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동주와 키르케고르
윤동주의 이 시는 성경의 마태복음 5장 3-10절에 나옵니다.
마태복음의 팔복은 8가지의 복이 열거되어 있으나, 윤동주는 팔복을 ‘슬퍼하는 자’ 하나로만 표현합니다. 윤동주는 절필하였다가 다시 시를 창작하기 시작하는데, 1940년 12월 절필기간을 끝냈다는 신호탄으로 「팔복」, 「위로」, 「병원」을 썼다고 합니다.
이 시는 해석이 난해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팔복」을 비신앙적이며 냉소적인 풍자시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볼 때, 이 시를 냉소적 풍자시로 평가하는 것은 상당한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1940년대 일제강점기의 민족적인 상황과 연관 지어 해석하려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한 두 번은 슬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슬퍼하는 일은 분노할 일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게다가, 영원히 슬퍼한다? 뭔가 이상해 보입니다. 따라서 이런 해석은 필연적으로 냉소적 풍자시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윤동주가 말하는 “슬픔”이란 무엇일가요? 김응교 교수는 여기서 말하는 슬픔을 ‘스플랑크니조마이’ 즉, 예수님의 마음인 ‘긍휼히 여기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연관 지어 해석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시가 키르케고르의 작품 중에서 ‘죄에 대한 슬픔’을 다루고 있는 작품과 가장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키르케고르에게 죄에 대한 슬픔은 영원히 제거 불가능한 슬픔입니다. 죽을 때까지 망각될 수 없는 슬픔입니다.
여기에 다 말씀드릴 수는 없으나, 키르케고르는 도망자 이야기를 합니다. 장발장 스토리는 대충 다 알고 있으니 장발장과 비교해서 설명하자면, 장발장이 어느 날 개과천선하여 옛날의 그를 잊고 착한사람이 되어 시장이 됩니다. 그가 아무리 과거의 죄를 잊고 시장이 된다 해도, 과거의 죄를 망각하는 것, 키르케고르는 이것은 참된 회개가 아니라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키르케고르는 죄에 대한 슬픔은 영원히 망각될 수 없는 슬픔으로 이 슬픔을 기억하는 자에게만 영원한 행복이 예비 되어 있다는 거죠. 또한 이런 과정 중에서 어떤 영적인 성장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이 키르케고르가 말하고자 하는 ‘영적 경건’입니다. 그의 알려지지 않은 명언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나무의 나이는 나이테에 의해 알려지듯,
사람의 영의 나이는 후회와 회개의 나이테에 의해 알려진다.”
따라서 죄에 대한 슬픔을 망각하지 않고 언제나 기억하는 일, 그리하여 그가 어떻게 용서받았는지를 기억하는 일만큼 복된 슬픔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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