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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인문학

존재론과 윤리학: 엠마누엘 레비나스의 하이데거 비판에 대한 제고찰

by 엉클창 2021. 1. 22.

존재론과 윤리학: 엠마누엘 레비나스의 하이데거 비판에 대한 제고찰
Bouckaert, L., 'Ontology and Ethics: Reflections on Levinas' Critique of Heidegger', in: International Philosophical Quarterly, vol. 10 (3), pp. 402-419, 1970.               
          (옮긴이: 한신대 대학원 신학과 김성호/기독교윤리)     


레비나스의 하이데거 비판은 가혹하면서도 극단적으로 들린다. 그 비판은 제2차 세계 대전 체험과 독일인에 의해 박해받은 유태인의 태도가 영향을 끼쳤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하이데거에 대한 레비나스의 철학적 입장 태도를 고찰하려고 한다. 그런데 레비나스의 철학적 입장을 존재론과 윤리학을 대면시키는 것에만 한정하지 않을 것이다. 레비나스가 하이데거를 비난하는 이유는 첫째, 그가 타자의 초월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둘째 예컨대 그의 단순한 존재개념이 단순히 있다는 il y a의 의미에서 거기에-있음(there-being)이 지니는 애매성과 혼돈을 간과하고, 완전히 익명적 존재의 무서움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다른 곳에서 하이데거가 현존재를 염려로서(Dasein as Sorge) 해석하는 것에 반대하고, 자율적 존재자인 주체의 기원을 향유(enjoyment, la jouissance)로 생각한다. 이 논문은 하이데거가 윤리학 즉 절대타자(the Other)와의 관계를 과소평가하고, 다시 말해 하이데거가 타자와의 관계인 윤리학을 존재론에 복속시키고 있다는 레비나스 비판의 주요 근거를 고찰하는 데 있다. 이처럼 윤리학을 과소평가하게 된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레비나스의 물음처럼, 서구의 전체성의 철학이 어떻게 하이데거의 사유에도 지속되고 있는가? 존재론과 윤리학의 구별은 어디에다 두어야 하는가? 우리는 이런 제문제에 대해 약간의 빛을 비추고 싶다. 우리는 먼저 위에서 언급한 주요방향에 따라 하이데거에 대한 레비나스의 입장을 정리하고, 보다 명확하게 자리매김함과 더불어 레비나스의 윤리학을 존재론과 관련하여 평가하려고 한다.

                      Ⅰ. 하이데거와 서구 존재론

레비나스에 따르면, 서구 철학은 일반적으로 동시에 "절대타자를 절대자아로 환원"(reduction of the Other to the Self)시켜 실재를 파악하는 존재론이다. 사유하는 주체는 모든 현상을 하나의 지평위에 통일성과 구별로  모아들인다. 사유하는 주체는 존재자들의 다수성을 모든 것을 담지하는 하나의 공통근거, 즉 역사, 로고스, 질료, 최고 존재자, 존재 자체 따위로 환원시킨다.  사유하는 주체가 이런 전체성을 중앙집권화하기 때문에, 레비나스는 그런 경향을 여러번 절대자아(the Self)라고 명명하고, 전체성의 철학이자 동시에 자아의 철학인 서구의 철학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관심사가 서구 형이상학을 극복(Ueberwindung)하는데 있다 하더라도, 그 역시 서구 존재론을 극복하는데 실패했으며, 오히려 새로운 방식으로 또다시 전체성의 철학을 기획하고, 타자에 대한 자아의 우위성을 주장함으로써 서구의 존재론을 실현시키고 있다고 레비나스는 확신하고 있다: "이런 타자에 대한 자아의 우위성이 철저히 하이데거 철학에서 유지되고 있는데, 그의 철학이 요즘에 정말 놀라운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 같다." 레비나스의 이런 확신은 서구의 존재론의 근본 특징들이 하이데거의 사유 전면에 강력하게 부상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우리는 서구 존재론의 근본 특징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 타율성에 대한 자율성의 우위, 정의에 대한 진리의 우위, 존재자들에 대한 전체성의 우위. 레비나스에 경우, 자유, 진리, 전체성에 우위를 인정한다는 것은 타자를 자아로 환원시키고, 존재론이 그 최종적 단어를 가지는 중앙집권적 구심력을 의미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하이데거에게 그런 중앙집권적 구심력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가?

                        a. 타율성에 대한 자율성의 우위

이와 같이 타율성에 대한 자율성의 우위는 후기 하이데거 철학에 비해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의 하이데거에서 보다 분명해진다. 레비나스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의 자율성에 대한 새로운 토대를 발견한다는 사실에 강력하게 주목해왔다. 이런 자율성은 그것의 무한자 관념(idea of the infinite)을 지닌 고전적 합리성보다는 염려(anxiety)와 죽음(death)과의 관계속에서 찾아진다. 죽음은 언제나 존재가능인 존재로 하여금  현실화되지 못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음을 현실화로 체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은 그 자체 가능성으로서 작용, 현실화의 기능속에서 더 이상 사유될 수 없다. 그러므로 현존재(Dasein)는 언제나 자신을 존재가능태, 하나의 가능성, 결코 현실화되지 않는 기획투사로 현실화해야 한다. 이런 시간화하는(temporalizing, zeitigend) 자기기획투사의 지평위에서, 이타성(alterity)은 그와 동시에 현존재의 존재로 환원된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하이데거의 유한성의 철학은 염려를 자랑하고, 죽음을 하나의 가능성으로 수용하고, 이렇게 이타성 이전에 자유로워지고 싶은 영웅적 주체, 자족적 주체를 산출해낸다. 다른 한편으로, 레비나스는 고통과 죽음을 절대 타자의 위압속에서 모든 지배와 모든 영웅주의를 상실하는 자아의 무력감의 체험으로 묘사한다: "특정한 순간부터 우리는 할 수 있음을 더 이상 할 수가 없다."(A un certain moment nous ne pouvons plus pouvoir)  하이데거의 경우, 죽음과의 관계는 현존재를 자유 및 자유 그 자체로 구성하는 무(無, nothingness)의 지평으로서 체험된다. 반면 레비나스의 경우, 죽음과의 관계는 우리의 주도권을 제거하고, 우리를 당황케하는 철저한 이타성의 신비와 접촉하게 한다. 오직 타자와의 관계에서만 이런 두려운 이타성이 의미를 가지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준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하나의 사유방식의 절정을 구성하는바, 거기에선 유한한 것(the finite)이 더 이상 무한한 것(the infinite)을 가리키지 못하며, 모든 결점은 단지 연약함이고, 모든 실수는 자기 자신에 대항해 저질러진다. 즉 그의 철학은 장구한 교만, 지배와 잔인성 전통이 도달한 마지막 귀결점이다.

지배에의 영원한 충동은 하이데거 철학에서 자유는 결코 철저히 문제시되거나, 위협받지 않으며,  죽음에 의해서 조차도 문제시되거나 위협받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발생한다.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자유는 진리와 실재의 모든 근거의 궁극적 토대이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게 하는 것과 하이데거의 자유의 핵심인 존재 자체는 거머쥘 수 있음(grasping)의 모델을 본딴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타자를 수용하고, 타자를 자아의 공간 내부에 위치시키기 위해 타자로부터 멀어지는 움직임으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자유가 오히려 존재에의 순종에 의해 지탱되는 후기 하이데거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자유를 처분하는 것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며, 인간을 사용하는 것은 처분할 수 없는 자유로서의 존재이다! 후기 하이데거가 현존재(Dasein)의 자율성과 자유를 타율성과 순종의 경험으로 전환시키지 않는가 하고 질문했을 때, 레비나스의 대답은 다음과 같이 예비되어 있다: "하이데거는 자유를 존재에 순종시키지만, 자유를 문제삼지 않으며, 자유의 불의(injustice)를 문제삼지 않고 있다." 순종과 자유의 변증법은 그 기원과 종합을 지성과 사물의 일치(adaequatio) 또는 비은폐성으로서의 진리 개념(the idea of truth)에서 찾고 있는한, 우리는 진정한 자아의 초월, 진정한 내재성과 전체성의 초월에 대해 말할 수 없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절대적으로 정의를 요구하는 계시(revelation) 차원의 타인의 얼굴(the other man' face)이라는 윤리적 위기(the ethical  crisis)만이 진정 자유와 사유를 의문시할 수 있다.


후기 하이데거에서 발생하는 전회는 우리가 전체성의 철학인 서구 존재론에서 매번 만나게 되는 것에 불과하다. 후기 하이데거 철학은 주체의 자율성을 확립하고자 할 때,  존재를 하나의 전체성에다 기획투사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후기 하이데거 철학은 주체 자신을 다소 이런 전체성의 한 순간으로 사라지게 할 뿐이다. 관념론이 사유와 자유로운 주체로부터 절대타자(the Other)를 구성한다면, 유물론은 주체를 중성(Neutrum)인 절대타자(the Other)에 복속시킨다.  
하이데거 역시 이런 위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이데거의 순종은 익명적 존재역운(Seinsgeschick)에의 복종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이런 중성적인 것으로의 사라짐이 철저하게 사유되고 야기될 때, 그것은 익명적 있음(il y a)의 심연을 열어준다. 그러나 이런 철저성이 하이데거 사유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사유는 비은폐성의 공간, 자아 내지는 내재성의 공간 내부에 자신의 사유를 유지하면서,  "교만한 관념론"과 "수치심을 아는 유물론", "지배자들의 세계"와 "노예들의 세계"사이에서 동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b. 정의에 대한 진리의 우위

자율성과 자유의 우월성은 빛과 진리의 우월성과 같이 간다. 존재자들의 존재가 빛으로 환원된다는 사실은 절대타자(the Other)의 절대자아(the Self)로의 환원을 가능케한다. "독립성과 외재성을 구성하는 존재자들의 존재는 발광성 및 빛과 동일하다. 그것은 이해가능성으로 해소된다."
레비나스는, 비록 하이데거가 근본적으로 서구 사상의 이론적 구조를 포기했다해도, 그의 존재론적 진리는 궁극적인 실재의 생기(生起)로서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 방식으로 반복하고 있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정적이고 객관적인 사유를 역동적이고 보다 심층적인 이해(Verstehen)로 대치하는 것으로는 자아의 범주들을 깰 수 없다. 뵘(R. Boehm)은 다음의 질문 속에서 강하게 레비나스의 입장을 지지한다:

하이데거의 전통적인 지성과 사물의 일치(adaequatio)라는 진리개념 비판은 이런 지성과 사물의 일치의 토대들에로 회귀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가? 그래서 그는 궁극적으로 언제나 적당하게 가장 근원적 방식과 가장 순수한 형태에 주어져야 하는 어떤 것 속에서 이런 토대들을 발견하는 것은 아닌가?

존재론적 차이조차도 더 이상 자아와의 단절을 언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존재와 존재자들간의 구별은 존재의 물러남과 은폐성이 단지 빛나는 진리사건의 구성적 계기들로 간주되는 빛의 영역에서 계속 정위되기 때문이다.


레비나스의 제일차적 관심은 비은폐성과 거머쥘 수 있음의 우월성을 부숴버리는 것인데, 왜냐 하면 "존재론적 제국주의"(ontological imperialism)에는 이타성(alterity)에 대한 폭력과 부정(negation)을 담지하고 있어서, 결국 우리 동료에 대한 착취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존재론적 제국주의는 서구의 권력정치와 권력의지를 언표한 것이다. 따라서 레비나스는 서슴없이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권력의지에 대한 찬미라고 말한다. 오히려 권력의지의 정당성과 양심은 타자에 의해서만 도전받을 수 있다. 인간적인 것은 그 본질상 우리의 지식과 권력의 지평 위에서는, 빛나는 존재의 지평 위에서는 접근될 수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존재 지평으로부터 우리와 더 이상 만나지 않게 되는 곳을 발견하는 것, 즉 사람이 그 자신을 우리의 권력으로 양도하는 것을 그치는 곳을 발견하는 것이다." 타자를 우리가 섬겨야하는 주인(the Master)으로 인식하는 윤리적 관계의 토대하에서만이, 진정한 진리, 그러니까 책임감과 의무를 의미하는 진리가 발생하며, 따라서 파악하여 거머쥘 수 있는 중앙집권적인 움직임은 정지되고 지성과 사물의 일치라는 이념(the ideal of the adaequatio)은 포기된다.

                       c. 존재자들에 대한 존재의 우위

앞부분에서처럼 여기서도 하이데거 철학은 서구 존재론을 갱신해왔다. 존재적(ontic) 진리에서 존재론적(ontological) 진리로의 이행은 곧 존재자들에서 존재로의 이행이며, 그 이행은 그에게 있어 존재론적 물음의 핵심을 구성한다. 레비나스는 존재자들에서 존재로의 이행을 꽤 일찍 잘 알고 있었다. 레비나스는 1937년 장 발(J. Wahl)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이데거는 존재자들과의 관계위에 존재와의 관계를 위치시킴으로써 종교적 초월을 배제하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신학이 실존철학과 모종의 연관성을 확립할 수도 있지만, 레비나스는 엄격한 하이데거적 사유와 신학의 그런 연관성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여기서부터 존재자와의 모든 관계, 심지어 절대적 존재와의 모든 관계는 더 이상 그 단독성속에서 대상 내지는 현상으로 주어져있지 않으므로, 따라서 존재의 빛으로 종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전체성과 무한(Totalit  et Infini)의 다음 본문은 레비나스의 하이데거에 대한 입장을 명쾌하게 요약해주고 있다:

존재자들에 대한 존재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은 곧 철학의 본질에 대한 선포이며, 존재자인 누군가와의 관계(윤리적 관계)를 존재자들에 대한 파악과 지배(지식의 관계)를 가능케하고 정의를 자유에 복속시키는 비인격적 존재와의 관계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이 본문은 존재자들에 대한 존재의 우위는 동일한 맥락에서 곧 정의에 대한 자유의 우위, 윤리학에 대한 사유의 우위와 일치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존재자들에 대한 존재의 우위가 존재자들에 대한 전체의 우위와 일치할 수 있는지를, 다시 말해 하이데거 철학을 과연 전체성의 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에 대해 탐색해야 겠다.
하이데거 자신은 존재가 존재자 전체의 전체성과 일치함을 부인한다. 존재는 오히려 전체성의 "출현"이어서 우리로 하여금 전체 존재자들을 전체화하고 결합시키는 것을 가능케한다. 레비나스는 전체성이라는 말로 전체 존재자들의 완전한 회집 이상의 다른 것을 의도하고 있는가?


레비나스에게 있어 전체성(Totality)이라는 단어는 매우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레비나스는 전체성이라는 단어를 자아(the Self), 역사(history), 체계(the system), 존재자들의 다수성이 결합되는 내재적 질서(the immanent order)와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하이데거의 경우 전체성은 정적인 전체가 아니라, 존재자들이 화해하고 자신의 길을 가는 역동적인 움직임, 다함없는 생기(生起,happening)라는 사실이다. 하이데거의 위대한 업적은 역동적 존재개념을 기획하여, 전체성이 더 이상 폐쇄체계의 특징을 갖지 않고, 새로운 체계과 신시대(new epochs)를 계속 발생하게 한다는 점이다. 전체성은 진리의 생기로서 끝없는 역사의 움직임이다. 레비나스의 경우, 존개개념에 시간 요인을 도입하는 것은 전체성의 철학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다수성 제거를 통한 해방"으로 나타나는 서구 철학 전통의 강력한 확대이자 강화와 대립하는 것이다.


레비나스가 서구 존재론 또는 전체성의 철학에 대해 강렬하게 저항하기 때문에, 우리는 레비나스가 단순히 역사 또는 합리성으로서의 전체성을 거부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인상은 레비나스의 진정한 의도가 아니다. 레비나스는 우리로 하여금 전체성 내지는 무한한 개별자들간의 딜레마에 직면하게 하지 않는다. 그의 진정한 목적은 전체성과 무한한 것(totality and the infinite) 간의 관계를 논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철학의 전체주의적 성격을 거부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전체주의적 철학은 어떤 방식으로든 전체성을 실재의 궁극적 구조로 생각하고, 존재자들의 의미를 내재적 질서의 기능 속에서 규정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전체주의적 철학에서는 주체의 내재성(interiority)과 타자의 외재성(exteriority)의 환원불가능성이 간과된다. 레비나스는 "이해되지 않는 다원주의(a pluralism does not add up)를 찾기 원한다." 그는 철저히 전체성으로부터 물러나면서도 전체성 속에 있는 주체를 묘사하기를 원한다. 그는 전체성으로부터의 이런 물너남의 궁극적 토대를 윤리적 관계속에 정위시키는데, 이 전체성은 존재자들의 다원주의를 가능케한다. 빛나는 존재의 과정을 부숴버리는 이런 윤리적 관계는 더 이상 내재적 질서 속에 다수성을 제한하지 못하는 의미를 전체성 속에서 전개시킨다. 그러나 이런 윤리적 관계는 그 의미를 절대적 관계, 그러니까 동시에 언어가 그 윤리적 관계에서 해방되는 그런 관계 속에서 확립한다. 따라서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이해함와 비은폐성-에 앞서는 형이상학적 차원을 지시하는 것이다: "형이상학은 존재론에 앞선다."(La m taphysique pr c de l'ontologie)

                     Ⅱ 존재론적 사유와 책임감  

레비나스는 빛나는 존재의 과정에 앞선, 그래서 비은폐성과 열어밝힘의 견지에서 해석될 수 없는 어떤 차원을 논의하려고 하는 것이다. 레비나스가 철학자로서 그가 이미 타자에 대한 "존재이해"(Seinsverst ndnis)를 소유하고 있고, 그가 이미 타자를 열어밝혔다고 생각하는 타자의 "존재"를 단순히 제기하고 있다는 이유로 어떤 사상가들은 이런 형이상학적 차원을 하나의 환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더욱이, 레비나스가 언어는 무엇보다도 윤리적 관계라고 주장할 때, 그는 언어에 의한 존재(is) 사용은 분명 어떤 존재이해가 작용하고 있음을 깨달을 필요가 있음이 언급될 수도 있다고 하자! 그러면 언어는 존재사건을 수용하고 드러내는 여러 방식들중 하나의 방식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되는가? 이런 관점에서 레비나스의 사유는, 비록 하이데거의 사유에 하나의 흥미로운 보충물을 구성할 수 있다해도, 하이데거의 사유가 간(間)주관적 관계에 충분히 주목을 하지 않기 때문에, 존재론적 사유의 초월을 담고있지 않다.


다음 페이지에서 우리는 레비나스의 철학이 그 근본 지향점에서 하나의 흥미로운 보충물로도, 하이데거에 대한 화해할 수 없는 반정립으로도 환원할 수 없는 몇 가지 특징들이 있음을 강조하고 싶다. 레비나스의 철학은 존재론적 사유방식을 의문시하고 근거지우는 또 다른 근본 경험에서 파생한다. 레비나스는 때때로 하이데거에 대한 반대입장을 과도하게 주장하고, 또한 하이데거에 대한 레비나스의 비판의 몇몇 요인들이 너무 극단적이고 일면적이라는 사실은 레비나스가 존재론적 사유방식 그 자체를 의문시하고, 존재론적 사유를 더 이상 절대자아(the Self)가 아닌 절대타자(the Other)에게 복종시키려는 근본 노력의 빛에서 보면 단지 이차적인 중요성을 띠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하이데거와 레비나스가 "존재"(being)라는 단어를 통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철저하게 탐색해볼 것이다. 하이데거와 레비나스가 존재에 대해 얘기할 때 정말 동일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하이데거의 존재 개념을 분명하게 윤곽잡기란 불가능하다. 그 까닭은 존재를 결코 하나의 관념, 분명한 내용, 하나의 표상으로 환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약간의 방향성이라도 잡기 위해서, 우리는 예컨대 하이데거의 근본 진술 가운데 존재는 생기이다(being is Ereignis)라는 진술을 언급할 수도 있다. 존재는 존재자들이 비은폐성으로 진입해가고 또한 인간에 의해 하나의 세계로 회집되는 사건이다. 그 세계는 우리를 향해 방향을 튼 존재사건의 빛나는 측면이다. 그렇지만 존재에는 우리로부터 물러난 차원, 이를 은폐성(concealedness)이라 이름하는데, 거기에서 새로운 세계가 우리에게 급파된다(Seinsgeschick,存在歷運). 이런 은폐성 때문에 역사는 종국을 모르며, 따라서 존재는 결코 존재자들과 일치할 수 없는 것이다.

 

다른 한편, 레비나스의 존재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 우리는 순전한 거기에-있음(being-there), 그 어떤 존재자들을 가리키지 않으면서 모호하고, 익명적이고, 염려하는 현존인 존재자신을 il y a(익명적 있음)에 내맡기게 하는 존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존재의 그 철저한 낯섬을 이미 빼앗고, 또한 존재자들의 관계 속에서 존재를 거머쥐는 존재론에서의 존재는 전체성 내지는 역사, 즉 존재자들이 회집되는 중성적 중명사(中名辭)이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하이데거의 존재 개념은 바로 그 중성적 상태이다. 마지막으로 레비나스는 때때로 존재는 대략 현상적인 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그래서 사유가 접근할 수 없으므로 타자에 대한 윤리적 인식에서만 확신할 수 있는 칸트의 물자체(Ding an sich)를 뜻하는 표현도 사용하고 있다. 존재론 층위에서 나타남으로서의 존재와 윤리학 층위에서의 존재 그 자체(being as en soi) 사이의 구별은 예컨대 다음의 문장에서 나타난다: "종말론은 과거와 현재 저편을 향한 존재와의 관계가 아니라, 전체성이나 역사 저편을 향한 존재와의 관계를 발생시킨다."(l'eschatologie met relation avec l' tre par del  la totalit  ou l'histoire et non pas avec l' tre par del  le pass  et le pr sent) "전체성 저편을 향한 존재"(l' tre par del  la totalit )는 분명 절대적 외재성의 존재를 의도한 것이고, "과거와 현재 저편을 향한 존재"(l' tre par del  le pass  et le pr sent)는 가능성, 미래, 진리 또는 비은폐성으로서의 존재를 언급하는 것이다.    
레비나스가 종종 윤리적 차원을 "존재 저편에서"라고 명명할 때, 그것은 전체성 또는 역사로서의 존재를 초월하려는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런 의도는 물론 익명적 있음인 il y a로서의 존재를 초월하려는 의도를 함축하고 있기도 하다. 타자의 얼굴 속에서 il y a의 철저한 타율성의 혼란스런 익명성은 빼앗기고, 인격적이고 윤리적인 의미를 획득한다. 레비나스가 타자의 절대적 의미를 매번 "존재 저편", 때때로 단순한 외재성으로서의 존재라고 부르는 것을 듣노라면 혼란스런 것은 사실이지만, 그 문맥은 레비나스가 존재적으로 손 가까이 있는 것과 존재론적으로 비은폐된 것 모두를 넘어서는 어떤 의미를 전략적인 방식으로 항상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타자는 비은폐성을 피할 수 있는가? 우리는 레비나스가 타자와의 이런 관계를 주로 언어로 묘사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 동시에 다음과 같은 문제가 제기된다:" 언어에서 사용되는 존재(is)는 어떻게 존재와 비은폐성의 이해를 회피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레비나스의 언어철학의 핵심을 구성한다. 존재파악을 함축하는 방식으로 존재를 말할 수 있기 전, 언어는 나와 얘기하는 타자와의 윤리적 관계, 즉 언어는 화자와 청자간의 의사소통, 그러니까 "얼굴과 얼굴의 마주봄"(le face- -face)이다. 언어의 존재-말함(is-saying)은 언제나 담론(대화)의 주제에서 소외되어 있고 존재이해(Seinsverst ndnis)를 회피하는 누군가와의 존재-말함이다. 청자는 항상 담론 외부에 있기 때문에, 절대적 외재성으로서 청자는 내가 어떤 것을 말하기 전, 나로 하여금 나의 존재(is) 사용과 나의 존재 이해에 대해 책임지게 만든다. 나의 말함과 사유에 있어 나의 주도권에 선행하는 이와 같은 나에게 과해진 책임감를 통해, 내 자신은 또한 어쩔 수 없이 존재이해로부터 물러난다.


말함에 있어 책임감의 전가(나에게 과해진 책임감) 때문에, 언어는 또한 더 이상 익명적 존재역운이 될 수 없으며, 우리가 언어를 말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우리 속에서 언어가 말하는 존재사건이 될 수 없다. 우리가 말할 때, 우리보다 더 오래된 낱말들을 사용하고 있으며, 우리가 화자와 청자를 포함하고 조명해주는 어떤 상황에 우리 자신을 각인시킨다는 주장이 종종 거론된다. 우리를 지배하는 언어를 이번에는 우리가 생산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주장이 뜻하는 바가 아닌가? 이것은 어느 정도는 맞다, 그러나 이것이 궁극적이고 근본적인 언어 사건구조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레비나스는 그와 같은 언어개념은 "말하는 말"(la parole parlante)에 대한 "말해진 말"(la parole parlee)의 우위성을 상정하고 있으며, 주체가 말할 때마다, 주체는 말해지고 글로 쓰여진 단어를 다시 채택하여 전개시킬 뿐만 아니라, 무엇 보다 타자와의 접촉으로 진입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말해진 것'의 익명성으로 흡수되기 보다는 주체는 그가 회피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 어떤 사람에 대한 책임감 속에서 다시 자신을 회복한다."( "D s lors, au lieu de s'absorber dans l'anonymat du 'dit,' le sujet parlant se retrouve dans une responsabilit    laquelle il ne savait pr cis ment se d rober.")


우리가 레비나스와 더불어 언어사건에서 윤리적인 것에 우위성을 상정한다면, 우리는 하이데거의 철학을 비판하고, 예컨대 하이데거가 자기 자신의 윤리적 구조를 망각하고 있다고 지적할 수 있겠다. 그러나 진리를 말하기를 요구하며, 그에게 말할 수 있는 공간을 허용하고, 그들 앞에서 그가 책임지는 인간 존재들을 위해 하이데거는 또한 말하고 글도 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자신의 사유와 말함을 의문시할 수 없고, 타자의 초월 앞에서 그것을 정당화할 수 없기 때문에 맹목적인, 독단적, 익명적 말함에 빠지지 않기 위해 타자와의 말함에 대한 이런 책임감으로부터 결코 회피할 수 없다. 이런 까닭에 하이데거의 어떤 독자들은 존재론적 사유가 너무 쉽게 일종의 모호한 시(詩)로 흐려지고, 구체적인 책임감으로부터 회피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품고 있다.
여기서 레비나스는 결정적으로 하이데거와 다르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발화인 얼굴과 얼굴의 마주봄(face- -face) 때문에, 나는 담론 속에서 펼쳐지는 익명적인 존재사건으로 양도될 수 없다. 오히려 나는 타자가 그것에(익명적 존재사건) 대해 책임지라는 명령을 받는다. 존재사건과 존재이해는 또다른 보다 심층적인 차원, 그러니까 우리의 모든 주도권에 앞서고, 레비나스가 대속(substitution)이라 명명하는 책임감의 지워짐에 근거한다. 이런 대속에는 철저한 수동성과 주체의 고유한 선택과 토대가  들어가 있다.


이런 연관성 속에서, 레비나스의 대속에 대한 묘사와 하이데거의 내맡김(Gelassenheit, release)을 비교하는 것이 빛을 던져줄 수도 있다. 그런 비교작업은 하이데거와 레비나스의 근본 용어들이, 비록 사실 그 용어들이 서로 다른 근본 경험으로 환원될 수 있다해도, 형식적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따라서 꽤 상이하게 방향지워져함을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다. 따라서 내맡김(Gelassenheit)은 기초적인 현상학적 태도에 대한 이름으로 간주될 수 있고, 반면 대속(substitution)은 윤리적 체험의 깊이를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두 개념은 인간에 있어 일종의 수동성(passivity)을 표현하고 있는데, 그 수동성은 의지를 초월하고 의지에 대한 하나의 토대로 기능한다. 내맡김은 진리의 은폐된 본질에로의 순종인데, 그것을 통해 사유는 하나의 기대이고 또한 사유는 휴식을 취하게 된다. 대속은 타자가 호소하고 소환하는 그리고 동시에 모든 것과 모든 사람에 대해 책임감을 떠맡도록 누군가에게 울부짖어 누군가가 반응하는 수동성, 그래서 대속은 책임감 때문에 안락하게 쉴 수 없음(restlessness)을 발생시키는 것이며, 나로부터 타자로의 이행인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가장  기초적인 "수동성"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는가?

 

진리의 은폐된 본질이 항상 하이데거의 경우 나타남의 구성적, 변증법적 차원으로 간주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맡김 역시 자유 속에서 존재-하게 함(Sein-lassen)으로 구현된다. 우리는 자유를 철저히 의문시하고, 사유를 비판할 수 있는 곳을 찾을 수 없으므로, 하이데거는 어렴풋이 별처럼 빛나는 밤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와 사유가 공속하는 것이 하이데거의 교의(doctrine)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생기(Er-eignis)이다. 다른 한편으로, 대속 가운데서, 타자의 부재는 사유에겐 절대적이다. 타자의 물러남은 나의 자유에 앞서며, 따라서 타자는 나와 절대적인 방식으로 나와 접촉할 수 있고, 나의 내맡김을 부숴버리며, 진리의 은폐된 본질에 대해 나로 하여금 계속 책임지게 한다, 비록 이 책임감이 겉으로 보면 내가 예견하거나 기대할 수 있는 것 이상에 도달한다해도 말이다. "주체성(subjectivity)은 이런 불가능한 요구들을 현실화한다. 즉 주체성은 파악되는 것 이상으로 파악한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현실화한다."


우리가 존재-하게 함(Sein-lassen)이라는 주제로부터 출발한다면, 레비나스와 하이데거 사이의 공통 입각점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가? 선과 정의라는 창조적 위험은 먼저 우리가 타자를 현재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임을 의미하지 않는가? 그러나 하이데거의 존재-하게 함(Sein-lassen)이, 그것이 철저히 윤리학의 타율적 경험에 기반하지 않는한은, 타자에 대한 독단성과 환원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레비나스의 윤리적인 것의 우위성과 환원불가능성은 존재하게-함에 새롭고 독창적인 구조를 제공해준다. 나의 자유를 침범하기 훨씬 이전에 존재하게함은 타자가 무조건적으로 나에게 제시하는 요구이다. "나를 살인하지 말라"(Thou shalt not kill)는 명령은 타자의 무력한 얼굴이 나에게 던지는 명령이며, 내가 실재에 대해 부여하는 그 어떤 의미보다도 앞서는 하나의 명령인 것이다. 따라서 존재-하게 함은 주체 속에 있는 철저한 수동성을 산출하는 하나의 윤리적 토대를 수용하고, 사물의 무생명과는 다른,  그 어떤 강요된 노예의 복종과도 다른 수동성을 수용한다. 내가 타자의 윤리적 명령하에 있는 이런 수동성이 모든 진리와 자유를 지탱해주며, 진리와 자유의 독단성과 익명성으로부터 해방시킨다고 레비나스는 주장한다. 내가 이런 무조건적인 요구를 거절한다는 사실은  내가 또한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무조건적인 요구를 수용하여 인간적인 방식으로 존재할 가능성이 없다면, 그 요구는 하나의 강제일 것이고, 따라서 그 요구가 지니는 절대적 성격을 상실할 것이다.


하이데거와 레비나스가 분명 대비되는 또 다른 주제는 역사성(historicity)이라는 주제이다. 레비나스 사상에 대한 에쎄이에서, 데리다(J. Derrida)는 레비나스와 하이데거의 근본차이는 레비나스가 의미의 기원을 무역사적(an-historical, an은 ana에서옴) 차원에 정위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레비나스에 있어 이 "의미기원의 무역사성"(an-historicite du sens en son origine)의 의도는 무엇일까? 레비나스의 이런 무역사성은, 그의 후설에 대한 첫 작품에서 그가 현상학적 환원의 무역사성을 순진함의 하나의 형태라고 낙인 찍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훨씬 놀라운 것이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자신과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현상학적 환원으로서의 사유는 결정적으로 역사로부터 물러날 수 없기 때문이다. 단지 윤리적 환원만이 인간을 역사의 운명으로부터 구원해주기 때문이다. 무한자 관념(The idea of the infinite)은 사유와 이성 속에서 형태를 갖지 않는다. 우리가 사유와 이성을 무한자의 관념위에 확립한다해도, 우리가 유한한 것을 뚫고 지나갈 수 있는 것은 윤리적 의사소통 가운데서이다. 따라서 레비나스의 경우 역사적 차원에서 사유와 진리사건이 동시에 주체가 더 이상 이성 및 역사의 로고스 속에서 상실되지 않고, 오히려 지향적 의미의 우월한 지점으로부터 역사를 방향지우고 심판하는 초역사적 조건을 획득할 때, 사유와 진리사건은 철저히 역사적으로 남아있게 된다.


사상이 타자의 "심판"(ordeal)하에 있을 때, 내재적 체계내로 인간을 가두는 "역사의 심판"은 파괴된다. 역사는 그 전체주의적 성격을 상실하고 새로운 역동성을 획득한다. 절대타자의 얼굴(The Other's face)은 이제까지의 역사의 의미를 다시 절대적 의미 및 철저히 다른 미래, 즉 타자의 미래(the future of the Other)의 빛에서 궤도 수정하도록 우리를 초대하는 하나의 윤리적 호소(an ethical appeal)이다. 하이데거는 변화하는 유한한 세계사 시기들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방식으로서 미래를 체험하지만, 레비나스는 미래를 타자의 도래(la visitation)으로 체험한다, 예컨대 아이의 탄생 속에서 미래가 구체적인 형태를 띨 때 말이다. 이런 식으로 역사는 절대적이고 무한한 미래를 수용하게 되고 구원사로 전환된다.


다른 측면은 말할 것도 없이, 존재론적 사유, 내맡김, 존재-하게 함, 역사성 따위는 실재에 대한 현상학적 접근의 궁극적 표현들이다. 그러나 존재론적 사유는 자아의 우위성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은 전체성의 철학으로서 서구 존재론의 해체(Destruktion)와 극복(Ueberwindung)을 가져올 수 없다. 윤리적 책임감의 태도에서만이 이런 우위성은 포기되고 우리는 타자를 우리의 보다나은 선(Better)으로 인정하게 된다. 몇번이고 하이데거의 철학은 사유와 존재가 생기로서 공속하는 현상학적 진리개념을 심화시킨 것 같다. 레비나스의 사유는 또다른 근본체험, 그러니까 사유가 주도권을 취하기 이전, 자아에게 접근하는 절대적인 정의(justice)의 요구에서 파생된다. 윤리적 요구가 나타남 속에 녹아버리면 나의 자유와 의식으로 복귀하고, 따라서 그 윤리적 요구의 절대적, 명령적 성격을 상실한다. 물론, 타자의 얼굴 또한 하나의 나타남이지만, 그 얼굴이 지니는 절대적 성격("나를 살인하지 말라") 때문에, 타자는 말하자면 그의 나타남에 앞서며, 나로 하여금 계속하여 그 얼굴에 책임지게 한다. 현상학적 경험 속에서 진리사건으로서 존재는 현재의 부재속에서 기획하고- 수용하는 존재 이전에 있는 사유하는 인간에 관련하여 상관되어 있다. 다른 한편 윤리학은 타자의 절대적 외재성과 친숙함과의 관계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하이데거의 철학이 유한성의 철학으로 남아있다면, 레비나스는 윤리적 경험의 해석학을 통해서 갱신된 형이상학적 전망을 열어준다. 레비나스는 다시 절대적인 것의 경험을 내놓고 있다.


현상학과 존재론적 사유를 초월하려고 하는 레비나스의 시도는 확실히 논쟁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이유없이 레비나스의 철학을 타자의 현상학이자 존재론이라고 계속 생각할 수 없다, 마치 정확하게 우리가 타자의 "수수께끼"에 유념하지 않고, 타자의 얼굴을 하나의 현상으로 계속 생각할 수 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레비나스의 사상을 하이데거의 사상으로 환원시키고 싶은 사람은 레비나스의 철학이 말하고 살아내는 윤리적 드러냄을 놓치고 있는 것이며, 또한 그것은 레비나스에 따르면 철학의 비판적 의도가 그 성취를 찾아야만 하는 절대자아의 위기(the crisis of the Self)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사유의 기준을 합리성 내지는 존재의 비은폐성에다만 정위시키는 것은   합리성, 비은폐성을 초월하면서도 그것의 궁극적 토대인 어떤 의미를 주길 원하는 담론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를 추측하는 것은 철학하는 사람의 새로운 주의와 태도를 요구한다. 이런 의미는 철학적 담론 그 자체에 새로운 색조를 도입하고 있다. 거의 지각되고 있지는 않지만, 레비나스의 철학에선 현상학적-기술적 언어게임에서 윤리지향적 언어게임으로의 이행이 발생한다. 우리는 아마도 레비나스의 "담론"을 드러냄/개방의 언어로 명명하는 렘시(Ramsey)에 동의할 수 있다.
우리는 어느 정도는 현상학적인 것과 관련된 윤리적 내지 형이상학적 의도를 현상학적이고 과학적인 의도 사이의 관련성과 비교해볼 수도 있다. 과학적 의도를 존재에의 궁극적 접근이라고 주장하는 곳마다, 우리는 과학주의에 빠진다. 이런 의미에서 현상학은 하나의 "과학에 대한 거부"(d saveu de la science)이다. 이것은 현상학이 과학적 의도를 거부하려는 시도이자, 과학적 의도를 하나의 본래적인 근본 체험으로 대치하려는 하나의 시도임을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 보다 폭넓은 문맥에서 실재에 대한 과학적 접근을 도입하는 것은 그것에게 하나의 새로운 관점과 갱신된 인식론적 입장을 제공해준다. 현상학과 형이상학의 관련성은 유사한 방식으로 묘사될 수 있다. 현상학 내지는 존재론적 사유가 또 다른 수단으로는 의문시되지 않는, 실재에 대한 궁극적 접근이라고 주장하는 곳마다, 사실은 레비나스가 존재론적 제국주의라고 부르는 것으로 빠진다. Van de Wiele이 이 문제에 대한 연구를 다음과 같이 결말짓고 있듯이 말이다.

우리는 순전히 형이상학의 제문제에 대해 눈을 감고 있으면서도 가치있는 철학을 생산할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러면 철학이 현상학과 일치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완전히 체험과 동떨어진 일관된 체계로서 형이상학을 평온하게 구축했던 사람들만큼 사악하게 철학에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닌지 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절대적인 것에 대한 초(超)현상학적 탐구는 모든 자아 철학을 의문시하고, 현상학 및 존재의  궁극적 개시인 존재론적 사유에 대한 거부와 일치한다. 레비나스의 하이데거 비판의 철학적 의미는 실재와의 궁극적 관계인 존재론적 사유를 거부하는 데 있다. 레비나스가 하이데거에 대한 반대 입장을 과장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가 때때로 독일 철학자에 대한 모종의 편견과 냉혹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에 대해서는 그리 중요치 않아 보인다.  중요한 것은 먼저 진리의 역사로서 진리사건이 주변의 다른 길이 아닌 바로 타자에 대한 책임감으로서의 윤리적 사건에 토대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오직 이 윤리적 사건에서만이 진리사건과 사유가 모든 전체주의적 경향과 모든 독단성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모든 내재성의 철학을 부숴버리려는 레비나스의 노력은 "현전의 유토피아" 및 "로고스의 우월성"(H. Parret)으로부터 탈주하려는 여타 모든 프랑스 철학, 즉 거의 구조주의 또는 후기구조주의의 특징이 있는 모든 노력들과도 조화를 이룬다. 그러나 이런 노력들이 종종 중성(Neutrum)의 철학으로 퇴락하여, 형이상학의 종말을 선언하는 반면에, 레비나스의 철학은 형이상학적 의도를 사회적 관계를 기초로 하여 변경시키고, 모든 중성적 철학을 거부하는 프로그램을 제공해주고 있다 하겠다. 전체성과 무한(Totalit  et Infini)은 실존의 윤리-종교적 차원에서 실존의 절대적인 것의 경험과 더불어 다소 정교화된 형태의 유물론과 반(反)휴머니즘으로 퇴락하지 않으면서도 근대의 휴머니즘을 초월하여 도달하려는 유일한 길, 다시 말해서 매우 오래된, 주체성의 현대적 관념 및 현대의 반휴머니즘 모두를 흔들고 싶어 하는 신(新)휴머니즘에 다다르는 길, 즉 "타인의 인간성(l'humanit  de l'Autre)"를 발견하려고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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