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wo Discourses at the Communion on Fridays
- To Taler ved Altergangen om Fredagen
- Written 1849, published 1851
- KW18, SKS12, SV12
다섯 번째 시기: 직접 전달(1848-51년)
금요일 성만찬 때의 두 편의 강화Two Discourses at the Communion on Fridays
키르케고르의 대부분 직접적인 종교적 저술은 "강화discourses"라 불린다.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이다.(키르케고르의 종교적 강화에 대한 개요는 <열여덟 편의 건덕적 강화Eighteen Upbuilding Discourses>를 참고하라.) 이 강화들은 건덕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권위가 없다." <천재와 사도의 차이>에서 서술한 것처럼(이 부분은 <두 개의 윤리-종교적 소론>을 참고하라), 사도는 절대자와 관계가 있는 반면, 그는 천재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해시 태그 "권위"를 참고하라.
키르케고르의 가명 저자를 통한 독특한 공격 계획은 '뒤에서 상처를 주는' 것이었는데, 이는 그의 '경건한 기만(godly deception)'의 일부였다. 그의 철학적인 작품들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은밀하게 주입하기 위한 것이었다. 반면에 그의 건덕적 강화는 가명적인 작품들과 함께 동반된 것으로, 직접적이고 종교적이어서 이 작품들과는 대조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종종 철학적 작품들에 비해 별로 관심이 없었다. 이것은 키르케고르에게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키르케고르의 저술 방법을 참고하라.
이 책의 헌사는 다음과 같다.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언젠가 그의 이름이 밝혀질 그에게,
이 작은 책을, 전체 저작을,
바칩니다.
처음과 같이.
이는 키르케고르가 프리츠 슐레겔과 결혼한 후 접근해 우정의 손을 내밀었던 그의 전 약혼자 레기네 올센에 대한 언급이 분명하다.
이것은 종교적 강화이지만 키르케고르는 서문에서 그의 가명을 언급한다. 키르케고르의 가명은 그의 저술 과정에서 뒤늦은 생각이 아니었다. 그의 두 번째 주요 작품이자 첫 번째 가명 작품인 <이것이냐 저것이냐>는 여러 개의 가명으로 제작되었다. 키르케고르는 대중이 누가 썼는지 모르도록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이 작품은 최종 초안은 여러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인쇄소의 직원들도 속았을 것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시작하여 점진적으로 발전시켰던 저술 작업(authorship)은 여기에서, 이 제단 앞에서, 결말을 짓는 안식처를 찾는다. 이곳에서 저자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가장 잘 깨닫고 있기에, 자신을 진리의 증인이라 부르지 않는다. 아니, 그는 일종의 특이한 시인이자 사상가일 뿐이다. 그는 권위가 없으며[#1 “권위가 없다”는 말은 키에르케고어가 그의 강화집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 그는 강화집에서 기독교를 변호하는 명작을 많이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이 말을 사용하기 좋아했다.]
, 가져올 만한 새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아니, “가능하다면 내면적인 방법으로,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오래되고 익숙한 본문을,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관계에 대한 원래의 본문을 꼼꼼히 읽기를 바랐을 뿐이다.”-(<결론의 비학문적 후서>의 후기를 보라.)(번역 초안, 4쪽)
서문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은 간결하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달한다.
이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을 때[#2 제단을 향한다는 의미이다], 나는 더 이상 추가할 아무 것도 없다. 그렇지만, 이것만은 표현하게 해주소서. 어떤 면에서 이것은 나의 인생이요, 인생의 내용이요, 그것의 충만, 그것의 지복, 그것의 평화와 만족이다. 이것, 혹은 인생에 대한 이런 관점은 인간성(humanity, Menneskelighed)과 인간적 평등(Menneske-Liighed)에 관한 생각이다.[#3 덴마크어를 확인해 보면 알다시피, 덴마크어의 “인간성(humanity, Menneskelighed)”이라는 말은 “인간-평등성(Menneske-Lighed)”의 합성어이다.] 즉, 기독교적으로 모든 사람(단독자)은, 무조건적으로 모든 사람은, 다시 한 번, 무조건적으로 모든 사람은, 똑같이 하나님께 가깝다. 얼마나, 얼마나 평등하게 가까운가? 모든 인간은 무조건적으로 그분에 의해 사랑받는다.
따라서 사람들 사이에 평등이, 무조건적인 평등이 존재한다. 어떤 차이가 있다면, 아, 이 차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평화로움(peaceableness)로움과 닮았다. 방해받지 않은 채, 이 차이는 눈곱만큼도 평등을 방해할 수 없다. 차이는 이것이다:
한 사람은 그가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명심한다. 아마도 허구한 날, 70년 동안 허구한 날, 단 하나의 갈망으로, 영원히 이것을 마음에 새긴다. 그리하여 그는 진정으로 이 생각을 깨닫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가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는 축복된 생각에 사로잡혀서 말이다. 아, 이것은 그의 미덕 때문이 아니다!
다른 사람은 그가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도 매년마다, 매일같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도 못한 채, 흘러갈 뿐이다. 혹은 그는 아내에게, 자녀에게, 그의 친구와 동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행복해 한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혹은 그는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슬퍼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는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첫 번째 사람은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결백합니다. 결국 다른 누군가 나에게 아낌없이 주어진 것만큼 그에게 주어진 사랑을 무시하거나 경멸한다면, 나는 어쩔 도리가 없군요.”
어떤 차별도 만들지 않는 이 무한하고 거룩한 사랑이여! 슬프다, 인간의 배은망덕이로다! 우리 인간들 사이에서의 평등, 이 평등에서 우리는 완전히 서로 닮는다니! 곧, 우리 중에 누구도 그가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에서 평등이 있다!
키르케고르는 항상 개인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개별적으로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들의 평등을 말할 때조차도, 우리가 비록 똑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 받기는 하지만, 모두 다른 종류의 개인이라고 주장한다. 키르케고르의 시대와 우리 시대에서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권리를 강조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동등하게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좀처럼 강조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이 항상 우리를 기분 좋게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자부심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받는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키르케고르는 우리가 본질적으로 사랑받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적게 사함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To Whom Little is Forgiven, the Same Loveth Little
첫 번째 강화는 누가복음 7장 47절의 본문을 사용한다. 키르케고르는 같은 본문을 <한 편의 건덕적 강화>에서도 사용한다.
경건한 독자, 주의 만찬에 초대가 선포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때 단독자는 초대에 응답하고 주의 만찬에 참여한다. 그 후에 그는 주의 만찬을 떠나 돌아온다. 거기에 다른 말씀도 있다. 이 말씀들은 교회 문의 안 쪽에 새겨져 있다. 따라서 교회에 들어가고 있는 사람은 이 말씀을 읽을 수 없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만 읽을 수 있다. 이 말씀은 이렇다. “적게 사함을 받는 자는 적게 사랑한다.” 전자의 말씀은 거룩한 주의 만찬의 초대다. 후자의 말씀은 거룩한 주의 만찬의 칭의(justification)다....
“적게 사함을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 이것은 심판의 말씀일 뿐만 아니라, 위로의 말씀이다....
일반적으로 이 말씀은 이렇게 제시된다: 정의, 이것은 가혹한 심판이다. 사랑은 너그러움(leniency)이다. 따라서 사랑은 심판하지 않는다. 사랑이 심판한다면, 사랑의 심판은 너그러운 심판이다. 아니, 아니다. 사랑의 심판은 가장 가혹한 심판이다. 가장 가혹한 심판이 세상을 통과하지 않았는가? 홍수보다 더욱 가혹하다. 바벨탑에서 언어의 혼잡보다 더욱 가혹하다. 소돔과 고모라의 파괴보다 더욱 가혹하다. 곧, 이 심판이 그리스도의 결백한 죽음 아니었던가? 이 죽음은 사랑의 희생이었다. 그러면 무엇이 이 심판이었는가? 확실히 이 심판은 이것이다: 사랑이 사랑받지 못했다. 여기에서도 또한 그렇다.
키르케고르는 독자가 이 구절의 해석을 오해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지만, 자신의 입장을 빨리 정의하지는 못한다. 첫째, 그는 사랑의 기초를 쌓고 싶어한다. 사랑은 솜털이나 감상적인 것이 아니다. 사랑은 역동적이고, 엄격하고, 격동적이다. 그런 다음 그는 우리에게 글의 일반적인 오독을 지적하며, 간략하게 공로 없는 은혜의 교리를 언급한다.
지금 모든 것이 변화되었다. 하지만 “사랑”만은 변하지 않았다.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사랑은 애정 어리게 그를 기다렸던 대로 동일하게 변하지 않은 채로 남는다. 사랑은 감히 그와 끝내기를 결심하지 않는다. 감히 그와 헤어지기를 구하지 않는다. 다만 그와 함께 남아 있다. 지금 “그가 적게 사랑했다고” 결론 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정의가 아니다. 지금 천국에서 기뻐하며, “그가 적게 사랑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사랑이다. 다시 말해, 지금은 변화되었다. 한 때는 그랬었다. 하지만 지금, 지금 그는 많이 사랑한다.
하지만 그때 죄의 용서가 인정하다시피, 행위로 된 것이 아니라, 사랑의 “공로”로 된 것이 맞지 않는가? 적게 사함을 받은 자가 적게 사랑한다고 말할 때, 이것은 이 문제를 결정하고 있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함축하고 있지 않은가? 죄 사함을 받은 것인지, 얼마나 받은 것인지는 사랑이 결정하는 것이 아닌가? 결국 죄 사함은 공로로 된 것이 아닌가? 오, 아니다. 같은 복음서에 조금 앞쪽에서(42절 끝부분), 그리스도는 빚진 자에 대해 말한다. 그 중 하나는 많이 빚졌고 다른 하나는 적게 빚졌다. 둘 다 용서를 구했다. 주님은 묻는다.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느냐?”
대답은 많이 사함을 받은 자라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공로의 사악한 지역에 들어가지 않은지를 유의하라. 다만 어떻게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이 남아 있는지를 유의하라! 당신이 많이 사랑할 때, 당신은 많이 용서받는다. 그리고 당신이 많이 용서받을 때, 많이 사랑한다.(번역 초안, 14-5쪽)
이것은 전체 키르케고르 작품 중에서, 그가 거의 엄격하게 신학적 논쟁을 피했다는 것을 볼 때 보기 드문 구절이다.
여기에서 사랑은 마치 믿음과 같다. 기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치유한 불행한 자 중에 하나를 상상해보라. 고침을 받기 위해, 이 사람은 믿어야 한다. 지금 그는 믿고 있고 고침을 받는다. 지금 그는 고침을 받는다. 지금 그가 구원받는다는 것, 그의 믿음은 두 배만큼 강해진다. 하지만 이것은 이런 식이 아니다: 그가 믿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고 모든 것은 끝났다. 아니, 믿음의 성취는 믿음을 배가시킨다. 믿음의 성취가 있은 후에, 그의 믿음은 그가 구원받기 전보다 두 배만큼 강하다. 많이 사랑하는 이 문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많이 사랑하고 많이 용서받은 이 사랑은 강하다. 약함 중에 거룩하게 강해진다. 하지만 같은 사랑이 다시 한 번 사랑할 때, 두 번째 사랑은 훨씬 더욱 강하다. 왜냐하면 많이 용서받았기 때문이다.(번역 초안, 16쪽)
키르케고르는 마지막에서 강화의 시작 부분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이 구절은 우리가 제단을 떠날 때 그것을 읽고 요동칠 수 있도록 쓰여진 것이다.
하나님이여, 이 요동치는 강화에 복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이 강화가 오직 선을 위해 사람들을 요동치게 하소서. 그리하여 이 사람들이 주의 만찬에서 고요해지고, 모든 죄에 대한 은혜로운 용서를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소서.(번역 초안, 17쪽)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Love Shall Hide the Multitude of Sins
베드로전서 4장 8절을 본문으로 하고 있는 이 두 번째 강화에서 키르케고르는 개인, 특히 개인의 양심과 죄의식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개인적으로 이 말씀에 대해 주석하며 시작한다. 그는 얼마나 자주 우리의 죄와 단점을 다른 사람들에게 숨기고 싶어 했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우리가 노력한 만큼, 설사 성공했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그것들을 숨길 수 없다. 우리의 양심은 너무 강하다.
반면, 모든 사람의 저 깊은 내면 속에 어디에서든 신중하게 현존하고 있는 비밀을 주고받는 자가 있는 것도 확실하다. 그것은 양심이다. 사람은 아마도 세상에서 그의 죄를 숨기는 데에 성공할 수도 있다. 어리석게도 죄를 숨기는 데에 성공한 것을 기뻐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더 정직해진다면, 그가 그 죄들을 드러낼 만한 용기를 갖지 못했다는 것은 통탄할 만한 약점이요, 비겁이었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서 그의 죄를 숨길 수 없다. 이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절대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숨겨진 죄는 더 이상 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 죄가 하나님께 숨겨진다면, 이것은 저 경우가 아닐지라도, 더 이상 죄가 아니다. 그가 자기 자신을 알자마자, 그가 자기 자신을 알고 있는 모든 것에서, 그는 또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은 그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 편의 건덕적 강화>에서처럼, 키르케고르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할 때 잊어버린다는 주제로 되돌아간다.
오, 내가 아무도 온 적도 없고 오지 않는 무인도로 도피할 방법을 알았더라면.
오, 내가 도피할 수 있는, 나 자신으로부터 멀리 도망칠 수 있는 그런 도피처가 있었더라면. 심지어 나의 죄에 대한 의식조차 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숨을 수 있는 피난처가 있었더라면!
아무리 좁을지라도, 나와 나의 죄를 분할 수 있는 경계가 있었더라면!
아무리 작을지라도 갈라진 심연의 한 편에 내가 설 수 있는 곳이 있고 다른 한 편에는 나의 죄에 대한 의식이 남을 수 있었더라면.
용서가 있었더라면, 그래서 용서가 나의 죄책감을 증가시켜도 나에게서 죄를, 죄에 대한 의식을 가져갈 수 있었더라면.
망각이 있었더라면!
제목이 암시하듯이 키르케고르는 성찬식 때에 관한 것으로 이러한 강화를 썼다.
오직 그분 안에 거할 때에만, 그분 안에서 당신 자신의 삶을 살 때에만, 당신은 덮개 아래에 있다. 오직 그때만 허다한 죄를 덮는 덮개가 존재한다. 이것이 주의 만찬이 그분과의 교제(communion)라고 불리는 이유다. 이것은 단순히 그분을 기념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이것은 또한 당신이 그분과 교제한다는 약속으로만 있는 것도 아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교제다. 당신이 매일의 삶 속에서 보존하기 위해 분투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교제다. 당신 자신에게서 더욱 더 자기 자신의 삶을 살고, 그분 속에서, 허다한 죄를 덮는 그분의 사랑 속에서 자기 자신의 삶을 삶으로써 말이다.
"자신의 삶을 산다는 것," 이것은 주관적 내면성이다. 키르케고르가 교회를 위해 썼다 해도, 그는 개인에게 초점을 맞춘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냥 몸으로 서는 것이 아니고, 벌거벗은 자기(self)로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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