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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시기의 작품

두려움과 떨림 Problema III

by 엉클창 2023. 8. 9.

 


Problema III
아브라함이 그의 시도를 사라에게, 엘리에셀에게, 이삭에게 숨긴 것은 윤리적으로 정당한가?

 

그 자체로 윤리적인 것은 보편자(det Almene)입니다. 결국 보편자로서 폭로된 것입니다. 단독자는 직접적이고, 감각적이고, 심리적(정신적)인 것으로 규정되며, 은폐된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윤리적 과제는 은폐에서 자신을 풀고 보편자 안에서 폭로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가 은폐된 것에 남고자 바랄 때마다, 죄를 범하게 되고 영적 시험에 빠집니다. 자신을 폭로함으로써만 그는 이 시험에서 나올 수 있지요.

다시 한 번 우리는 같은 지점에 섭니다. 단독자로서 단독자가 보편자보다 더 높다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는 은폐가 아니라면, 아브라함의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윤리적 중개자(de ethiske Melleminstantser)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은폐(Skjulthed)가 있다면, 우리는 역설에 직면하게 되지만 이것은 매개될 수 없습니다. 역설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독자로서 단독자는 보편자보다 높은 반면, 보편자는 명확히 매개(Mediationen)이다.

헤겔 철학은 어떤 정당화된 은폐도, 어떤 정당화된 헤아릴 수 없는 것(Incommensurabilitet)도 가정하지 않습니다. 헤겔 철학이 폭로를 요구하는 것도 일관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여기며, 믿음에 대하여 말하기 원할 때, 이 철학은 약간은 혼란스럽습니다. 믿음은 첫 번째 직접성이 아니라 이후의 직접성입니다.[보기1] 첫 번째 직접성은 심미적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헤겔 철학은 확실히 옳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심미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면, 믿음은 결코 존재한 적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언제나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전체 문제를 순수하게 심미적으로 고찰하는 것, 저 끝에서 심미적인 탐구를 시작하는 것이 최고로 좋습니다.[보기2 ] 잠시나마 나는 온전히 여기에 집중하도록 독자를 초대하는 반면, 나는 이 주제를 해설할 작정입니다. 내가 여기에서 더 구체적으로 고찰하고자 하는 범주는 흥미로운 것(det Interessante)[보기3]입니다. 이 시대가 in discrimine rerum(역사의 전환점에) 있으므로, 특별히 지금 이 범주가 중요해지는 것이지요. 실제로 이것은 전환점의 범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일어나는 일이지만 이 범주를 최선을 다해 사랑한 후에 너무 성장한 나머지 멀어졌다고 해서 그 범주를 경멸하여서는 안 됩니다. 또한 너무 탐을 내서도 안 됩니다. 한 가지는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즉, 흥미롭게 되는 것, 흥미로운 삶을 갖는 것은 어떤 손재주가 아니라 중대한 특권입니다. 이 특권은 영적인 세계의 모든 특권들처럼, 오직 심각한 고통으로만 살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지금까지 살았던 사람 중에 가장 흥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가장 흥미로운 삶이었고요.[보기4] 그러나 이 존재가 신(Guden)에 의해 그에게 할당된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가 스스로 이 삶을 얻어야 했기에, 환난과 고통에 대해 문외한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존재를 헛되이 하는 것, 그것은 더욱 진지하게 이런 삶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시대에 그러한 노력의 예를 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흥미로운 것은 어떤 경계 범주, 미학과 윤리학의 경계 영역(confinium)입니다. 따라서 이 시험은 언제나 윤리학의 영역으로 들어가야 하는 한편, 의미를 얻기 위해서는 미학적 열정과 욕망(Concupiscents)과 함께 이 문제를 파악해야 합니다. 요즘 윤리학이 이런 문제와 관련지으려는 것은 거의 보기가 드믑니다. 그 이유는 체계(Systemet)[보기5]가 이 문제에 대한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논문에서 다룰 수 있습니다. 게다가, 더 구체적으로 조사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간단하게 만들 수 있고, 그런데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서술어를 통제할 수 있다면, 한 두 개의 서술어로 전체 세계를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체계 안에는 그런 작은 단어를 위한 여지가 있는 것 아닌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불후의 명작 "시학"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δυο μεν ουν του μυϑου μεϱη, πεϱι ταυτ' εστι, πεϱιπετεια ϰαι αναγνωϱισις”

“플롯에는 반전과 인지라는 두 요소가 있다.”(제11장 참고)[보기6]

물론 여기에서 나에게 관심이 가는 것은 두 번째 요소, 즉 인지(αναγνωϱισις)[보기7]입니다. 인지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곳마다, 그 자체로 이전의 은폐가 존재합니다. 인식은 해방이고, 극적인 삶에서의 긴장을 푸는 요소인 반면, 은폐는 긴장을 만드는 요소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동일한 11장에서 비극의 다양한 장점과 관련하여 발전시킨 것, πεϱιπετεια ϰαι αναγνωϱισις carambolere(반전과 인지의 융합)[보기8]과 관련하여 발전시킨 것뿐 아니라, 하나의 인지와 이중의 인지에 대하여 쓴 것,[보기9] 나는 여기에서 그것을 다룰 수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그 내면성과 심오함 때문에, 학자들의 피상적인 전지(omniscience)에 지친 사람들을 유혹한다 하더라도, 나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습니다. 나는 그냥 여기에 일반적인 해설을 하고자 합니다.

그리스 비극에서, 은폐(그리고 그 결과로서 인지)는 운명(Fatum)에 토대를 두고 있는 서사적 잔재입니다. 이 운명 속에서 극적인 행동은 사라지고, 은폐는 그 어둡고 신비적 기원을 갖습니다. 이것으로 인해, 그리스 비극은 눈이 없고, 시력을 상실한 대리석 석상의 운명과 동일한 효과를 갖습니다. 그리스 비극은 눈이 멀었습니다. 따라서 이 비극에 올바로 영향을 받으면 어떤 추상성을 갖게 됩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죽입니다.[보기10] 그가 죽인 사람이 아버지라는 것을 죽인 후에야 알게 되지요. 누나는 동생을 희생 제물로 바치려 하지만 바로 그 결정적 순간에 동생임을 깨닫습니다.[보기11] 이런 비극은 반성적인 이 시대에 그렇게 많은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현대극은 운명을 포기했습니다.[보기12] 극적으로 자기를 해방하였고, 시각적이 되었고, 자신의 내면을 응시했습니다. 극적인 의식 속에 운명을 집어넣었습니다. 은폐와 폭로는 영웅의 자유로운 행동이었습니다만, 그는 그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또한 인지와 은폐는 현대극의 필수요소입니다. 예를 들자면 장황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나는 정중하게 다음과 같이 가정하렵니다. 우리 시대는 심미적으로 너무 도발적이고, 강력하고, 흥분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마치 수컷의 소리를 듣거나 수컷이 암컷의 위로 날아가기만 하면 잉태한다는 자고새[보기13]만큼이나 쉽게 생각을 잉태합니다.―나는 ‘은폐’라는 단어를 듣기만 해도 모든 사람들이 십여 편의 소설을 쓸 수도 있고, 그의 소매에서 희극을 쏟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나는 간단할 수 있고, 즉각적으로 일반적인 소견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숨바꼭질을 하는 사람이 극중에 이스트(yeast)를 넣어 어떤 말도 안 되는 말을 숨기면, 우리는 코미디를 얻을 수가 있지요. 하지만 그가 이 아이디어와 관계한다면, 비극적 영웅이 되는 데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코믹한 것의 한 예를 인용하지요.

한 남자가 화장을 하고 가발을 씁니다. 이 남자는 꽤 괜찮은 이성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그를 완전히 매력적으로 만들 화장과 가발의 도움으로 성공하리라 확신합니다. 그는 한 소녀를 사로잡았고 최고의 행복을 누립니다. 자, 이제 이야기의 핵심 지점에 이릅니다. 그가 자신의 기만을 인정한다면, 그의 모든 매력을 잃지 않을까요? 그는 평범한, 맞습니다, 심지어 대머리이기까지 한 것으로 자신을 드러낸다면, 이 때문에 애인을 잃지 않을까요? 

은폐는 그의 자유로운 행위입니다. 미학은 또한 이런 은폐에 대한 책임을 그에게 묻습니다. 이런 종류의 지식은 대머리 위선자의 친구가 아니며, 그를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런 예는 단지 내가 의미하는 바를 암시하기에 충분할 뿐입니다. 코믹은 이 탐구를 위해 관심을 둘 만한 주제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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