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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시기의 작품

제 2강화: 고난이 무겁다면 어떻게 짐이 가벼울 수 있는지

by 엉클창 2020. 5. 18.

네 번째 시기: 두 번째 저술의 서막(1846-48년)

고난의 복음The Gospel Of Suffering

제 2강화: 고난이 무겁다면 어떻게 짐이 가벼울 수 있는지

이 강화는 무엇보다 "짐"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다룬다. 이 강화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짐이다. 오직 이 짐만이 유익하다. 아래 링크를 통해 이 강화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소개한다.  

제 2강화 소개

제 2 강화에 대해 소개한다. 무엇보다 키르케고르의 작품 중 <그리스도교의 훈련>과의 관계를 다룬다. <그리스도교의 훈련> 역시 동일한 구절을 사용하여 기독교의 복음을 논한다. 하지만 본 강화하고는 강조점이 다르다. 

죄의 짐

그리스도는 실제로 인류가 지고 갈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지고 가신 분이시다. 곧, 그리스도와 인간이 마치 짐을 나누어진 것처럼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홀로 인간의 죄의 짐을 지셨다. 이런 점에서 본문 말씀은 재해석 되어야 한다. 

무엇이 더 큰 기적인가? 

어느 것이 더 큰 기적인가? 번영 신학이 말하는 것처럼 고난이 제거된 성공이 더 큰 기적인가, 자발적 고난을 선택하고도 고난 중에 기뻐하는 것이 더 큰 기적인가?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것이 더 큰 기적인가, 무거운 짐을 가볍게 지는 것이 더 큰 기적인가? 

믿음은 실제로 산을 옮기는가?

아르키메데우스는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하여 세계를 들어올릴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누구도 "세계 밖에" 설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믿음은 산을 들어 옮긴다. 믿음만이 세계 밖에 서는 정신의 운동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산을 들어 올리려면 산 밑에 있어야 한다. 이때, 고난으로 짐을 지고 있는 자는 산보다 더 무거울 수는 없다. 하지만 그가 지고 있는 짐이 유익하다고 믿으면 정말로 산을 옮긴다. 이 짐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짐뿐이다.

무거운 짐을 가볍게 지는 온유

키에르케고어의 의하면, 온유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정신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소개되지 않는 정신이다. 예를 들어, 섬김의 리더십은 한국 사회에서 얼마나 많이 회자되었는가. 교회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 심지어는 기업에서도 섬기는 리더십을 배우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온유는 가장 탁월한 셀프 리더십이다. 

온유리더십

이런 점에서 온유함은 보상이 없는 미덕이다. 온유함은 아주 조용하게 걷기에 아무도 무거운 무게를 알아채지 못 한다. 심지어 온유한 사람에게 짐을 지운 사람조차 정말로 그것을 알지 못하게 된다. 용기는 눈에 보이는 승리로 보상받는다. 고매함은 긍지의 휘광(glance)으로, 인내는 고난의 증거로 보상받는다. 그러나 온유함은 인식불가능하다. 

용서의 짐

나는 용서가 그리스도인이 실천해야 할 최대 과제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원수도 우리의 이웃이다. 복음은 심지어 원수도 사랑하라 말하지만, 용서 없이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 따라서 사랑의 실천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있다면 용서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죄의식이 가장 무거운 짐이라면, 죄 용서받는 그리스도인이 실천해야 할 가장 무거운 짐은 용서다. 다시 말해, 주님은 가장 무거운 죄의 짐을 가져가시고, 동일하게 무거운 용서의 짐을 맡긴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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