의 많은 죄가 사함을 얻었다는 이 무한한 망각으로 먼저 힘을 얻지 못한다면, 얼마나 쉽게 그녀의 기억은 되돌아오는가?
“그녀는 많이 사랑했다.” 따라서 그녀는 완전히 자신을 망각했다. “따라서 그녀의 많은 죄는 사함을 얻었다.” 말하자면, 많은 죄들은 잊혀져서 그녀와 함께 망각 속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녀는 그림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어떤 기억(recollection)이 된다. 그러나 이 기억이 그녀에게 자기 자신을 생각나게 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자신을 잊어버림으로써 기억을 망각했듯이, 마침내(eventually)가 아니라 즉각적으로, 기억은 그녀의 이름을 망각했다. 그녀의 이름은 “죄 많은 여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번역 초안, 7쪽)
키르케고르는 마침내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요점에 대해 말했는데, 냉소적이고 사랑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에 대해 전체에 충격을 가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꼬집어 말했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그녀의 사랑에도 자기 사랑이 있다고 가정하는 누군가를 상상한다.
누군가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여인의 사랑에는 이기적인 무언가 있어. 결국 그것은 그녀의 필요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사랑한 것에 불과하지.”
누군가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나는 대답할 것이다.
“당연하죠.”
게다가 한 마디 더할 것이다.
“하나님 우리를 도와주소서. 다른 어떤 방법도 찾을 수 없군요.”
그때 한 마디 더할 것이다.
“하나님은 내가 어떤 다른 방법으로 나의 하나님, 나의 구세주를 사랑할 만큼 담대해지는 것을 금하시죠. 문자 그대로 나의 사랑 안에 어떤 자기애(self-love)도 없다면, 나는 그분을 필요로 하지도 않으면서 그분을 사랑할 수 있다고 상상할 것이 뻔합니다. 하나님이여, 이런 신성모독으로부터 나를 보호하소서!” (번역 초안, 7-8쪽)
키르케고르는 주로 하나님 앞에 있는 자기에 관심을 가졌다. 이것은 어느 정도 자기 염려(self-concern)를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사실 우리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 불러냄을 받은 것이다. 더구나 우리는 개인으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영원히 개인으로 남을 것이다. 어느 정도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그리고 은혜와 행위에 대해 말하자면, 이 둘은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 그녀가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사랑하는 구세주에게 오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에 구세주는 사랑 그 자체였고, 따라서 그녀에게서 사랑을 불러일으켰다. 이 경험은 신학화와 문학적 기교로 정교하게 해부될 수 없다. 그녀는 사랑했고 용서받았다. 우리는 연대기에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고, 인과관계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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