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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강화/이방인의 염려

01 죽은 척 하기

by 엉클창 2021. 1. 4.

 

세상에는 죽은 척 연기를 해서 살아가는 동물들이 많이 있다. 위장술로 방어하는 동물들이다. 이는 공격력이 약한 동물들이 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다. 대부분 일부러 죽은 척하며 고약한 냄새를 풍긴다. 대표적인 동물이 주머니쥐다. 주머니쥐는 적이 다가오면 입을 벌리고 쓰러져 몸이 단단하게 굳은 척 하면서 죽은 시체로 위장한다. 

풀뱀과 돼지코 뱀은 공 모양으로 똬리를 틀고 죽은 지 며칠 된 것처럼 썩은 냄새를 풍긴다. 또한 인도의 나무 뱀은 똬리를 틀고 냄새를 풍기는 한편 눈은 빨갛게 충혈되고 입에서는 피까지 흘린다. 이것은 마치 나쁜 병에 걸려 죽어가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다.

동물의 세계에만 죽은 척하는 동물이 있는 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도 죽은 척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그것도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말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대해 죽은 자들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 대해 절대 죽지 않는다. 나는 이 사람들을 “교회 안의 이방인”이라 부르고자 한다. 

이 이방인의 특징은 세속적인 가치, 이 세상의 가치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시간과 영원으로 구분할 때, 그들은 시간적인 것만 구한다. 영원한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대신, “이 모든 것들”만 구한다. 

이 이방인이 죽은 자처럼 보이는 이유는 세상의 것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그가 추구했던 돈, 명예, 권력, 성공 등과 같은 세상의 것들을 얻지 못해 절망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죽은 자와 같다. 그는 살아 있으나, 사실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인생 최대의 비극 가운데 있다. 그가 얻고자 하는 어떤 것도 얻지 못했다. 

하지만 그를 제대로 관찰해보라. 그는 죽은 척하고 있는 주머니쥐다. 그에게 세속적인 가치가 채워진다면, 그토록 원했던 “돈”이 공급된다면, 그는 다시 예전처럼 살아난다. 죽은 것 같으나 절대 죽지 않았다. 이것은 일종의 시체놀이와 같다. 언제나 세속적 가치를 상실하면 죽은 척 하기.

세속적 가치를 상실했을 때, 이방인은 죽은 척한다. 연기의 대가다. 누가 봐도 딱해 보인다. 그는 자신이 추구했던 그토록 “소중한 가치”를 상실했기 때문에 절망하고 있다. 살아 있으나 사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의 오해이다. 

지금부터는 그의 오해를 풀어보자. 일단 절망이란 무엇인가? 진정 절망이란 영원을 상실하는 것이다. 영원을 상실하는 것이 절망이라면, 이것이 절망의 올바른 개념이라면, 그는 죽은 자처럼 있으나 죽은 것도 아니고, 절망했다고 말하고 있으나 실상은 절망한 것이 아니다. 

아니, 그의 가치관에서는 올바른 말이다. 그는 가치상실로 절망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는 바로 그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진짜 절망을 모르고 있다. 그가 세속적 가치에만 매달려 영원을 상실하고 있는 위험 가운데 있다는 사실에는 절대로 절망하는 법이 없다. 

아니, 그는 영원한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지금까지 구했던 것은 세속적인 것이고, 이 땅의 가치고, 썩어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그토록 죽은 척 연기한 이유는 그래야 다시 이 땅의 것들로 보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그를 보고 있노라면, 이 연기는 더욱 진솔해진다. 진짜 죽은 자처럼 보인다. 그래야 세상에서 더 많은 동정표를 얻을 수 있고 주목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시체놀이 아닌가? 

따라서 그의 말은 언어의 남용이다. 그가 절망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된 표현이고, 언어 과잉이다. 그의 생각은 아이들의 소꿉장난과 같다. 참된 절망을 알았더라면, 영원을 상실하는 위험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는 정말로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죽은 자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대해 죽은 척 한 것이 아니고 정말로 죽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은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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