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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고난의 복음 제 2 강화 해제

by 엉클창 2020. 6. 6.

고난의 복음은 전체 7편의 강화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 강화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생각 속에 어떤 의미와 기쁨이 있는지
  2. 고난이 무겁다면 어떻게 짐이 가벼울 수 있는지
  3. 고난의 학교가 영원을 위해 교육하는 기쁨
  4.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람이 항상 죄책으로 고난당하는 기쁨
  5. 환난당하는 길이 아니라 환난이 길이라는 기쁨
  6. 영원의 행복이 가장 무거운 일시적 고난보다 더 무겁다는 기쁨
  7. 담대한 확신이 고난 중에도 세상의 능력을 빼앗고, 그 능력으로 능욕을 영광으로, 파멸을 승리로 바꿀 수 있는 기쁨

이 중에서 이 강화는 두 번째에 해당된다. 두 번째 강화는 “고난의 짐”에 대해서 다룬다. 고난은 덴마크어의 “Lidelsen”을 번역한 것이다. 이 단어는 “고통, 고난, 괴로움”의 의미를 담고 있다. 역자는 이 단어를 “고난”으로 옮겼다.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바는 육체적 고통이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을 의미하고 있고, 무엇보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1:8)고 권면한 것처럼, 성서의 번역을 따랐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는 처음부터 “짐”에 대하여 다룬다.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남편은 아내에게 모든 짐을 지우기 원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모든 짐을 지우기 원한다. 과실상계가 있듯 법적인 논리에서는 누가 짐을 얼마나 지느냐의 문제라면, 사랑의 문제에서는 누가 모든 짐을 지느냐의 문제인 것 같다. 엄밀한 의미에서 누구도 짐을 지지 않는 사람은 없다. 의존적인 사람이 의무의 짐을 진다면, 독립적인 사람은 책임의 짐을 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멍에는 유익하고 나의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시면서 마치 짐을 나누어지는 것처럼 말씀하시지만, 세상에서 보면 오히려 바리새인의 이야기가 맞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마23:4) 바리새인의 잘못은 마땅히 져야 할 짐을 회피하려 한다는 데에 있다.

이런 점에서 생각해 본다면, 인간의 존재란 무엇인가? 인간의 특성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라틴어로 호모 사르키나투스(Homo Sarcinátus)이다. 이는 “짐 지는 존재”라는 뜻이다. 이 부분에서는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누구나 어떤 “정신적인 짐”을 지고 산다. 키르케고르가 언급하고자 하는 짐은 물리적인 짐이 아니라, 정신적이고 어떤 영적인 짐을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이와 유사한 의미에서 인간 실존을 “세계-내-존재(In-der-Welt-sein)”라고 말한 바 있다. 인간은 자신이 구성해 놓은 세계 안에 존재한다. 현존재의 근본적 특징은 세계 밖에 설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언급했던 “짐 지는 존재”는 세계-내-존재와 다를 바가 없다.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하자면, 강박과 같은 정신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예기불안에 사로잡힌 자다. 그는 스스로를 그 세계에서 구원할 수 없다. 자신의 세계 안에 갇힌 상태라 볼 수 있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누구보다 어떤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금 더 구체화시켜, 불면증 환자를 예로 들어보자. 불면증 환자 역시 어떤 예기 불안이 있는데, 이는 이번에도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다. 이럴수록 잠을 자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다. 이렇게 잠을 청할 수 없는 사람은 굉장히 긴 시간을 잠을 자야 한다는 생각에 무거운 짐을 진다.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잠은 짐이 아니다. 오히려 잠은 짐을 덜어주는 휴식이다. 잠이야 말로 자고 나면 정신적인 자유를 준다. 하지만 불면증 환자들에게는 잠은 짐이다. 다른 어떤 것보다 강력한 짐이다. 이처럼 세계-내-존재로서의 인간은 자신의 세계 밖에 설 수 없다.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인간의 근본적 실존의 양상은 “고성제”이다. 곧, 인간의 삶 자체가 고통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다시 한 번 인간 실존의 존재론적인 특징을 설명하면 호모 사르키나투스, 곧 “짐 지는 존재”이다. 

어떻게 하면 이 짐을 가볍게 할 수 있는가? 먼저 기독교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고 넘어가보자. 앞으로 계속해서 <고난의 복음>을 통해 살펴볼 예정이지만,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고난당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JP, 4:4681/Pap X4 A 481).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된 삶을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고난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짐을 지면서 기쁘게 그 길을 갈 수 있는가? 도대체 그리스도인은 어떤 짐을 지는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가 감당할 수 없는 죄의 짐을 홀로 지신다. 하지만 주님은 짐을 진 자들을 초청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29) 

이 복음의 말씀대로라면, 짐을 지지 않은 자는 초청받는 적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오려면 누구나 짐을 져야 한다. 이런 점에서는 “자각”은 주님 앞에 나오는 데에 중요하다. 호모 사르키나투스로 인간을 정의할 때, 사람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짐을 졌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과 짐을 졌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다. 여기에서 자각이란 짐을 졌다는 것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키르케고르의 저작인 <죽음에 이르는 병>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절망 가운데 있다. 이는 절망의 보편성으로, 이 역시 두 부류의 사람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절망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과 절망에 대해 무지한 자이다. 절망은 인간 최대의 불행이지만 절망하지 않고서는 주님 앞에 나아올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따라서 절망은 최대의 불행이자 또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정신적 짐”에 대한 자각이 있는 자가 하나님 앞에 나아오지 못하고 어디론가 숨는 것이다. 이것이 일종의 도피다. 짐이 자각될 때, 정신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이 불안이다. 키르케고르에게 절망과 불안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에 따르면,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이라고 하였다. 동물은 두려움은 느낄지 몰라도 불안해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불안은 자유를 지닌 인간의 근본적인 특징이기 때문이다. 

 자유의 현기증

불안이 자유의 현기증인 이유는 자유로운 인간만 자유의 가능성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쉽게 이야기해서, 무언가 큰 꿈을 꾸고 있다면 실현 가능성에 설렐 수도 있다. 하지만 실현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불안할 수도 있다. 따라서 불안은 자유의 무한한 가능성 앞에서의 “반감적 공감이면서 공감적 반감”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이런 불안한 감정이 싫다. 불안이 나타날 때마다 도피하려 한다. 

키르케고르는 놀랍게도, 이런 감정을 인간의 원죄와 연결시키고 있다. 아마 이런 불안을 존재론적 불안이라 명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불안해 할 수 있는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의 특징인 바, 여기에서 도피하는 데에 성공한다면 아마 행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참된 행복이 아니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에서 비본래적 존재방식으로 사는 타락한 세인의 반응이 이와 유사하다. 그러나 불안과 마주하는 사람, 그는 자유의 가능성의 무게에 짓눌린다. 필자는 이때 이런 감정을 “현기증”으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가능성 앞에서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하는 상태에 빠질 때, 그는 절망한다. 물론, 절망의 다양한 형태가 있으나 간단하게 언급하자면 그렇다. <고난의 복음>에서 두 번째 강화와 연관하여 생각해본다면, 이런 자유의 가능성을 자각하는 상태가 곧 짐을 질 때이다. 어떤 것이 짐인가? 물론 그것은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세계-내-존재인 사람은 자기가 구성해 놓은 세계 속에서 자신의 짐을 지고 간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무겁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짐이 어느 날 무겁다고 느낄 때가 있다. 

아이를 키우고 있는 부모가 아이 키우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아이를 키우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짐을 지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이렇게 짐을 자각할 때, 살아가야 할 인생을 생각할 때, 짐의 무게는 더욱 더 무거워진다. 어떻게 이 짐을 가볍게 할 수 있는가? 여기에서 어떤 짐의 변증법이 생긴다. 먼저, 키르케고르는 성서의 본문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 멍에는 유익하고 내 짐은 가볍다.

원래 성서의 본문은 “내 멍에는 쉽다”고 되어 있다. 키르케고르는 이 “쉽다”라는 용어를 “유익하다”라고 옮기고 있다.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만 유익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은 인간이 질 수 없는 죄의 짐을 홀로 지시고, 다른 멍에를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멍에”는 무엇일까? 이 강화의 본문에 의하면 “온유”이다. 이 강화의 본문은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성서의 본문을 다루고 있다. 첫 번째는 멍에가 유익하다는 점과 짐이 가볍다는 사실이다.

이미 이야기한 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만 유익하다. 복음의 말씀대로 세상에서 세상살이 하다가 짐의 무게로 짓눌린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 나와 짐을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를 멘다. 그리고 이 멍에가 유익하다고 믿으면 그는 정말로 산을 옮긴다. 이것이 첫 번째 키르케고르의 제안이다. 

키르케고르는 이 부분을 이야기하면서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의 원리를 인용하고 있다. 아르키메데스는 “내가 세계 밖에 설 수 있다면, 지렛대를 이용해 세계를 들어 올릴 수도 있다”고 말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키르케고르는 그의 생각은 한 가지가 부족했다는 것이다. 누구도 세계 밖에 설 수 없다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세계-내-존재다. 세계의 구조를 알려면 세계 밖에 서야 하는데, 세계 밖에 설 수 없는 인간은 자신의 세계 구조를 파악할 수 없다. 이것이 인간 실존의 상황이다.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 원리

하지만 키르케고르는 세계 밖에 서는 정신의 운동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믿음”이다. 오직 믿음만이 세계 밖에 서는 운동이다. 무엇을 믿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짐이 유익하다고 믿으면 산을 옮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짐이 가볍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착각이다. 이 강화는 가벼운 짐을 가볍게 지는 방법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무거운 짐을 가볍게 지는 법을 터득하는 법을 알려주는 탁월한 영적 기술이다. 

또 하나, 키르케고르가 본 강화에서 다루고 있는 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짐이 가볍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이야기했던 대로, 절대 가볍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는 자, 그는 예수님을 닮은 온유한 자고, 오직 온유한 자만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를 가볍게 메고 간다. 

마지막으로 본 강화의 주제는 용서로 넘어간다.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질 수 없는 죄의 짐을 홀로 지셨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짐을 떠안게 되는가? 우리는 죄의식의 짐을 떠안는다. 키르케고르는 영적으로 이해할 때, 가장 무거운 짐은 죄의식의 짐이라는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죄의식의 짐은 가장 많이 증가한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 의하면 하나님 앞에 섰을 때의 이 절망이 본래적 절망이다. 하지만 죄의식의 짐을 가져가시고 용서의식을 주시는 자,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역자는 지금까지 간단한 해제를 썼으나, 이미 이 글을 읽어본 독자라면, 얼마나 심층 깊은 글인가 알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더 자세한 이야기는 이미 티스토리 블로그에 올려놓은 상태다. 더 자세한 공부를 원하는 독자들은 티스토리를 참고하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남기고 싶은 이야기는 이렇다. 오늘날 교회의 복음은 상당히 변질되어 있다고 본다. 교회가 너무 성공주의로 빠져들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들을 풍요로운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시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교회가 예수 믿으면 이 땅에서 잘된다는 복음을 선포했는가. 대표적인 것이 번영신학이다.

이런 점에서 <고난의 복음>은 정반대에 서 있다. <고난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 하는 자는 더 큰 짐을 떠안고 더 많은 어려움을 당한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불필요한 싸움에 휘말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 짐을 가볍게 지고 가면서 기뻐할 수 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온유와 용서로 결론을 맺고 있다. 하지만 온유와 용서를 실천하는 일이 쉬운 일일까? 아니, 정반대다. 오히려 분노하고 용서하지 않는 삶이 더 실천하기는 쉽다. 하지만 글을 읽어본 독자는 알다시피, 온유는 이 세상에 보상이 없다. 온유는 무거운 짐을 가볍게 지고 가기에 세상에서 온유한 자는 인식되지도 않는다. 그의 발걸음은 가볍다. 하지만 이렇게 사는 삶은 거의 불가능하다. 용서를 실천한다는 것은 또한 얼마나 어려운가!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은 이런 불가능에 도전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한다. 역자 역시 번역했지만 온유와 용서의 삶을 산다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어렵다. 사도 바울은 “선 줄로 생각하거든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고 했다. 누구도 말씀 앞에서 섰다고 주장할 수 있는 자가 있을까?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겸손하게 이 길을 간다. 독자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 길을 갈 때, 무거운 짐이 가벼워지는 기적을 경험하기를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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