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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강화/이방인의 염려

02 가난한 그리스도인은 부한가?

by 엉클창 2019. 11. 22.

지난 시간에 우리는 새의 가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새는 가난하지만 가난하지 않다는 것이 결론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새는 가난에 대한 염려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그리스도인은 무엇으로 살까요?

새와 똑같습니다. 일용할 양식으로 삽니다. 이 점에서 그는 새와 닮았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이 아닌 새는 그리스도인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는 새보다 더 가난할까요? 왜냐하면 그는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해야 하니까요. 반면, 새는 기도하는 일이 없어도 일용할 양식을 얻습니다. 맞습니다, 이방인은 그리스도인이 새보다 가난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와 그리스도인을 생각해 봅시다. 새도 일용할 양식으로 살고 그리스도인도 일용할 양식으로 삽니다. 다만, 그리스도인은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합니다. 기도함으로써 일용할 양식을 얻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밤 중에 보관해야 할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는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한 밤 중의 염려를 떨쳐버리는 것입니다. 내일 일어나 그가 기도한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 편히 잘 수 있는 것이죠.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새나 모험가가 자신이 찾는 곳에서 일용할 양식을 얻는 것처럼 그렇게 일용할 양식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새나 모험가는 일용할 양식을 찾으러 떠나야 합니다. 심지어는 찾는 일에 실패할지도 모르죠. 어쨌든, 그들이 일용할 양식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기도함으로써 구하고, 구하는 곳에서 일용할 양식을 찾습니다. 그럼 누가 더 가난한 걸까요?

바로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인은 아무리 가난해도, 일용할 양식 그 이상 먹고 살 수 있는 더 많은 것을 갖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에게는 일용할 양식에 덤으로 생긴 무언가 있습니다. 그것은 새에게는 없는 어떤 가치이고, 넉넉함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위해 기도하고 따라서 일용할 양식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아무리 보잘것없는 작은 것일지라도, 비록 초라한 선물일지라도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얼마나 무한한 가치를 지닙니까!

사랑해본 적 있나요?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받는 것이라면 얼마나 소중합니까? 심지어는 음료수 한 병도, 물 한 잔을 마셔도 사랑하는 사람이 준 것은 그것이 지닌 가치를 넘어 어떤 넉넉함을 지니는 법이지요.

하지만 새는 어떨까요? 자기가 받는 일용할 양식이 누구에서 온 것인지 은인을 찾지 못합니다. 새는 감사할지도 모릅니다. 은혜를 모르는 일종의 배은망덕이지요. 그렇다면, 이것은 얼마나 가난합니까! 새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비하면 가난하고 한 없이 가난하고 또 가난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부한가? 그렇습니다. 그는 진실로 부합니다. 새는 가난한 중에도 가난의 염려가 없습니다. 인정하다시피, 가난한 새는 이방인이 아닙니다. 따라서 역시 가난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새는 가난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새는 그리스도인도 아닙니다. 따라서 그는 여전히 가난합니다. , 가난한 새여, 그는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가난하다!

기도할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가난합니까!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자처럼 모든 것을 받는 것은 얼마나 가난합니까! 다시 말해, 생명의 은인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가난합니까! 기도할 수 있다는 것, 감사할 수 있다는 것, 물론 이것은 그 은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 사는 것입니.

가난한 그리스도인의 부함이란 정확히 이 하나님, 단 한 번도 그에게 이 땅의 부함을 허락하지 않는 그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 아닙니다.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허락하신 그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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