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부분은 《죽음에 이르는 병》 서문을 제 나름대로의 번역으로 제공합니다. 가능하면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번역하였음을 말씀드립니다. 먼저 덴마크어 표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목: 죽음에 이르는 병
부제: 덕을 세우는 것과 일깨우는 것을 위한 기독교적이고 심리학적인 해설
모토(독일어)
Herr! gieb uns blöde Augen
für Dinge, die nichts taugen,
und Augen voller Klarheit
in alle deine Wahrheit.
주여,
무익한 것들에 대하여는 약한 눈을,
당신의 모든 진리에 대하여는 맑은 눈을,
주소서.
서문
많은 사람들이 이런 ‘해설(Udviklings)’의 형식이 낯설다고 느낄 수 있다. 이 해설이 그들에게 너무 엄격해서 덕을 세울 수 없고, 덕을 세우는 것이기에 엄격하게 학문적일[#보기1 헤겔 철학과 신학을 의미함] 수 없다. 후자에 관한 한, 나는 아무런 의견이 없다. 그러나 전자에 대하여, 나는 생각이 다르다. 이 해설이 너무 엄격해서 덕을 세울 수 없는 것이 사실이라면, 내가 잘못 이해한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이것을 따를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해설이 모든 사람을 위해 덕을 세울 수가 없다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 해설이 덕을 세우는 특징을 갖고 있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모든 것은, 진실로 모든 것은 덕을 세우기 위해 봉사해야 한다.[#보기2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고전 14:26,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그렇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덕을 세우지 않는 학문성과 과학성과 같은 것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기독교적인 모든 것은 그 표현에 있어 병상에서 의사가 환자에게 말하는 것과 유사해야 한다. 의학적 전문가만이 이를 이해할 수 있을지라도, 이 상황이 환자의 병상이라는 점은 망각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명확히 기독교와 삶과의 관계다.(삶과 학문적인 거리와 대조적으로) 혹은 덕을 세우는 것이 기독교의 윤리적 측면이다. 그 표현의 방식이 아무리 엄격해도, 학문성과 과학성의 종류와는 완전히 다르고, 질적으로 다르다. 이런 과학성과 학문성은 ‘무관심’하다. 이런 학문성의 고상한 영웅주의는 기독교와는 거리가 멀다. 기독교적으로 말한다면, 이런 학문적인 영웅주의는 일종의 비인간적인 호기심이다.
이것이 기독교적 영웅주의다. 확실히 이것은 극히 드물지만, 전적으로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개인이 되기 위해 모험하는 것, 이것이 기독교적 영웅주의다. 이 특별한 개인, 하나님 앞에 홀로 선 개인, 이 거대한 노력과 거대한 책임 앞에 홀로 선 개인이 되기 위해 모험하는 것, 바로 이것이 기독교적 영웅주의다. 그러나 세계 역사를 갖고 놀라운 장난을 하는 것, 혹은 추상적인 인간의 사상을 이끌어내는 것, 이런 것은 기독교적 영웅주의가 아니다.
모든 기독교적 앎이란, 그 형태가 아무리 엄격해도, 염려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염려(Bekymring)[#보기3 이 말은 독일어가 Sorge이다. 하이데거가 주로 사용했던 용어이다.]가 명확히 덕을 세우는 것이다. 염려는 삶과의 관계를, 개성의 현실성을 구성한다. 따라서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나온 진지함을 구성한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무관심한 지식의 고상함은 더 진지해지는 것과 거리가 멀다. 기독교적으로 본다면, 그런 지식의 고상함은 장난에 불과하고, 일종의 병이다. 한편, 진지함은 덕을 세우는 것이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이 작은 책은 대학생도 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대학교 교수라 하더라도 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논문의 형태가 이대로 된 것은 적어도 신중하게 고려한 것이다. 또한 심리학적으로도 정당한 것처럼 보인다. 너무 형식적인 나머지 별로 의미가 없는 더 형식적인 스타일이 존재한다. 일단 이런 형식적 스타일이 지나치게 익숙해지면, 쉽게 무의미해진다.
한 마디를 더 한다면, 불필요한 것 같지만, 그럼에도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제목에서 말하듯이, 전체 책에서 절망은 치료가 아닌 병으로 해석되고 있다는 것을 언급할 수 있다. 절망은 그 정도로 변증법적이다. 따라서 기독교적인 용어로, 죽음은 영적으로 가장 깊고 비참한 상태를 위한 표현이다. 하지만 절망의 치료는 단순히 죽는 것이고, 세상에 대하여 죽은 것이다.
1848년
원고에는 있었으나, 서문 다음에 사용되지 않은 기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책에는 포함되지 않는 기도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기도
[여백에서: 주의. 사용하지 말 것. 왜냐하면 여기에서 기도는 너무 덕을 세우는 어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하늘의 계신 아버지!
회중들은 아프고 슬퍼하는 모든 자들을 위해 주님께 너무 자주 중보기도를 드립니다. 우리 중에 누구라도 치명적인 질병으로 죽음에 문턱에서 누워 있다면, 회중은 종종 특별한 중보기도를 드립니다. 우리 각자가 어떤 질병이 죽음에 이르는 병인지 올바르게 깨닫게 하소서. 이런 식으로 우리 모두가 어떻게 아픈지를 깨닫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주님은 이 병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자들을 치유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병을 갖고 있으나 주님은 이런 식으로 아프다는 것을 깨닫는 자들에게서만 이 병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이 병 가운데 있는 우리가 주님을 의지함으로 치유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성령님이신 하나님이여, 우리가 정직하게 치유되기를 원할 때, 성령님은 우리를 도우러 오십니다. 성령님이여, 의사의 도움을 거절하며 파멸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의사에게 남을 수 있도록 우리와 함께 하소서. 이 병으로부터 구원하소서. 의사와 함께 하는 것이 이 병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의사와 함께 있을 때에만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JP III 3423 (Pap. VIII2 B 143) n.d., 1848
덴마크어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Forord
Mange vil maaskee denne »*Udviklings« Form forekomme besynderlig; den vil synes dem for streng til at kunne være opbyggelig, og *for opbyggelig til at kunne være streng videnskabelig. Hvad dette Sidste angaaer, da har jeg derom ingen Mening. Hvad det Første derimod angaaer, da er dette ikke min Mening om den; og var det Tilfældet, at den var for streng til at være opbyggelig, saa er det efter mit Begreb en Feil. Eet er det jo, om den ikke kan være opbyggelig for Enhver, fordi ikke Enhver har Forudsætninger til at følge den; et Andet, at den har det Opbyggeliges Charakteer. *Christeligt bør nemlig Alt, Alt tjene til Opbyggelse. Den Art Videnskabelighed, som ikke tilsidst er opbyggelig, er netop derved uchristelig. Alt Christeligt maa i Fremstillingen have Lighed med *en Læges Foredrag ved Sygesengen; om end kun den Lægekyndige forstaaer det, bør dog aldrig glemmes, at det er ved Sygesengen. Dette det Christeliges Forhold til Livet (i Modsætning til en videnskabelig Fjernhed fra Livet), eller denne det Christeliges ethiske Side er just det Opbyggelige, og den Art Fremstilling, hvor streng den end forresten kan være, aldeles forskjellig, qvalitativ forskjellig fra den Art Videnskabelighed, der er »*ligegyldig«, hvis ophøiede Heroisme christelig er saa langt fra at være Heroisme, at den christelig er en Art umenneskelig Nysgjerrighed. Det er christelig Heroisme, og sandeligen den sees maaskee sjelden nok, at vove ganske at blive sig selv, et enkelt Menneske, dette bestemte enkelte Menneske, ene lige over for Gud, ene i denne uhyre Anstrengelse og dette uhyre Ansvar; men det er ikke christelig Heroisme, at *narres med det rene Menneske, eller *lege Forundringsleg med Verdenshistorien. Al christelig Erkjenden, hvor streng dens Form end forøvrigt er, bør være bekymret; |[IV] fax men denne Bekymring er just det Opbyggelige. Bekymringen er Forholdet til Livet, til Personlighedens Virkelighed og saaledes, christelig, Alvoren; den|68 ligegyldige |11, 118Videns Ophøiethed er, christelig, langt fra at være mere Alvor, den er, christelig, Spøg og *Forfængelighed. Men Alvoren er igjen det Opbyggelige.
Dette lille Skrift er derfor i een Forstand saaledes beskaffent, at en *Seminarist kunde skrive det; i en anden Forstand dog maaskee saaledes, at ikke enhver Professor kunde skrive det.
Men at Afhandlingens *Indklædning er den den er, er idetmindste vel betænkt, og dog *vistnok ogsaa psychologisk rigtigt. Der gives *en høitideligere Stiil, som er saa høitidelig, at den ikke er meget betegnende, og som, da man er kun altfor vant til den, let bliver Intet sigende.
Forøvrigt kun een Bemærkning, *vistnok en Overflødighed, men som jeg dog vil *forskylde: jeg vil een Gang for alle gjøre opmærksom paa, at Fortvivlelse i hele dette Skrift, hvad Titelen jo siger, opfattes som Sygdommen, ikke som Helbredelsesmidlet. Saaledes dialektisk er nemlig Fortvivlelse. Saaledes er jo ogsaa *i christelig Terminologi Døden Udtrykket for den største aandelige Elendighed, og Helbredelsen dog just at døe, *at afdøe.
I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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