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프니엔시스는 원죄에 대한 전통적인 신학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입증하기 위해 몇 개의 라틴어 인용으로 되어 있는 신조들을 제시한다. 그는 먼저 무언가를 설명하기 위해 가톨릭 신학에서 주장하는 바를 인용한다. 가톨릭 신학은 변증법적-환상적 전제(dialectic-fantastic presupposition)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아담의 타락의 결과로 인해 하나님께 부여받은 초자연적이고 놀라운 선물(donum divinitus datum suprana turale et admirabile)을 상실했다는 전제다.
반면 계약신학(federal theology)은 역사적-환상적 전제(historical-fantastic presupposition)를 제시했다. 개혁주의 전통 속에 있는 계약신학은 행위계약과 은혜계약으로 구분하고, 아담을 인류의 역사적 “연합”의 머리로 본다. 따라서 이 학설은 연합적 수장설(federal headship)로 불린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아담은 “행위 계약” 안에서의 인류의 대표다.
말이 나온 김에 조직신학적인 이슈를 더 살펴보면, 어거스틴의 유산을 이어받고 있는 일군의 신학자들은 연합적 수장이 아니라, 자연적 수장설(natural headship)을 주장한다. 그들은 우리 모두는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에 아담 안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복잡한 논의보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면, 이들은 영혼유전설을 근거로 들고 있지만 죄가 마치 생물학적으로 DNA에 내재되어 있는 것과 같다.
이런 주장들은 이후에도 신학자들 사이에서 굉장한 논란이 있었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아담은 인류 전체인가, 아니면 각각의 개별적인 인간인가 하는 논란이다. 아마도 하프니엔시스는 이론 논란에 대해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 마디로, 하프니엔시스는 가톨릭 신학은 자기들이 소설처럼 구성한 것을 잘 해명한 것이고, 계약신학은 아무 것도 설명할 수 없는 소설을 쓴 것이라고 비판한다.
여기에서 하프니엔시스는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유전죄(hereditary sin)”의 개념은 최조의 죄(the first sin)의 개념과 다른가? 특별한 개인은 자신과의 근원적 관계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아담과 자신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유전죄에 참여하는가?
이 질문은 상당히 중요하다. 독자들은 이미 밝혔다시피, 여기에서 원죄와 유전죄를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이 좋다. 원죄는 어쩌면 과거의 죄고, 최초의 죄이다. 이에 반해, 유전죄는 과거의 죄가 아니다. 유전죄는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죄”이다. 따라서 이것은 현존하는 것이고, 또한 “죄성(sinfulness)”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원죄와 유전죄를 분리하여 설명하면, 최초의 죄인 원죄는 아담의 죄이고, 이것은 과거의 죄이다. 하지만 전통 신학적 입장에서 보면, 유전죄는 죄성이고, 아담에게는 발견되지 않는 죄이지만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에게는 발견되는 죄이다. 이런 방식으로 아담은 인류와는 전혀 다른 존재의 인간이 되고, 인류 밖에 존재한다. 죄와 죄성과의 관계로 설명하면, 아담은 먼저 죄가 발생하고 이후에 죄성이 들어온다. 하지만 이후의 인간에서는 죄성이 먼저 들어오고 이후에 죄가 발생한다. 바로 이것인 하프니엔시스가 첫 번째로 제기하는 전통 신학의 문제이다. 사람들은 아담의 죄를 설명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아담의 죄의 결과로서 유전죄만을 설명하려고 한 것이다.
여기에서 정통 신학의 두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로, 전통신학의 설명대로라면 아담은 인류가 아니라 인류 밖에 선다는 것이다. 아담은 최초의 죄인 원죄를 범했지만, 아담에게는 유전죄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담 이후의 인간들은 원죄는 존재하지 않지만, 유전죄가 존재한다.
이것을 다르게 설명하면, 아담은 죄를 먼저 범하고 죄성이 그 다음에 들어온다. 하지만 그 이후의 인간은 죄성이 먼저 들어오고 죄를 그 다음에 범한다. 이런 방식으로 아담은 인류가 아니라, 인류가 아닌 이질적 존재로 머문다. 예를 들어, 동물이 종이 다른데, 같은 동물일 수 없듯이, 아담이 인류 밖에 있다는 것은 아담은 인간이 아닌 이질적 존재이다. 따라서 원죄에 있어서도 아담과 이후의 사람은 동일한 방식으로 죄가 생성되고 동일한 방식으로 죄성이 들어와야 한다.
둘째로, 자유와 책임의 문제가 있다. 하프니엔시스가 그토록 유전죄와 씨름한 이유가 무엇일까? 인간이 전통적인 교리처럼 죄 가운데 태어나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성향을 지닌 존재로 태어난다면, 죄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법적으로 정당방위에 의한 살인과 고의적 살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범법자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싸우다 의도하지 않는 살인을 저지른 경우는 형량이 무겁지 않다. 이에 반해, 고의적으로 사람을 죽인다면, 형량이 아주 무겁다. 법은 범죄자의 죄를 지으려 했던 “의지”를 중요한 판단의 요소로 보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이 아담 이후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태어난다면,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하프니엔시스가 그토록 유전죄와 씨름 한 이유는 전통적인 교리에서는 죄에 대한 “책임”의 문제를 제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죄책(guilt)”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죄는 지었어도 죄에 대한 책임에 대해 무지할 수 있다. 오히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죄 지은 사람이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즐겁게 살아가는 모습을 종종 본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살인죄를 저지르고도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 경우를 매체를 통해 듣기도 한다. 이런 부분들이 바로 「불안의 개념」에서 다루고 있는 죄책의 문제이다.
전통적인 교리에 따르면, 인간은 죄 가운데 태어나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성향을 지닌 존재다. 그런데 이런 인간에게 죄책을 묻는다는 것은 너무 잔인하다. 이것은 마치 날 수 없는 인간에게 새처럼 날아보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
어떻게 하면 원죄의 교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또 하나. 인간에게 죄책을 묻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자유 의지”를 인정해야 한다. 이렇게 주장을 하게 되면 결국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로 기울 수밖에 없다.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지 말지 선택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원죄를 부정하였다. 원죄를 인정하면 죄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유아들은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상태와 똑같다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에서 펠라기우스는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다. 하프니엔시스는 이런 펠라기우스의 주장도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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