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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시기의 작품

사랑의 역사 1부 2A 초벌번역

by 엉클창 2023. 11. 24.

 

 

II A 당신은 사랑해야 합니다
Du skal elske

 

마태복음 22: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모든 연설, 특히 연설의 일부분은 통상적으로 시작되는 무언가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연설이나 주장에 대해 성찰하려고 하는 사람은 시작하기 위해 무엇보다 이 전제를 찾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인용한 본문 역시 이러한 전제가 있습니다. 이 전제가 마지막에 온다 해도, 시작이지요. “네 이웃(Næste)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라고 말할 때, 이것은 모든 사람은 자신을 사랑한다고 하는 전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보기1 이 주장은 주로 독일 철학자 헤겔과 덴마크 철학자 하이버그에 의해 주장되었다. 예를 들어, 다음을 참고하라. Concluding Unscientific Postscript to Philosophical Fragments, pp. 14-15, KWXII.1 (SVVII 6).] 

따라서 기독교는 저 높은 곳을 날아가는 사상가들처럼 전제 없는 출발을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아첨하는 전제로도 출발하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이것을 전제하고 있음을 감히 부인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누군가 기독교를 오해할 수 있나요? 기독교는 세상의 지혜가 만장일치로―그러나 분열적으로―“누구나 자신에게 가장 가깝다(nærmest)”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으며, 자기사랑이 규범적 권리임을 선포하는 것이 기독교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반대입니다. 자기사랑(Selvkjerligheden)을 우리 인간에게서 빼앗는 것이 기독교의 목적입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의미하지만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는 경우, 이 명령은 마치 곡괭이처럼 자기 사랑의 뚜껑을 열어젖힌(vriste) 후에, 그것을 빼앗는(fravriste) 것과 같습니다. ‘네 자신 같이’라는 이 작은 문구는 다루기 쉬울 뿐 아니라, 영원의 탄력성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이 계명이 이 문구 말고 다른 식으로 표현된다면, 이 계명은 자기 사랑을 다룰 수 없습니다. ‘네 자신 같이’라는 이 말은 절대 그 목적이 흔들리는 법이 없습니다. 따라서 영원의 확고부동함으로 판단합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가장 깊은 은신처로 침투해 들어갑니다. 이 말은 자기사랑에게 어떤 추호의 변명도, 어떤 눈곱만큼의 탈출구도 남겨놓지 않습니다. 얼마나 놀라운지요!

사람이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해 길고 통찰력 있는 연설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연설이 들릴 때, 자기사랑은 변명을 생각할 수도 있고 탈출구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주제가 모든 환경을 고려할 정도로 완전히 파헤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무언가 항상 망각되었고, 충분히 정확하고 구속력 있는 방식으로 표현되고 설명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네 자신 같이”라는 이 계명, 네, 맞습니다. 어떤 레슬러도 이 계명이 자기 사랑을 꼼짝 못하게 하는 것만큼 상대를 꼼짝 못하게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때 자기 사랑은 눈곱만큼도 꼼짝달싹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자기사랑이 이 구절과 씨름할 때, 누구도 이 구절 때문에 골치아파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해하기 아주 쉽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사랑은 더 강한 자와 씨름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마치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고 난 다음 다리를 절뚝거렸듯,[#보기2 창세기 32: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자기사랑도 이 구절과 씨름했다면 부러졌을 것입니다. 이 구절은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지 말아야 함을 가르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올바른 자기사랑을 가르치려 하는 것이지요. 얼마나 놀라운지요!

자신을 보호하기위한 자기사랑의 투쟁이 얼마나 길고 끔찍하며 복잡한 투쟁입니까? 그런데도 기독교는 한 방의 타격으로 이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 모든 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집니다. 모든 것은 “순식간에 홀연히”[#보기3 고린도전서 15: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라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부활의 영원한 결정처럼 결정됩니다. 기독교는 사람은 자신을 사랑한다고 전제합니다. 그리하여 이웃에 대한 구절에만 “네 자신과 같이”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추가되기 전과 후 사이에는 영원의 변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최고가 되는 것일까요?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시인의 감동에서 나오는 이런 이야기가 세상에서 들립니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그렇게 높이 날아오를 수 없는 것일까요? 그리하여 비참하게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요구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걸까요(아마도 기독교가 단순하고 평범한 사람들에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기독교가 높이 날아오르는 사랑, 애인, 친구를 찬양의 대상으로 삼는 대신, 전혀 시적이지 않는 이웃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것 같습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확실히 어떤 시인도 찬양한 적이 없습니다. ‘자신 같이’ 사랑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과연 이것이 이럴 수 있나요? 혹은 명령받은 사랑(commanded love)과 비교하여 찬양받는 사랑(celebrated love)에 양보해야 하므로, 우리가 기독교의 상식과 삶에 대한 이해를 찬양할까요? 왜냐하면 기독교가 더욱 냉정하고 확고하게 이 땅을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속담이 “나를 조금 사랑하라, 오래 사랑하라.”라고 말한 것과 같은 의미이기도 합니다.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어떤 시인보다 사랑이 무엇이며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기독교는 시인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찬양하는 사랑은 은밀한 자기사랑임을 알고 있지요. 명확히 이것으로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한다는 이 도취된 표현이 설명될 수 있습니다.* 에로스 사랑(Elskov)은 아직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무한의 아름다운 현기증입니다. 이 사랑의 최고의 표현은 신비의 어리석음(Gaadefuldhedens Dumdristighed)입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더 어지러운 표현으로 설명하려 합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사랑하기” 이런 어리석음이 무엇보다 시인을 즐겁게 합니다. 그의 귀에 얼마나 달콤한 노래인지요. 이런 어리석음이 시인이 노래할 수 있도록 영감을 줍니다. 아, 그러나 기독교는 이것이 신성모독이라고 가르칩니다.

에로스 사랑처럼 편애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우정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즉, 다른 모든 사람보다 이 한 사람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대조적으로 그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에로스 사랑과 우정 모두의 대상은 편애의 이름을 가집니다. 즉, “애인”, “친구”이며, 온 세상과 대조적으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반대로, 기독교 교리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인류를, 모든 사람들을, 심지어 원수조차도 사랑하는 것이며, 편애든 혐오든 예외를 두지 않습니다.[#보기4 최종본에서 삭제된 것
여기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이 애인을 얻지 못했을 때처럼, 절망의 때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웃은 모든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연적 규정, 충동이나 경향성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한다. 즉, 반대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JP IV 4447 (Pap. VIII2 B 71:7) n.d., 1847]

영원의 진리 안에 있는 사람이 자신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이시니, 그분은 하나님뿐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하나님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은 순종하며(lydende) 무조건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경배하며(tilbedende) 그분을 사랑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감히 이런 식으로 자신을 사랑하거나, 다른 사람을 감히 이런 식으로 사랑한다면, 그것은 범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친구가 당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데, 당신이 정직하게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이 그에게 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그 요구의 성취를 거부함으로써 사랑하는 대신 순종함으로써 사랑한다면 당신은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당신에게, 그분의 대의에 해를 끼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당신은 무조건 순종하며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당신의 지혜와는 비교할 수도 없으며,[#보기5 로마서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당신의 지혜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아무런 책임의 의무가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사랑 안에서 순종만 하면 됩니다.

반면에 사람은―아니, 그것이 가장 높은 것이지만―사람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당신이 그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그보다 더 잘 인식 할 수 있다면, 당신은 변명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해로운 것은 그의 바람(desire)이었고, 그가 요구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적절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에게 해롭다는 통찰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요구했기 때문에 순종하며(lydende) 그것을 실천하거나, 그가 바랐기 때문에 경배하며(tilbedende) 행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렇게 행할 권리가 없습니다. 이렇게 행한다면, 당신은 책임을 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이 이런 식으로 당신과의 관계를 오용하기를 바란다면, 그가 책임을 집니다.

따라서 “네 자신 같이(som Dig selv)”입니다. 지금까지 살았던 사람 중에 가장 교활한 사기꾼을 생각해 봅시다. 혹은 우리가 원래 그의 모습보다 더 교활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가  율법을 많은 말로 장황하게 만들 수 있도록 해봅시다(그래야 사기꾼이 재빠르게 승리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가 시험하며 ‘최고의 법(kongelige Lov)’[#보기6 야고보서 2:8, “너희가 만일 성경의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에 대해 묻게 합시다. 그때 그는 “내가 어떻게 이웃을 사랑해야 할까요?”라고 묻습니다. 그러면 계명은 언제나 한결같이 “네 자신과 같이”라는 짧은 구절만을 반복할 것입니다.

사기꾼이 이 주제에 대해 온갖 장황한 말로 평생을 걸쳐 아무리 자신을 속인다 해도, 영원은 단순하게 “네 자신과 같이”라는 율법의 짧은 구절로 그를 대면하게 합니다. 참으로 아무도 이 계명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네 자신 같이”가 자기사랑에 대하여 가능하면 강하게 압박한다면, 그 무례함 속에서 이웃은 가능한 한 자기사랑을 위협하는 조항이 될 것입니다. 자기사랑은 이 조항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유일한 탈출구는 당시 바리새인이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시도했던 것입니다.[#보기7 누가복음 10: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즉, 이웃이 누구인지 의심하게 하여, 그를 자신의 삶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우리의 이웃(Næste)입니까? 이 말은 분명 “가장 가까운(Nærmeste)”에서 유래하였습니다. 따라서 이웃은 다른 사람보다 당신에게 더 가까운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편애하는 사랑의 의미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편애하는 사랑의 의미에서 다른 사람보다 더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도 이와 같이 하지 않습니까?”[#보기8 마태복음 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이웃은 다른 사람보다 당신에게 더 가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신 자신보다 당신에게 더 가까이 있나요?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만큼 가깝고, 그만큼 당신에게 더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보기9 최종본에서 삭제된 것; 그리고 이 이웃은 모든 사람이다. 그가 모든 사람이 아니라면, 편애는 이 정의에 일부이다. 이웃은 당신보다 더 뛰어난 자가 아니다. 더 뛰어나다고 해서 그를 사랑하는 것은 아주 쉽게 편애가 될 수 있으며 그 정도로 자기사랑이기 때문이다. 이웃은 당신보다 열등하지도 않다. 열등하다고 해서 그를 사랑하는 것은 아주 쉽게 편애의 교만이 될 수 있으며 그 정도로 자기사랑이기 때문이다. 아니,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평등을 의미한다. 뛰어난 사람과 관계할 때, 당신이 감히, 감히 그를 이웃으로 사랑해야만 하는 것은 고무적이다. 열등한 사람과 관계할 때, 그를 열등한 사람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이웃으로 사랑해야만 하는 것은 겸손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모두를 당신 자신 같이 사랑해야 한다.―JP IV 4447 (Pap. VIII2 B 71:9) n.d., 1847]

‘이웃’의 개념은 실제로 당신의 자기의 중복(Fordoblelsen)입니다. ‘이웃’은 사상가들이 “타자”[#보기10 ‘이웃’은 사상가들이 타자라고 부르는 것인데, 개념의 발전이 ‘존재’(Dasein)의 범주로 이어지고, 이것이 다시 ‘어떤 것’(Etwas)으로 결정된다는 헤겔의 《논리학》을 암시한다. 모든 어떤 것은 그 부정인 ‘타자’(das Andere)와 관계함으로써 결정성을 획득하고, 타자가 어떤 것에 의해 상응하여 결정되는 것처럼, 어떤 것은 타자에 반영되는 한도 내에서만 자신에게 반영되며, 어떤 것은 타자의 결정된 타자이다. 모든 어떤 것은 두 순간, 즉 ‘자체존재’(An-sich-Sein)와 ‘타자를 위한 존재’(Sein-für-Anderes)의 통일이다.]라고 부르는 것으로, 타자에 의해 자기사랑에서의 이기심은 시험을 받아야 합니다. 추상적 사유에 관한 한, 이웃은 존재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무인도에 살고 있는 사람이 이 계명을 따라 마음으로 순응한다면, 자기사랑을 포기함으로써 그는 이웃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확실히 ‘이웃’은 그 자체로 다수성을 의미합니다. ‘이웃’은 ‘모든 사람’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도 다른 의미에서 당신이 율법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한 사람이면 충분합니다. 이기적인 의미에서, 자기(self)가 되면서 둘로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기사랑은 홀로 있어야 합니다. 셋도 가질 수 없습니다. 둘이 존재한다면, 다시 말해,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당신이 ‘자신 같이’ 사랑하거나 이웃을 사랑하는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면, 당신은 모든 사람을 사랑합니다.[#보기11 이후에 나오는 구절은 다음을 참고하라. 최종본에서 삭제된 것; 열정적으로 편애를 인식할 때, 사랑받는 자는 상대방(the other person)이거나 친구이다. 평등의 진지함과 진리에서, 이웃은 상대방이다. 그 사람이 상대방이라면, 수천 명이든 오직 한 명뿐이든 아무런 차이가 없다.―JP IV 4447 (Pap. VIII2 B 71:10) n.d., 1847]

그러나 자기사랑이 무조건적으로 견딜 수 없는 것이 중복입니다. ‘네 자신 같이’라는 계명이 중복입니다. 그 이유나 열정 때문에 에로스 사랑으로 불타는 사람은 중복을 견딜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중복은 에로스 사랑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연인이 그것을 요구한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연인을 ‘자신 같이’ 사랑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네 자신 같이’라는 말은 오히려 그에 대한 요구를 담고 있습니다. 아, 그런데도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자신보다 더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이웃’은 가능한 한 자기사랑에 가까워집니다. 두 명의 사람만 있다면, 다른 사람은 이웃입니다. 수백만 명의 사람이 있다면, 이들 중에 누구나 이웃이며, 결과적으로 친구와 연인보다 더 가깝습니다. 그들이 편애의 대상으로 자기사랑과 거의 하나로 묶여 있더라도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이웃의 존재를 알고 있으며, 자신과 관련하여 특권 있다고 생각하거나 그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그는 아주 가깝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을 갖고 있는 사람이 “나의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으면, 바리새인에게 했던 예수님의 저 대답은 단 하나의 방식에서만 대답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대답에서 질문은 실제로 뒤집혀서 그 의미는 다음과 같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어떻게 질문하는가?

 

즉, 자비로운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에게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눅 10:36)라고 말씀하시자 바리새인은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올바르게 대답합니다. 즉, 자신의 의무를 알면, 이웃이 누구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대답은 그리스도의 질문에 담겨 있으며, 그 질문의 형식에 따라 바리새인은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의무를 가진 사람은 내 이웃입니다. 내가 의무를 다할 때 내가 이웃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웃을 아는 것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웃이 되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 사마리아인이 자비로 보여준 것처럼 자신이 이웃임을 보여주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로써 그는 폭행당한 사람이 자신의 이웃이 아니라, 그가 폭행당한 사람의 이웃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레위인과 제사장은 엄밀한 의미에서 피해자의 이웃이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무시하고 싶었습니다. 반면에 사마리아인은 편견 때문에 오해하기 쉬운 경향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폭행당한 사람의 이웃이라는 것을 올바르게 이해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하고 친구를 찾는 것은 복잡한 일이지만 이웃은 개인적으로 자신의 의무를 인정한다면 쉽게 알아볼 수 있고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계명은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말하지만, 계명을 제대로 이해하면 그 반대의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즉, 올바른 방법으로 너 자신을 사랑하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기독교에서 올바른 방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려는 사람은 이웃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는 아마도 다른 사람이나 몇 명의 다른 사람과 “삶에서와 죽음에서(i Liv og Død)”[#보기12 일반적으로 충성 서약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고정 문구. “살아 있을 동안에도, 죽은 후에도”를 뜻한다.] 함께 지낼 수 있지만 이것은 결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올바른 방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서로 완벽하게 일치하며, 근본적으로 둘은 하나이며 동일한 것입니다. 율법의 “네 자신과 같이”가 슬프게도 기독교가 모든 사람 안에 있어야 한다고 전제해야 하는 자기 사랑을 박탈했을 때, 당신은 실제로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를 수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할 때,
네 이웃을 사랑하듯 네 자신을 사랑하라.

 사람들에 대한 지식을 있는 자는 누구나 이따금 그들에게 자기사랑을 포기하도록 도와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들에게 자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가르칠 수 있기를 바랄 수 있음을 분명 인정할 것입니다.

분주한 사람이 쓸데없고 하찮은 일에 시간과 힘을 낭비한다면, 이는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올바르게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경솔한 사람이 그 순간의 어리석음에 자신을 내던져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자신을 포기했다면, 이것은 자신을 올바르게 사랑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 아닙니까?

우울한 사람이 삶을 없애고 싶어할 때, 실제로 자신을 없애고 싶어할 때, 이것은 그가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진지하고 엄격하게 배우기를 꺼려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세상이나 다른 사람이 매정하게 배신했기 때문에 누군가가 절망에 빠진다면, 올바른 방법으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 외에는 그의 잘못(여기서는 그의 무고한 고통은 언급되지 않음)이 무엇입니까?

누군가 자신을 학대하며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 자학적으로 생각할 때,[#보기13 요한복음 16:2,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올바른 방법으로 자신을 기꺼이 사랑하지 않는 것 외에는 그의 죄가 무엇입니까?

아아, 어떤 사람이 건방지게 폭력적으로 자신의 목숨에 손을 대려한다면, 사람이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자신을 올바르게 사랑하지 않는 것, 바로 이것이 그의 죄가 아닙니까?

오, 세상에는 배신과 불신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도우소서. 이것은 너무나 확실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우리 각자는 자신 속에 가장 위험한 배신자를 간직하고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이 배신은 이기적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든 이기적으로 자신을 올바른 방식으로 사랑하지 않으려는 것이든, 누구나 인정하듯 이 배신은 분명히 비밀입니다. 이런 배신과 불신의 경우,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교리인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지요. 다시 말해,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얼마나 더 중요한지요.

**따라서 이웃에 대한 사랑의 계명은 이 이웃 사랑에 관해서와 자신을 사랑하는 일에 관해서 하나이면서 같은 문구인 ‘네 자신 같이’란 말로 표현합니다. 이제 이 강화에 대한 소개가 고찰의 대상으로 삼고 싶어했던 곳에 이르렀습니다. 다시 말해, 이웃을 위한 사랑에 대한 계명과 자신을 사랑해야 하는 계명은 “네 자신 같이”라는 구절뿐 아니라 ‘하라’는 구절을 통해 동의어가 됩니다. 우리는 이제 다음에 대해 말해야 합니다.

사랑하라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기독교 사랑의 특징이며, 뚜렷하게 구별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러한 분명한 모순을 포함하고 있는데, 사랑하는 것이 의무라는 것이지요.[#보기14 최종본에서 삭제된 것; 그리고 이웃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아는 것, 동일한 것으로, 누구나 이웃이라는 것, 사랑하는 것이 의무가 아니라면, “이웃”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 바로 이 기독교의 사랑이다.-JP IV 4447 (Pap.VIII2 B 71:12) n.d., 1847]

 

“사랑하라”―이것은 최고의 법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독자, 이 말씀이 선포되기 전 세상의 상태에 대한 개념을 형성할 수 있었다면, 혹은 자신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부르지만 실제로는 이교도의 개념을 갖고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과 생각을 주의 깊게 본다면, 이 기독교 명령과 관련하여, 다른 모든 기독교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 것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어날 수 없는 것임[#보기15 고린도전서 2: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배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을 믿음의 놀라움으로 겸손하게 고백할 것입니다.

이전의 유대교에서 그리고 기독교의 1800년 동안 이것이 명령된 후에, 이제 모든 사람들이 이 속에서 구조화되고, 영적인 의미에서 부유한 부모의 집에서 자란 사람처럼 되었을 때, 그들은 일용할 양식이 선물이었음을 거의 망각하게 되었지요. 건강식품이 배고파본 적이 없는 과자를 좋아하는 사람들에 의해 경멸당하듯, 이제 기독교는 이따금 모든 종류의 신기한 것들을 좋아하는 환경 속에서 자란 사람들에 의해 종종 경멸당했습니다. 이제 기독교는 이미 알려진 것으로, 이미 주어진 것으로 전제되었으며,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보기16 예를 들어 다음을 보라. Fear and Trembling, pp. 5, 9, 23, 32-33, 37, 69, 88, 121, 123, KW VI (SV III 57, 62, 75, 84, 88, 118, 136, 166, 168); Fragments, pp. 111, KW VII (SV IV 272).] 그렇게 암시되어야 했습니다. 이제 이 사랑의 법은 모든 사람들에 의해 자연스레 반복되었습니다.

 

* 최종본의 여백에서 삭제된 것;
에로스 사랑의 토대는 충동이다. 우정의 토대는 경향성이다. 그러나 충동과 경향성은 자연적 규정이고, 자연적 규정은 언제나 이기적이다. 영의 영원한 규정만 이기적인 것을 쫓아낸다. 따라서 에로스 사랑과 우정 속에 숨겨진 자기사랑이 있다. 소녀가 한 사람만을, 온 세상에서 한 사람만을 사랑할 때(시인이 듣고 찬양하기를 즐겨하는 것), 이것이 에로스 사랑이다. 그러나 이 에로스 사랑은 편애(preference)를 나타내는 가장 생생한 표현이다. 소녀든 에로스 사랑이든 이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해도, 자기사랑은 편애하는 사랑(preferential love) 속에 숨겨져 있으며, 특별히 이 사랑이 열렬할 때 더욱 그렇다. 무조건적이면서 충동적인 편애로 한 사람과 관계하는 것은 자기사랑에서 자신과 관계하는 것이다. 이런 편애 속에는 자신의 의지를 마음대로 쓰고자 하는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 완고함이 내포되어 있다. 이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편애와 도취의 만족감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결국 자기사랑의 만족감이다. 이것이 거부될 때 절망하는 것은 에로스 사랑이 자기사랑이라는 바로 그 증거이다.
그러나 분명 이것이 에로스 사랑을 벗어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아찔한 표현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기” 아, 사랑하는 사람이 아직도 진리로, 영원의 진지함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JP IV 4447 (Pap. VIII2 B 71:6)

** 이후의 단락은 다음을 참고하라. 원고에서;
여기에서 이 강화는 고려의 대상을 만들고자 하는 지점에서 멈추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자신을 사랑하라는 계명과 동의어처럼 보인다. 우리의 목표는 이웃을 위한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반대로, 우리는 다음에 대하여 말하길 바란다.
사랑이 의무라는 것,
우리가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
왜냐하면 기독교 사랑의 이런 독특한 특징은 이 명백한 모순, 즉 사랑은 의무라는 사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웃이 존재한다(er til)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이런 종류의 사랑뿐이다. 이것은 하나이면서 같다. 즉, 누구나 이웃임을 발견하는 것이 이 사랑이다. 사랑하는 것이 의무가 아니라면,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어떤 질문도 있을 수 없다. “이웃”이라는 개념은 의무로 사랑하는 것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에로스 사랑도, 우정도, 다른 어떤 종류의 사랑도 이 개념(이웃)과 일치할 수 없다. 오직 의무인 사랑만이 이 개념과 일치한다.―JP I 943 (Pap. VIII2 B 30:4) n.d.,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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