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윤동주가 키르케고르의 작품을 읽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이미 많은 부분에서 알려진 사실입니다.
오늘은 그의 작품 중에 “십자가”에 대한 간단한 해석을 달고자 합니다. 이 시는 5연으로 된 짧은 시입니다.
2연에 보면,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라고 말합니다.
키르케고르를 공부한 저에게는 이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려는 화자에게,
도저히 그 길을 따라가고 싶지만
삶의 한계를 느끼는 화자의 심정으로 느껴집니다.
3연에 보면,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라고 말합니다.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는 무슨 뜻일까요?
신사참배와 전쟁을 강요하는 1940년대의 교회의 상황입니다.
교회는 일제에 저항하기보다 신사참배를 하며 친일적인 행동을 했습니다.
그런 교회에는 어떤 희망의 종소리, 예언자의 종소리가 울리지 못했습니다.(김응교 교수)
가장 먼저 가톨릭교회가 신사참배를 했고, 성결교, 구세군, 성공회, 감리교회까지 신사참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마지막으로 1938년 장로교마저 신사참배를 결정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화자가 십자가의 길을 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길입니다.
그리하여 화자는 십자가의 길을 가지 못해,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립니다.’
4연에 보면,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이라고 말합니다.
먼저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던 주님을 생각하며,
‘행복한’ 분이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괴로웠던 사나이’이면서도 ‘행복한 분’이기도 합니다.
화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다시 십자가의 길을 생각합니다.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그는 마지막 연에서,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리고 그는 1945년 2월 16일 28세의 꽃다운 나이에 그토록 바라던 광복을 6개월 정도 앞두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죽고 맙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시가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해 두려워 떨었던 한 영혼의 심경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키르케고르의 용어를 빌리자면, 하나님 앞에선 “단독자”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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