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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강화/이방인의 염려

05 이방인의 삶

by 엉클창 2019. 11. 29.

새는 가난해도 가난의 염려가 없다. 새는 침묵한다. 그리스도인은 가난해도 가난의 염려가 없다. 그는 가난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부함에 대하여 말한다. 이방인은 가난의 염려가 있다. 그는 가난한 중에 염려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산다.” (한 쪽은 다른 한 쪽과 정확히 일치한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2:12)

이것이 이방인이 염려하는 이유다. 그에게는 공급자가 없다. 그는 태평한 새처럼 침묵하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인처럼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부함에 대하여 말한다. 이방인은 가난과 가난의 염려 말고는 아무 것도 모르며 그것 말고는 갖고 있는 것이 없다. 그는 묻는다.

내가 무엇을 먹지? 무엇을 마셔야 하지? 오늘, 내일, 내일 모레, 이번 겨울에, 다음 봄에, 내가 늙었을 때, 나와 가족 그리고 온 나라, 우리는 무엇을 먹고 마셔야 하지?”

그는 단지 힘든 순간에만 이 질문을 묻고 그것에 대해 회개하는 것이 아니다. 힘들 때 이런 질문을 묻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며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 세상에서 그는 하나님 없이 살고 있으며 저 질문을 하며 거드름을 피운다. 단지 그는 저 질문으로 적당한 삶의 문제를 요청한 것이다. 저런 생각으로 그는 스스로 굉장히 중요해졌다. 오로지 저 삶의 문제에만 사로잡혀 있다. 저 삶의 문제로 사로잡혀 있는 그에게 무언가 결핍된 것이 있다 해도 공공기관이 그를 막을 도리가 없다는 것을 그는 안다. 그는 하나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까.

저 삶의 문제에 대하여 아무런 생각이 없거나, 적어도 그를 돕는 데에 무관심한 자가 있다면, 그는 이 사람을 몽상가로 간주했을 것이다. 이런 가장 심오한 삶의 문제와 비교할 때, 가장 고차원적이고 거룩한 것은 착각과 허영으로 여긴다. 어른에게 새와 백합을 언급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으로 생각한다. 도대체 본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들에게 무엇을 배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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