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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시기의 작품

피론주의 개요

by 엉클창 2021. 9. 27.

 

<철학의 부스러기> 중에 "절대적 역설"에 나오는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에 대한 자료 올립니다. 
네이버 <고전 해설> 자료에서 발췌

피론주의 개요

[ Πυρρνειοι ὑποτυπσεις ]

섹스토스(Σέ́ξτος μπειρικό́ς, 2세기-3세기)
그리스
철학
오유석(백석대학교 기독교학부 기독교철학전공 조교수)

철학사를 돌이켜볼 때, 많은 철학자들에게 회의주의는 극복의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심지어 명석 판명하지 않은 모든 것을 의심하고자 했던 데카르트도 자신의 회의를 절대적 회의가 아니라 방법적 회의라고 불렀다. 하지만 헬레니즘 시대 희랍에서는 회의주의가 주요한 학파 중 하나로 활약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고대 희랍에서 회의주의가 어째서 등장했고, 어떤 논변을 펼쳤는지 밝혀야 한다. 이때 우리에게 가장 큰 도움을 주는 자료가 바로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저작이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고대 희랍의 회의주의를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다. 그의 저작이 1562년에 현대적으로 편집되기 전까지, 우리는 오직 키케로의 저작을 통해서만 고대 회의주의(주로 아카데미아 학파의 회의주의)에 대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16세기 이후 철학자들은 섹스투스를 통해서 회의주의뿐 아니라 독단주의 철학(가령 스토아 철학)에 대해서도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데이비드 흄은 섹스투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이처럼 섹스투스가 철학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섹스투스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그가 회의주의 철학자이자 의사였다는 것뿐이며, 우리는 아마도 그가 2세기 후반부에서 3세기 초까지 알렉산드리아와 아테네에서 활약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섹스투스의 저작 중, 고대 회의주의를 요약해서 설명한 것이 바로 ≪피론주의 개요≫다. ≪피론주의 개요≫는 전체 3권으로 이루어진다. 1권에서 섹스투스는 ‘피론주의’가 무엇이며 다른 철학과 어떻게 다른지 논의하는 한편, 2권과 3권에서는 독단주의자들의 여러 입장들을 논파하고 있다. 섹스투스의 저작은 우리에게 고대 희랍의 회의주의가 어떤 것이었는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줄 뿐 아니라, 헬레니즘 시대의 다른 철학자들(특히 스토아 철학)에 대해서도 주요한 전거가 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어째서 자신의 입장을 피론주의라고 명명했을까?

‘피론주의’라는 말은 엘리스 출신의 철학자 피론(BC 365∼BC 275년경에 활동)의 이름에 따라 지어진 용어다. 다시 말해 섹스투스는 피론주의의 창시자가 피론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물론 피론이 실제로 회의주의자였는가에 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여하튼 피론주의자들은 우리가 외부 대상의 실제 모습에 대해 정확한 앎을 획득할 수 없으므로, 외부 대상에 대해 일체의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우리는 마음의 평안(ataraxia)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섹스투스에 따르면 자연 탐구의 길은 크게 셋이다. 우선 독단주의자는 참된 앎이 획득 가능하다고 주장하나, 자신이 진리를 발견했다고 단언함으로써 탐구의 길을 중단했다. 반면 아카데미아 학파의 회의주의자는 진리가 획득 불가능하다고 주장함으로써 부정적 독단주의에 빠진다. 만약 아무것도 알 수 없다면 탐구를 해야 할 이유가 없다. 마지막으로 피론주의자는 독단주의에 빠지지 않고, 진리 발견의 가능성을 계속 모색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섹스투스가 회의주의를 두 부류로 나누고 있다는 점이다. 즉 그는 자신의 피론주의를 아카데미아 학파의 회의주의와 차별화하고자 했다. 우리는 두 학파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개괄적인 설명을 제시할 수 있다.

먼저 아카데미아 학파의 회의주의에 대해 살펴보면, 피타네 출신의 아르케실라오스(BC 315∼BC 240)가 아카데미아의 수장이 된 후, 그는 아카데미아 학파의 철학을 회의주의로 변모시켰다. 아마도 그는 플라톤의 사후 아카데미아의 탐구 정신이 점차 독단주의로 변질되고 있음에 불만을 느껴서, 독단주의자들을 비판하는 데 주력했던 것 같다. 이때 아르케실라오스가 사용한 방법은 소크라테스의 논박술(elenchos)과 유사하다.

아르케실라오스는 소크라테스의 논박술을 통해 독단주의자들(특히 스토아 철학자들)을 논파함으로써 이들의 탐구 정신을 회복시켜주려 했다. 아르케실라오스의 논변은 정치하고 매력적이었지만, 많은 이들은 플라톤 철학이 회의주의였다는 데 동의하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아르케실라오스의 주장은 아카데미아 내에서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아카데미아 학파의 회의주의가 완성된 것은 대략 1세기 후 카르네아데스(BC 214∼BC 129)에 와서다. 하지만 그의 제자들은 회의주의자의 논변이 전적으로 대인논증(ad hominem)인지 아니면 회의주의자 자신도 믿음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 논쟁을 벌였고, 급기야 기원전 90년대 혹은 80년대에 아카데미아의 주요 인물이었던 안티오코스가 스토아 학파로 전향하기에 이른다. 결국 아카데미아 학파와 스토아 학파 사이의 논쟁은 스토아 학파가 스토아 학파와 싸우는 꼴이 되었다.

이런 이유로 기원전 1세기경 아이네시데모스는 이제 아카데미아 학파 내에서 회의주의를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보다 급진적인 회의주의 운동을 시작하고자 했다. 아마도 그는 아카데미아 학파의 전통 하에서는 회의주의 철학이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피론을 시조로 하는 새로운 회의주의 철학을 만들었는데, 바로 그것이 피론주의다. ≪피론주의 개요≫에서 섹스투스는 기존의 철학을 비판하고, 한마디로 말해 철학의 틀을 완전히 새로 짜고자 했다.

하지만 우리는 회의주의자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과연 외부 세계에 대해 모든 판단을 유보하는 일이 도대체 가능한가? 감각에 대해 판단을 유보하는 회의주의자는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가? 또한 회의주의자는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믿는가? 만약 자기 주장이 옳다고 믿을 경우 회의주의자는 독단주의에 빠지며, 옳다고 믿지 않을 경우 그는 자신의 행동 방식이 성공할 것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납득시킬 수 없다.

≪피론주의 개요≫에서 섹스투스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회의주의자의 답변을 제시한다. 이에 따르면, 회의주의자는 외부 대상의 본성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독단적인 믿음을 가지지 않지만, 자신의 감각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비독단적인) 믿음을 가질 수 있다. 가령 내 눈앞에 보이는 파란 책이 사실은 흰 책 겉에 파란 표지를 포장한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 내 감각이 참임을 보장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그 책이 나에게 파랗게 보였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이렇게 볼 때, 회의주의자를 보통 사람과 구별해 주는 것은 믿음의 내용이 아니라, 믿음에 대한 태도다. 즉 보통 사람은 자신의 믿음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고자 하기 때문에 항상 걱정하는 반면, 회의주의자는 이러한 독단적 태도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걱정할 것이 없다.

물론 회의주의자도 모든 근심, 걱정에서 해방된 것이 아니며, 배고픔과 목마름 등을 느낀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배고픔이나 목마름이 본성적으로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욱 고통을 받지만, 회의주의자는 그런 독단적 믿음을 가지지 않는다. 결국 인간의 모든 고통은 외부 세계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섹스투스는 마치 좋은 약을 처방했을 때 병이 치료되듯이, 우리가 외부 대상에 대한 독단적 판단을 유보할 때 우리 마음이 안정과 평화를 얻게 된다고 주장한다. 물론 정말로 섹스투스가 주장하듯이 마음의 평안이 판단 중지에 자연스럽게 수반하는가는 우리가 앞으로 검토해 보아야 할 과제다. 결국 ≪피론주의 개요≫는 바람직한 삶이 어떤 것인지에 관해 회의주의자의 관점에서 논의하고 있으며, 회의주의자도 일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피론주의 개요≫는 총 3권으로 구성된다. 제1권은 회의주의를 정의한 후 다른 학파와의 차이점을 논의하고 있으며, 제2권부터 제3권까지는 독단주의 학파(특히 스토아 학파)의 철학적 견해를 세 분과(논리학, 자연학, 윤리학)로 나누어 조목조목 논파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피론주의 개요 [Πυρρνειοι ὑποτυπσεις] (고전해설ZIP, 2009. 5. 10., 지식을 만드는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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