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질적 도약의 의미
하프니엔시스에게 최초의 죄는 질적으로 다른 죄다. 최초의 죄는 질적 결정성(en kvalitativ(Qualitetens) bestemmelse, the nature of quality)을 이룬다. 이것이 최초의 죄의 비밀이다(Denne er det Førstes Hemmelighed). 이것은 추상적인 상식(abstract common sense)에게는 실족(offense, Forargelse)이다. 새로운 질은 최초의 것, 비약(leap), 수수께끼의 돌발로 나타난다.
헤겔 역시 “도약(leap)”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에게서 도약이란 양(quantity)에서 질(quality)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그에게서 이런 도약은 갑작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의 점진적 변화를 포함한다.
예를 들어 물의 온도이다. 물의 온도가 점점 더 내려가다가 일정 시점에 이르면 물은 얼음으로 바뀐다. 또한 물의 온도는 점점 더 상승하다가 일정 시점이 되면 수증기로 바뀌면서 상태의 변화가 발생한다. 이러한 변화는 점진적으로 일어나기 보다는 어떤 시점에서의 갑작스런 도약에 의해서 발생하는 변화라는 것이다. 일종의 티핑포인트(tipping point)와 같다. 양이 일정 시점까지 쌓일 때까지는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다가 갑자기 어느 시점에서 질적 변화가 일어난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것이 헤겔이 말하는 양에서 질로의 이행이다.
그러나 하프니엔시스는 이런 헤겔의 의견에 반대한다. 하프니엔시스에게 죄는 “질적 비약(qualitative leap, Qualitetens Spring)”으로만 나타난다. 죄가 질적 비약에 의해 들어온다는 것은 “양에서 질로의 변화”가 아니라, “질에서 새로운 질”로의 이행이다. 바로 이 “이행”이 도약이다. 또한 이런 도약은 논리학에서는 불가능하다. 논리학은 필연에 의해 발생하는 반면, 이 도약은 자유에 의해 발생하기 때문이다. 덕에서 악으로의 이행은 양적인 과정이 아니다.
물에 열을 가할 때, 1도의 상승은 거의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양에서 질로의 변화에서 “하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죄에서는 완전히 개념을 달리한다. “최초의 죄”는 단 하나의 죄일지라도 질적으로 전혀 다른 이행에 해당된다. 최초의 죄는 질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따라서 티핑포인트라든지, 물의 온도 상승이나 하강에 의한 상태적 변화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변화다.
“질적 도약”은 하프니엔시스가 원죄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 개념으로써, 죄는 죄성에 의해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질적 비약에 의해 들어온다. 전통적인 개념에서는 아담의 죄는 최초의 죄로 결과로서 죄성(sinfulness)을 결정짓는 반면, 이후의 인간의 최초의 죄는 상태로서 죄성을 전제한다. 하지만 이런 전통 신학적 해석은 상당한 문제를 야기한다. 이 문제가 가장 명확히 드러나는 지점이 속죄의 개념이다.
전통신학에 따르면, 속죄가 필요한 이유는 죄성이라 말할 수 있는 “유전죄” 때문이다. 그러나 아담은 최초의 죄를 졌으나 유전죄는 없다. 따라서 모든 사람에게 속죄가 필요하나 아담만은 속죄에서 제외된다. 하프니엔시스는 이런 문제를 전통신학은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통신학은 이후의 인간은 죄성이 먼저 들어오고 죄성에 의해 죄가 탄생되었다고 보고 있으나 하프니엔시스는 이와 같은 주장을 “윤리적 이단”이라고까지 말한다.
아담과 이후의 인간은 똑같은 사람이다. 따라서 이런 전통신학의 문제를 제기하고 하프니엔시스는 나름대로의 죄의 문제를 전개한다. 바로 그것이 질적 도약의 개념이다. 최초의 죄는 오직 질적 도약에 의해 세상에 들어온다. 아담의 최초의 죄로 인해 죄게 세상에 들어오고 죄성이 생기듯, 이후의 사람도 동일하게 아담처럼 최초의 죄에 의해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성이 생긴다.
-
죄성의 의미
최초의 죄에 의해 죄성이 생긴다. 죄성은 아직 죄를 지은 상태는 아니지만, 죄의 가능성이고 죄를 지으려는 성향과 관련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질적인 개념이 아니라, 죄성은 양적 개념이다. 하프니엔시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류는 모든 개인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지 않으므로, 인류의 죄성은 역사를 획득한다. 이것은 양적 결정성(규정, determination)으로 진행되는 반면, 개인은 질적 비약에 의해 역사에 참여한다.”
개인은 사회 속에서 죽고 다시 태어난다. 마치 나무에서 나뭇잎이 싹이 났다가 죽고 다시 나뭇잎이 나듯이, 개인은 사회 속에서 죽고 다시 태어난다. 하지만 개인은 죽어도 사회는 죽지 않는다. 다만, 사회는 그런 개인들의 역사의 총합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류는 개인과 함께 새로 시작하지 않고 양적인 의미에서 죄성의 역사성을 갖는다. 하지만 각각의 개인은 자기의 최초의 죄로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성을 갖는다. 따라서 죄가 질적인 범주라면, 죄성은 양적 범주에 해당된다. 그리하여 죄성은 역사성을 지닌다. 2장과 연결하여 설명한다면, 양적 범주로서의 죄성은 어떤 “객관적 불안”을 일으킨다. 인류의 역사가 거듭할수록, 이것은 일종의 역사 속에서 학습된 불안이다.
-
결론: 아담과 같은 방식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온다.
나는 이 결론이 결국 로마서 5장 12절에 대한 주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여기에서 말하는 “한 사람”은 당연히 아담을 말하는 것이다. 이미 언급했던 대로, 전통신학에서 아담은 “수장”이다. 어거스틴처럼 자연적 수장이든, 개혁신학자들처럼 연합적 수장이든, 하프니엔시스는 이런 의견을 거부하고 위의 성경구절에서 “이와 같이”를 아담처럼 죄가 세상에 들어온다고 해석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이런 의견에는 전통신학이 그토록 주장했던 죄의 “전가(imputation)” 개념은 사라진다.
'두 번째 시기의 작품'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타르퀴니우스 스페르부스 (0) | 2022.03.13 |
---|---|
피론주의 개요 (0) | 2021.09.27 |
원죄에 대한 사회학적 문제/불안의 개념 (0) | 2020.10.12 |
전통 신학의 문제 (0) | 2020.10.07 |
원죄는 정말 아담의 죄일까? (0) | 2020.10.0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