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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시기의 작품

원죄에 대한 사회학적 문제/불안의 개념

by 엉클창 2020. 10. 12.

 

  1. 불안의 개념 역사적 소개 보기 
  2. 불안의 개념 소개
  3.  원죄는 정말 아담의 죄일까?
  4. 전통신학의 문제
  5. 원죄의 사회학적 문제

“개인은 그 자신이며 동시에 인류이다.”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면, 이 말은 원죄에 대한 사회학적 측면의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보인다. 키르케고르와 비슷한 시기에 서구 사상의 핵심적인 측면은 “사회는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물음에 대답하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사상가로, 헤겔, 루소, 마르크스가 있다. 세 사람의 공통점이 있다면, 사회 문제를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제공한 사상가들이다. 

키르케고르가 비판했던 대표적인 사상가는 헤겔(1770~1831년)이었다. 헤겔의 관심은 언제나 사회에서의 개별과 보편의 문제였다. 헤겔의 변증법을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개별과 보편의 운동이고, 개별과 보편의 통일의 문제였다. 개인은 맹목적이고, 자신의 욕망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며 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규범과 법을 지키고 살아야 한다. 

루소(1712~1778년) 역시 마찬가지이다. 루소의 “일반의지”의 실현이었다. 루소는 의지를 개별의지, 전체의지, 개별의지로 나누었다. 개별의지는 자기중심적인 의지이고, 이기심에 기초한 의지이다. 전체의지는 이런 개별의지를 지닌 개인들이 다수결에 의해 도출된 의지이다. 따라서 다수결은 폭력적일 수 있다. 하지만 일반의지는 자기의 이기적인 욕심을 따라 사는 개인이 아닌, 공동체의 이익을 생각하며 사고하는 개인의 의지를 말한다. 이런 일반의지를 지닌 개인들의 총합이 거시적인 의미에서의 일반의지고 바로 이것이 주권이라고 생각했다. 

마르크스(1818~1883년)는 사회의 계층구조를 크게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나누었다. 그는 특히 자본주의의 지배계급의 지배구조를 비판했는데, 자본주의는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에 의해 생산된 잉여가치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불평등 현상이 더 심화될 것으로 보았고, 이와 같은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피지배계급의 혁명과 저항뿐이라고 생각하였다. 공교롭게도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을 한 때와 키르케고르가 기독교 강화를 출판한 때는 같은 해인 1848년이었다. 

1933년에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가 쓴 글에 의하면, 그 당시에 주류 사상가들이 “사회는 어떻게 가능한가?”의 질문에 대답했다면, 유일하게 키르케고르는 “인간 존재는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해 대답했다는 것이다. 

「불안의 개념」에서의 “개인은 자기 자신이면서 인류이다”라는 하프니엔시스의 견해는 바로 이런 상황에서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에 대한 대답이었다. 따라서 원죄의 문제는 이런 사회학적 차원의 문제가 내재되어 있다. 

나무와 나뭇잎과의 관계를 예를 들어보자. 개인이면서 인류인 문제는 마치 나무와 나뭇잎과의 관계와 같다. 사회는 마치 나무와 같고 나뭇잎은 사회 속에서의 한 개인과 같다. 나뭇잎 하나가 땅에 떨어진다 해도, 그리하여 수많은 나뭇잎이 땅에 수북이 쌓인다 해도, 나무는 여전히 존속하고 있듯이, 사회 속에서 한 개인이 죽고 역사 속에서 사멸해갈 지라도 사회는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사회를 떠난 개인은 생각할 수도 없다. 이렇게 인간의 실존은 근본적으로 개인과 사회라는 이 구조를 벗어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개인으로서 “자기 자신과 인류는 하나의 상태로서 간주되는 인간의 완전성이다.”

문제는 전통신학에서처럼 원죄는 오직 아담한테 있고 이후의 인간은 죄성을 물려받는다면, 다시 말해, 아담에게는 먼저 죄를 범하고 죄성이 들어오는 반면, 이후의 인간에게는 죄성이 먼저 들어오고 죄를 범한다면, 아담은 인류와 다른 전혀 이질적인 존재가 되고 만다. 인류와는 전혀 다른 출발점을 갖는 개인이다. 이를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말한다면, 사회는 한 개인의 기여에 의해 발전하고 사회 역시 한 개인에 기여함으로써 역사를 갖는 갖게 되지만, 이 경우 아담은 이런 “상태로서 간주되는 인간의 완전성”에 전혀 기여하지 못하는 인간이다. 

상태로서 간주되는 인간의 완전성이란 이것이 인간 실존의 근본적 구조다. 이것은 개인과 사회의 조화의 문제이며, 지배와 피지배의 문제이다. 인간의 존재는 오직 이런 “긴장(tension)” 속에서만 가능하다. 루소의 말로 옮긴다면, 개인으로서의 삶과 시민으로서의 삶의 긴장 속에서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이것이 키르케고르가 생각하는 완전성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이 부분에 대하여는 다음 시간에 살펴보도록 하겠다. 

youtu.be/pcPc1AtBNJ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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