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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강화/이방인의 염려

04 세상에 대해 죽은 자는 어떻게 사는가?

by 엉클창 2019. 11. 28.

옛날에 한 경건한 은둔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살았으나 세상에 대하여는 죽은 자였습니다. 그는 수많은 세월들 동안 가난하기로 한 맹세를 지켜왔던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부자와 우정을 쌓았고 부자는 그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시간은 흘렀고 부자가 먼저 죽고 말았습니다. 부자는 죽으면서 그의 전 재산을 이 은둔자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이 은둔자는 오랜 세월을 일용할 양식으로만 살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이 은둔자에게 와서 이런 사실을 알렸습니다.

당신은 이제 부자요. 당신의 친구였던 그 부자가 당신을 위해 전 재산을 당신에게 물려주고 죽었단 말이오.”

그러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이건 착각임에 틀림이 없소. 나는 그보다 이미 오래전에 죽었는데 어떻게 내가 그의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겠소!”

경건한 은둔자 아르세니우스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것을 기억한다면, 이 은둔자이 부함은 얼마나 부한지요! 하지만 이 부함이 저런 부함과 나란히 놓고 보면 얼마나 가난합니까! 이 땅의 부함이란 죽음과 관계할 때, 언제나 가난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은 가난한 중에도 가난의 염려가 없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이 세상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살고 있습니다.

죽음에 의해 새는 사는 것을 멈춥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죽음으로 삽니다. 이것이 온 세상의 부함이 그의 가난, 혹은 그의 부함과 비교할 때, 그토록 가난해 보이는 이유입니다. 사람이 그가 사는 동안 아무리 세상의 부함을 다 이용할 수 있다 해도 말입니다.

죽은 사람은 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을 우리 모두는 압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사람은 실제로 돈에 대한 필요가 많습니다. , 그는 아주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경우, 그는 더 많은 돈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가난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가난한 그리스도인이 부하다면, 그는 새를 닮지 않았습니다. 새는 가난하지만 가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가난하지만 가난하지 않고 부합니다. 새는 낮은 자리에 대한 염려가 없습니다. 새는 그런 자리를 구하지도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높은 자리를 구하지도 않습니다. 새는 그런 염려가 없습니다. 새의 삶은 누군가의 걱정의 대상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말하자면 하나님과 몫을 나눕니다. 그리스도인은 먹고 마시는 일과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돌보실 수 있도록 맡기는 반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합니다.(6:33)

새는 가난의 염려에 짓눌리는 일 없이 하늘 높이 저 구름 속으로 날아오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새보다 더 높이 날아오릅니다.

새는 마치 저 하늘에서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이미 찾았습니다.

새는 마치 하나님을 찾기 위해 더 멀리, 더 멀리 날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이미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세상에, 얼마나 복이 있습니까! 그가 여기 이 땅에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새는 하늘로 날아간 것 같지만 하늘은 여전히 닫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인에게만 하늘은 열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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