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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강화/이방인의 염려

03 새는 살기 위해 먹고 이방인은 먹기위해 산다. 그리스도인은?

by 엉클창 2019. 11. 26.

새는 일용할 양식으로 먹고 삽니다. 하지만 가난한 그리스도인처럼 일용할 양식으로 먹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새는 이방인처럼 먹기 위해 사는 것도 아닙니다. 새는 살기 위해 먹습니다. 그러나 그때, 이것은 정말로 사는 것일까요?

그리스도인은 일용할 양식으로 삽니다. 그가 그것으로 먹고 사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무엇을 먹을 것인지, 무엇을 마실 것인지에 대한 어떤 의문도 없습니다. 이것과 관련해서,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그가 이 모든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실 뿐 아니라 책임지고 있다고 이해하고 있으니까요.

가난한 그리스도인은 이 모든 것들에 대해 묻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방인이 구하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그가 구하는 다른 무언가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살고 있습니다. 결국, 새가 어느 정도로 살고 있는 것인지는 의심스럽습니다.

그는 하늘의 계신 어떤 아버지가 계시다고 믿습니다. 그분은 매일 인자한 손을 펴시고 살고 있는 모든 생물을 만족케 하십니다.(145:16) 또한 복을 주시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구하는 것은 만족하게(배부르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아버지입니다. 그는 똑같이 작은 양으로는 먹고 살 수 없다는 점에서 새와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떡으로만살 수 없다는 점에 의해 새와 구별됩니다. 그는 만족을 주는 복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가 구하는 것은 만족하게(배부르게) 되는 것이 아니라, 복입니다.

그는 참새 한 마리도 하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믿습니다.(10:29) 어떤 새도 이런 사실에 대하여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새에게 이것이 이렇다는 것을 말한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는 여기 이 땅에 사는 동안 일용할 양식을 받는 것처럼, 언젠가 저 세상에서 복을 누리며 살 것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이것이 그가 삶이 음식보다 더 중요하다라는 구절을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temporal life)이 음식보다 더 중요하다면, 영원한 삶은 먹고 마시는 것과는 전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으로 구성될 수 없듯이(14:7), 사람의 삶 역시 이런 것들로 구성될 수 없습니다!

그는 거룩한 삶이란 여기 이 땅에서 가난한 삶을 영위하는 것을 언제나 명심합니다. “그분은 광야에서 굶주리셨고 십자가에서 목마르셨다는 것을 명심합니다. 그리하여 사람은 가난하게 살 뿐만 아니라 가난 중에 살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합니다.

따라서 그는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고 그것에 감사합니다. 이것은 새가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와 감사하는 일은 먹고 마시는 것보다 그에게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양식”(4:34)이듯이, 그에게 있어 기도와 감사는 그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그리스도인은 부한가요? 지난번에 이야기한 것처럼 그렇습니다, 그는 진실로 부합니다. 새는 가난한 중에도 가난의 염려가 없습니다. 가난한 새는 이방인이 아닙니다. 따라서 역시 가난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새는 가난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새는 그리스도인도 아닙니다. 따라서 그는 그리스도인과 비교한다면 여전히 가난합니다.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가난합니다!

기도할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가난합니까!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자처럼 모든 것을 받는 것은 얼마나 가난합니까! 생명의 은인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가난합니까! 기도할 수 있다는 것, 감사할 수 있다는 것, 물론 이것은 그 은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 사는 것입니.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 온톨로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살아야 할 존재론에 해당된다 볼 수 있지요. 그래서 지난번에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가난한 그리스도인의 부함이란 정확히 이 하나님, 단 한 번도 그에게 이 땅의 부함을 허락하지 않는 그 하나님(The God)’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 아니다.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허락하신 그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날마다! 그렇습니다. 날마다 가난한 그리스도인은 그의 은인을 깨닫는 때를 갖습니다. 기도하고 감사해야 할 때를 갖습니다. 진실로 그의 부함이란 그가 기도하고 감사할 때마다 더욱 증가합니다. 그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고 하나님이 그를 위해 존재하는 일이 그에게 더욱 명백할 때 그의 부함은 증가합니다. 반면에 부한 자가 기도와 감사를 잊을 때마다 이 땅의 부함은 점점 더 가난해집니다.

, 평생 동안 한 번에 그의 몫을 받는 것은 얼마나 가난한가! 그러나 날마다그의 몫을 받는 것은 얼마나 부한가! 날마다 자기가 받은 것을 잊은 때를 갖는 것은 얼마나 의심스러운가! 그러나 날마다 자기가 받은 것을 기억하는 일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은인을 기억하는 일, 그의 하나님, 그의 창조주, 그의 공급자, 하늘의 계신 그의 아버지를 기억하는 일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따라서 그 사랑을 기억하는 일은 얼마나 복이 있는가!

이로 인해 살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이 사랑을 위해 사는 것만이 살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그리스도인은 진실로 부합니까? 그렇습니다. 그는 확실히 부합니다. 실제로 당신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 그가 부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 그는 이 땅의 가난에 대하여 말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하늘의 부함(heavenly wealth)에 대하여 말하기 원합니다.

따라서 가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의 주변의 모든 것들이 그의 가난을 생각나게 하는 반면, 그는 자신의 부함에 대하여 말합니다. , 이것이 그리스도인 말고 누구도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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