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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새와 백합에게 배우라

《새와 백합에게 배우라》 출간!

by 엉클창 2022. 8. 13.

 

안녕하십니까? 카리스 아카데미 대표 이창우 목사입니다.

책 출간 소식 알립니다.  이 작품은 1847년에 출판된 《건덕적 강화》에 실린 3부의 작품 중에 2부에 해당됩니다. 이 작품의 덴마크어 원 제목은 "Hvad vi lære af Lilierne paa Markenog af Himmelens Fugle"으로, 우리 말로 옮기면,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에게서 우리가 배우는 것"입니다. 이 작품은 총 세 개의 강화로, "사람인 것에 만족하기," "사람인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사람인 것에 얼마나 복된 행복이 약속되어 있는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키르케고르의 강화가 철학이나 신학이라기보다는 문학적 면모가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짧지만 굉장히 중요한 기독교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그의 실존의 3단계 사상도 들어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이란 무엇인지 그 본질을 다루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다루고 있는 전반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인 것에 만족하기

1장의 주제는 "사람인 것에 만족하기"입니다. 우리가 왜 사람인 것에 만족하지 못할까요? 그 이유는 바로 '비교'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과 다른 사람을 끊임없이 비교합니다. 비교 때문에 사람인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무언가 다른 것을 추구한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우리가 이 ‘비교’하는 마음을 제거할 수 없다는 겁니다. 아무리 비교하지 않으려 해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비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따라서 키르케고르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가 있는 곳으로 초대합니다. 이 공간의 특징은 인간의 비교가 닿지 않는다는 겁니다. 바로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투명성’입니다. 인간의 비교가 있는 곳에서는 내가 누구인지 밝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 명확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가 있는 곳은 인간의 비교가 닿지 않는 곳이므로, 더욱 나 자신이 누구인지 명확히 알 수 있다는 것이죠. 이것은 키르케고르가 그렇게도 강조했던 ‘하나님 앞에서’와도 맥을 같이 합니다. ‘하나님 앞에’ 있을 때만 우리의 전존재가 다 드러나듯이, 바로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가 있는 곳이 그런 역할을 합니다.  

먼저,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가 있는 곳으로 초청받은 자가 누구입니까? 비교 때문에 염려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행복할 수 없었고, 심지어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처럼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말합니다.  “저 들의 백합을 보라!” 염려하는 자는 복음의 명령대로 백합을 봅니다. 그런데 이 백합은 정원사가 있는 정원의 백합이 아닙니다. 정원사가 있는 곳은 혼란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정원사가 있는 곳은 정원사가 가꾸었기 때문에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저 들의 백합을 보십시오. 들의 백합은 아무도, 아무도 가꾸지 않았습니다. 즉, 백합은 버려진 자처럼 있습니다. 마치 염려하는 자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버려진 것처럼 보이는 백합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입이 딱 벌어집니다. 이렇게 염려하는 자는 백합의 아름다움에 빠져 백합을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이 스쳐갑니다. 버려진 것처럼 보이는 백합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은 틀림없이 누군가 가꾸었다는 사실을, 또한 버려진 것처럼 보이는 염려하는 자 역시 버림받은 것이 아니란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때 그는 사람인 것에 만족할 수 있는 첫 번째 생각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1장은 이렇게 우리가 사람인 것에 만족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비교가 닿지 않는 곳으로 가야함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그야말로 초연결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전세계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사람과 사물, 사물과 사물끼리도 연결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단 하나의 존재만은 예외인 것처럼 보입니다. 바로 '하나님'만은 이 연결에서 제외된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인간의 삶은 비극입니다. 키르케고르의 주장대로, '하나님 앞에서'만 인간의 전존재가 드러나는 것이 사실이라면, 현대가 구축하고 있는 세계는 모든 걸 다 연결해도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비극'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나 자신이 누구인지, 사람인 것에 만족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모든 혼돈으로부터 벗어나 참 하나님을 경험하는 지점, 다시 말해, 세상과의 연결을 단절하고 오직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저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가 있는 곳으로 초청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인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2장의 핵심 주제는 '아름다움'입니다. 이 단어는 원래 덴마크어로는 'herligt'라는 단어로 '사랑스러운', '영광스러운', '아주 멋진' 등으로 옮길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내용상 이 강화가 미학적 담론을 포함하고 있기에 영어로는 'glorious'로 옮기고 있으나 이 단어를 주로 '아름다운'으로 옮겼습니다. 키르케고르는 이 주제를 다루기 위해 성경본문으로 마태복음 6장 29절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으니라."

백합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 입은 것이 이 꽃보다 아름답지 않습니다. 키르케고르는 여기에서 백합이 입은 옷은 '존재론적인 옷'임을 강조합니다. 다시 말해, 백합의 옷은 백합의 존재와 분리할 수 없습니다. 백합의 옷은 백합 자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백합은 아무리 아름다울지라도, 하나님을 닮지는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지음받은 것은 인간뿐입니다.  하나님을 닮지 않은 백합이 이렇게 아름답다면, 하물며 하나님을 닮은 인간은 얼마나 더 아름답습니까! 여기에서 확실한 문제점을 찾습니다. 인간이 이 아름다움을 상실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아름다움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 키르케고르는 솔로몬이 입은 그 영광을 버리는 길만이 하나님을 닮을 수 있는 방법으로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분입니다. 따라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닮은 모습은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입니다. 눈에 보이는 백합의 아름다움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솔로몬의 입은 영광을 버리는 길'이란 무엇일까요? 인간은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고 불러 왔습니다. 즉, 스스로 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은 창세기 1장 28절과 관련이 있습니다. 즉,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기 위해 이 세상의 '지배자'로 군림한 것입니다. 하지만, 키르케고르가 보기에 이 길은 필경 망하는 길입니다. 기독교가 긴 역사를 지나오면서 이 말씀구절을 실천해 온 것은 불행하게도 제국주의의 실현이었습니다. 아래 그림을 보면, 성경을 읽고 있는 선교사와 원주민을 착취하고 있는 서구의 침략자가 공범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키르케고르는 창세기 1장 28절보다 더 중요한 구절이 창세기 1장 27절임을 강조하면서 본문에서는 '첫 번째 생각'이라고 말합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기독교가 '정복'에만 관심이 많았고, 이 형상을 닮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던 겁니다.

결론적으로, '정복'을 통해서는 하나님을 닮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닌 자(nothing)'가 되었을 때만이, 하나님을 더욱 닮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솔로몬의 영광을 버리는 길'이고, 참다운 아름다움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무'가 되는 이 운동을 '예배'라 부릅니다.


사람인 것이 얼마나 복된 행복이 약속되었는지

이것은 이 책의 마지막 주제인 3장에 해당됩니다. 특별히 3장에서는 마태복음 6장의 말씀 중에서, 33절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먼저, 키르케고르는 이 작품에서 하나님 나라는 사람에게 약속되어 있는 행복의 이름으로 소개합니다. 복된 행복은 결국 이 강화의 핵심입니다. 이는 또한 영원하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입니다. 이 영역은 오직 믿음의 눈으로만 보입니다. 반면, 보이는 세상에는 슬픈 운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 자연의 평화는 언젠가는 창백해지고, 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키르케고르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모든 것들', 혹은 다른 복음서에 쓰인 대로라면, 나머지. 오,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복된 행복입니까! 당신이 새와 백합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얻는다면, 자연이 갖고 있는 아름다운 모든 것을 얻는다면, 그것은 모두 이 단어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나머지, 이 모든 것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이 모든 것들과 비교할 때, 마치 이 모든 것들을 무시하는 것처럼, 경멸하는 것처럼, 그것들에 초연한 것처럼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다 소개할 수는 없지만, 키르케고르에게 하나님 나라는 믿는 자의 궁극적 목표요,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자체입니다. 본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시작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이고 의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의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기 위해 어딘가로 출발하는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반대로, 당신은 머문 자리에 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당신에게 할당된 과업입니다. 이 장소에서 이탈하여 어디론가 찾으러가는 것은 이미 불의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다른 어딘가에서 먼저 구해야만 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때 당신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했다는 것은 진실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세계가 사라지고 쇠락으로 침몰하는 동안,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머문 자리에 남습니다. 그리고 시작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지진이 나면 사람들은 더 안전한 장소로 도피합니다. 산불이 나면 나무가 없는 지대로 도피합니다. 홍수가 나면 더 높은 지대로 도피합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세계가 쇠락으로 침몰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때 그는 도피할 수 있는 다른 장소가 없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머문 자리에 남아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먼저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궁극적으로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복음은 말합니다.

“없어질 것도 영광 가운데 있다면, 길이 있을 것은 훨씬 더욱 영광가운데 있을 것이다.”(고린도후서 3:11)

빈곤 가운데 사는 것이 힘들다면, 빈곤에 대하여 죽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이별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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