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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강화/이방인의 염려

새가 소유에 대한 염려가 없는 이유

by 엉클창 2020. 9. 8.

 

새는 도랑에서 목을 축이나, 아름답고 넓은 호숫가에서 목을 축이나 소유에 대한 생각이 없습니다. 창고도 없습니다. 넓은 호수를 갖기 위해 싸움을 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새에게는 소유에 대한 염려가 없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이 가져야 만족할 수 있습니까? 새가 소유의 염려가 없는 이유는 정확히 말에 “소유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갖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개념정리가 아주 잘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뭐라 말합니까? 저 하늘의 새를 보라고 말합니다. 왜 보라고 했을까요? 새처럼 살아야 하기 때문에 보라고 한 것 아닙니까? 새를 보고 느끼는 바는, 새가 염려가 없다는 점 아닙니까? 소유의 생각, 이게 새에게 없습니다. 무지합니다. 

요즘 코로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재물의 염려 없이, 소유에 대한 염려 없이 살 수 있을까요? 

새가 되는 겁니다. 그러고도 그가 새가 아니고 사람이라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게 「이방인의 염려」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이방인의 염려」가 강탈하고자 하는 것 중에 하나는 바로, 이 “소유의 생각”입니다. 소유의 생각을 아예 인간의 머릿속에서 ‘도둑질’하는 겁니다. 

이게 한국 교회 정서상, 잘 맞지 않는다는 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고 잘 살고 세상에서 낙을 누릴 수 있다고 가르쳐야 하는데, 이게 정 반대로 말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 믿으면 복을 갑절로 받아 없던 돈도 생기고 사업도 잘 풀려서 더 부자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쳐야 하는데, 이게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예수 믿으면 일이 잘 풀리던가요?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일가요? 소유의 염려를 더 부추긴다는 겁니다. 요즘처럼 가면 갈수록 삶이 더 피폐해져 가는 이 시국에 예수 잘 믿으면 어떤 목사들처럼 코로나 바이러스도 안 걸린다고 가르치면 이게 제대로 된 복음입니까? 

새처럼 되라! 복음의 목표는 소유의 생각을 강탈하는 겁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인들이 부자가 되는 것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것만 기억해 두십시오. 그렇다면 복음은 부자 그리스도인을 가난하게 만들 작정인가? 이것도 철저한 오해이지요. 복음의 목표는 부자 그리스도인을 가난하게 만들 목적도 없습니다. 다만, 복음이 목표로 하는 것은 “소유의 생각”을 도둑질하는 겁니다. 

복음이 자신의 의도를 이룬다면, 그 결과 소유에 대한 염려가 사라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염려는 소유에 대한 “지식”을 통해 들어왔기 때문이지요. 결과적으로 새처럼 될 것입니다. 새와 다른 점이 있다면, 새는 처음부터 소유에 대해 무지했다면, 그리스도인은 가면 갈수록,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을수록 소유에 대해 무지해집니다. 

그렇다면 부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될까요? 재물을 빼앗긴 적이 없는데 가난해질 리가 없겠지요. 다만, 그는 소유에 대해 무지해질 뿐입니다. 그리하여 역설적으로 가난해지는 겁니다. 그에게 재물이 있거나 없거나 그에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구두쇠는 중요하겠지만요.... 그리스도인이 구두쇠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가난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될까요? 일용할 양식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 그 이상을 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조심하십시오.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순간, 부자가 되고 싶어 하려는 순간, 염려는 들불처럼 번져 그를 사로잡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믿으면, 물질적 축복이 온다는 설교를 조심하십시오. 이 축복을 여는 순간, 보이지 않는 염려가 들불처럼 순식간에 그대를 삼킨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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