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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강화/이방인의 염려

01 새는 이 염려가 없다

by 엉클창 2019. 11. 2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새는 이 염려가 없습니다. 새는 무엇을 먹고 살까요? 이런 점에서는 우리는 백합에 대하여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백합에게는 쉬우니까요. 백합은 공기를 먹고 삽니다. 그러나 새는 무엇을 먹고 살까요?

누구나 알다시피, 주민 센터는 염려해야 할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먹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을 걱정해야 하고, 때로는 먹고 살만한 것은 있으나 그것에 만족할 수 없는 사람을 걱정해야 합니다. 그를 불러 무엇으로 먹고 사는지 묻기도 합니다.

그때, 새는 무엇을 먹고 살까요? 확실히 새가 창고에 모아들이는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새는 창고가 없고, 창고에 모아들이지 않으니까요. 실제로 누구도 창고에 쌓아 놓는 것으로 먹고 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새는 무엇을 먹고 살까요?

이 문제에 대해서 새는 자신을 설명할 수 없군요. 만약 새를 소환한다면, 나면서부터 소경이었던 자가 자신을 눈을 뜨게 했던 자에 대하여 물어볼 때, 답변했던 것처럼 대답해야 했을 겁니다. 성경에 보면, 나면서부터 소경이 되었던 자가 눈을 뜨게 되었을 때 은인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바리새인이 물어볼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저는 잘 모릅니다. 제가 아는 한 가지는 전에 제가 앞을 보지 못했으나 이제는 본다는 사실입니다.(9:25)

마찬가지로, 소경처럼 새는 아마 이 질문에 대해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아는 한 가지는, 제가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때, 새는 무엇을 먹고 살까요? 새는 일용할 양식(daily bread)을 먹고 삽니다.(6:11) 이 일용할 양식은 신선도가 떨어지지 않는 하늘의 음식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훔칠 수 없을 만큼 잘 보관된 거대한 양입니다. 왜냐하면 도둑은 밤중에 보관된 것만 훔칠 수 있기 때문이죠. 다시 말해, 누구도 낮 동안 사용된 것을 훔칠 수 없으니까요.

따라서 일용할 양식은 새의 생계입니다. 일용할 양식은 가장 인색하게 측정된 양입니다. 이것은 정확이 딱 맞고 조금도 남김이 없습니다. 일용할 양식은 가난이 필요로 하고 있는 적은 양입니다. 그때 새는 정말로 가난할까요? 대답하기보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새는 가난한가?”

아니, 새는 가난하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여기에서 새가 선생인 것이 명백합니다. 새의 외적인 조건을 따라 판단하자면, 새가 가난 하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 그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는 가난하지 않습니다. 새가 가난하다고 말하는 것이 누구에게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새의 상태가 가난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새는 가난의 염려가 없습니다.

만약 새를 소환한다면, 주민 센터는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새가 기초생활 수급자에 걸맞은 자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새를 다시 날려 보낸다면, 그는 가난하지 않습니다. 복지과 담당자가 최종적으로 판단할 권한이 있다면, 새는 확실히 가난하게 될 것입니다. 새가 생계에 대한 너무 많은 질문들로 시달리다 못해, 스스로를 가난하다고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죠.

따라서 당신은 무엇을 먹을까?” 혹은 무엇을 마실까?”라고 말하면서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이방인이 구하는 것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이 염려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리스도인은 부합니까? 아마도 부한 그리스도인이 생기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지금 이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가난한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가난합니다. 그러나 이 염려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는 가난하지만 가난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가난 중에 있지만 가난의 염려가 없다면, 가난하지만 가난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때, 새가 아니고 사람이라면, 그러고도 새와 같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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