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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시기의 작품

두려움과 떨림 Problema III 3편

by 엉클창 2023. 8. 9.

 

 


 

아가멤논은 이피게네이아를 희생하려고 합니다. 미학은 아가멤논의 침묵을 요구합니다. 영웅이 다른 사람에게 위로를 구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가능하면 이 여성들을 배려하기 위해 그것을 숨겨야 할 것처럼 보입니다. 한편, 영웅이 되기 위해 영웅도 클리템네스트라(Clytemnestra)와 이피게네이아의 눈물이 만든 두려운 영적 시험을 받아야 합니다. 미학은 어떻게 했나요? 미학은 출구가 있습니다. 미학은 클리템네스트라에게 모든 것을 폭로할 준비가 되어 있는 늙은 하인이 있습니다. 자, 이제 모든 것은 정상입니다.

그러나 윤리는 어떤 우연도 없고 자신이 부릴 만한 늙은 하인도 없습니다. 미적인 사상은 현실에서 실행되자마자 모순이 발생합니다. 이런 이유로 윤리는 폭로를 요구합니다. 비극적 영웅은 자신이 미적 착각의 먹잇감이 아니므로, 이피케네이아의 운명을 그녀에게 알린다는 점에서 윤리적 용기가 있음을 입증합니다. 이것을 행한다면, 비극적 영웅은 윤리가 기뻐하는 사랑스러운 아들이 될 것입니다.

그가 침묵한다면,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을 더욱 편안하게 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더욱 편안하게 해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는 이 두 번째 동기에 대서는 자유롭다는 것을 압니다. 그가 침묵한다면, 단독자로서 스스로 책임을 떠안습니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오는 어떤 논쟁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비극적 영웅으로서 그는 이것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윤리는 그가 언제나 보편자를 표현한다는 바로 이런 이유로 그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영웅다운 행위는 용기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이런 용기의 한 부분은 그가 어떤 논쟁도 회피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자, 이제 눈물이 강력한 설득의 수단(argumentum ad hominem)이라는 점이 분명해졌습니다. 아무런 감동도 받지 못하는 사람도 눈물에 의해 감동받을 수 있습니다. 이 연극에서, 이피케네이아는 울 수 있도록 허용됩니다. 현실의 삶에서, 그녀는 입다의 딸처럼 두 달 동안 울 수 있도록 허용되어야 합니다. 그것도 홀로 우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발밑에서 말입니다. 그녀의 모든 기술을 다 활용한다 해도, “그것은 눈물뿐입니다.” 그녀는 그의 발 주위에 올리브 가지를 휘감는 대신 자신을 휘감은 것이지요(1224절을 보라).[#보기1 Euripides, tr. Wilster, p. 145. In Complete Greek Tragedies, IV, p. 359. 또한, 한역본 에우리피데스,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2」, 427쪽. 본문에서의 ‘올리브 가지’는 은혜에 대한 열망을 표현한 것이다. 아래의 한역본은 조금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오오, 아버지, 제게 오르페우스의 목소리가 있어 바위가 저를 따라오게 하고, 제 마음대로 누구든 노래로써 설득하고 호릴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그 힘을 사용했을 거예요. 한데 제 재주라고는 눈물뿐이니, 그걸 보여드릴게요. 그것은 제가 할 수 있으니까요. 탄원자의 나뭇가지처럼 저는 여기 이 여인이 아버지에게 낳아 주신 내 몸을 아버지의 무릎에 밀착시키고 있어요. 때가 되기도 전에 저를 죽이지 마세요. 햇빛을 보는 게 저는 달콤해요. 땅 밑을 보라고 저를 강요하지 마세요. 제가 맨 먼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불렀고, 아버지도 저를 맨 먼저 자식이라 부르셨어요. 제가 맨 먼저 아버지의 무릎에 기어올라 가 아버지를 안기도 하고 아버지에게 안기기도 했어요.”]

 

미학은 폭로를 요구하지만 우연의 도움을 받습니다. 윤리는 폭로를 요구하고 비극적 영웅에게 이것이 이루어졌음을 발견합니다. 

윤리가 폭로를 요구하는 이런 엄격함에도 불구하고, 비밀과 침묵이 사람을 더욱 위대하게 만든다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비밀과 침묵이 내면의 결단(Inderlighedens Bestemmelser)이기 때문입니다. 큐피드(Amor)[#보기2 큐피드(영어: Cupid)는 로마 신화의 사랑의 으로 날개를 달고 있고 사랑의 화살을 쏘는 변덕스런 아기로 종종 그려진다. 열정적인 욕망(passionate desire)을 뜻하는 라틴어 Cupido에서 유래되었으며 그리스 신화의 에로스와 상응한다.(위키피디아 참고)]가 프시케(Psyche)를 떠날 때 그녀에게 말합니다.

“당신이 침묵을 지킨다면, 지금 당신의 배 속에 자라고 있는 아이는 신의 자녀가 될 것이오. 하지만 이 비밀을 누설한다면, 인간이 되고 말 것이오.”[#보기3 루키우스 아폴레이우스, 《황금 당나귀》 송병선 역 (파주: 현대지성, 2018), 5장을 참고하라. 이 부분을 한역본에서는 다음과 같이 옮기고 있다.
“당신도 알겠지만, 우리는 곧 가정을 갖게 될 것이오. 당신이 침묵을 지키고 우리의 비밀을 간직한다면, 지금 당신 배 속에 자라고 있는 아이는 세상에서 태어나 신이 될 것이오. 하지만 우리의 비밀을 누설한다면, 그는 신이 아닌 인간이 되고 말 것이오.”]

 

 

윤리가 가장 좋아하는 비극적 영웅은 순수한 인간일 뿐입니다. 나 역시 그를 이해할 수 있으며, 그가 하는 모든 일 역시 개방되어 있어 명백하지요. 더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나는 언제나 역설과,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과 마주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침묵은 이 둘 다이기 때문입니다. 침묵은 악마의 올무이며, 더욱 침묵할수록 악마는 더욱 끔찍해집니다. 그러나 침묵은 단독자와 하나님과의 상호 이해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더욱 진전시키기에 앞서, 나는 몇 가지 시적 개성(poetiske Individualitete)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변증법의 힘으로, 나는 그들을 벼랑 끝에 두어 절망으로 채찍(Disciplin)을 휘두르고자 합니다. 그래야 그들을 가만히 있지 않도록 막을 수가 있고 그들이 불안에 싸여 이런 저런 일을 실토할 수 있도록 하지요.*

*이러한 운동과 자세는 아마도 미학적 치료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만, 믿음과 전체 믿음의 삶이 어느 정도 그렇게 될 수 있는지는 나는 여기에서 미정으로 남겨둡니다. 하지만 내가 빚진 사람에게 감사하는 것이 항상 즐겁기 때문에, 「함부르크 연극론」(hamburgische Dramaturgie)에서 발견한 기독교 희극(drama)에 대한 몇 가지 암시에 대해 나는 레싱(Lessing)에게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삶(완전한 승리)의 순수하게 신적인 측면에 그의 시선을 고정시켰습니다. 따라서 그는 의심했습니다. 아마도 그가 순수하게 인간적인 측면을 더욱 알았더라면, 다른 판단을 했을 수도 있을 텐데 말입니다. (Theologia viatorum[나그네 신학]) 그가 말하는 것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파악하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내가 레씽을 인용할 기회가 생겼을 때 언제나 행복하기에, 바로 인용하지요.
레씽은 독일이 낳은 이해력이 가장 뛰어난 사람 중에 하나일 뿐 아니라, 그의 지식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보기 드문 사람입니다. 이런 능력으로 인해, 사람들은 그와 그의 분석(Autopsi)을 의지합니다. 출처가 불분명한 인용도, 신뢰할 수 없는 개요에서 뽑은 잘 이해가 안 되는 구문도 아무런 두려움 없이 사용합니다. 혹은 고대인들이 훨씬 더 잘 보여준 새로운 것에 대해 나팔을 분다 해도 속을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레씽은 또한 그가 이해한 것을 설명할 줄 아는 가장 비범한 능력의 소유자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거기에서 중단했습니다. 우리 시대에 사람들은 더 앞으로 갑니다. 그리하여 자기들이 이해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설명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정치학」(Politics)[#보기4 다음을 보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V, 4, 1303b 37-1304a 4. 일부의 내용을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신부의 친족들은 비밀리에 조롱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그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을 때 보복을 하려고 성전 금고에서 보석 하나를 신부의 기물들 가운데서 꺼냈다. 그는 성전 강도로 사형에 처할 지경에 이르렀다.”]에서 결혼 문제에서 비롯된 델피의 정치적 혼란에 대한 이야기를 말 하고 있습니다. 점쟁이는 결혼을 하게 되면 재앙이 닥치리라 신랑에게 예언합니다. 신랑은 신부를 데려 와야 할 결정적 순간에 갑자기 그의 계획을 취소합니다.―그는 결혼하기를 거부한 것이지요. 나는 이 문제를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역사적 재앙은 다음과 같습니다. 복수를 위해 가족은 그의 부엌 식기 사이에 성전 그릇을 놓아두었습니다. 그는 성전 도둑놈으로 정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보잘것없는 문제이지요. 왜냐하면 이 문제는 가족이 복수한 것이 비범했는지 어리석었는지에 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가족은 영웅의 변증법을 이끌어냈다는 것만으로도 이상적 의의를 획득합니다. 게다가, 그가 결혼하지 않음으로써 위험을 피하려 할 때 바로 위험에 빠져들고 또한 그의 목숨이 이중적인 방법으로 신적인 것과 접촉하게 된다는 것, 이것이 운명적입니다. 즉 처음에는 점쟁이의 말을 통해서, 그 다음에는 성전 강도라고 정죄를 받음으로써 신적인 것과 접촉하게 됩니다.

 

델피에서의 이 사건은 눈물 없이 지나기가 어렵습니다. 시인이 이 사건을 활용하고자 한다면, 안전하게 동정에 의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도 자주 인생의 망명자였던 사랑이 다시 하늘의 도움까지 박탈당하다니 이것이 두렵지 않을까요? 결혼은 하늘이 맺어준다고 하는 옛 속담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이 속담은 거짓이 아닌가요? 일반적으로 악한 영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갈라놓으려는 온갖 유한한 곤경과 환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자기편에 하늘이 있고, 따라서 이런 거룩한 동맹(denne hellige Alliance)으로 모든 적을 정복합니다.

여기에서는 하늘이 합쳐놓은 것을 갈라놓는 것이 결국 하늘입니다. 누가 이런 일을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어떤 신부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조금 전에 신부는 가장 아름답게 꾸미고 신부 방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랑스런 신부의 친구들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꾸몄으며 온 세상이 그것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로 인해 기뻐했을 뿐 아니라, 부러워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기쁨은 그들이 더 이상 부러워할 수 없는 기쁨이었지요. 왜냐하면 그녀는 더 이상 아름다워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부는 홀로 신부 방에 앉았습니다. 더 이상 아름다워질 수 없을 만큼 변모되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용 가능한 온갖 여성적인 기술이 합당한 자에게 합당하게 꾸미는 데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아직 한 가지가 부족했습니다. 젊은 신부의 친구들은 결코 꿈도 꾸지 못한 것입니다.―면사포입니다. 더 가늘고 가벼우면서 더 은밀한 면사포. 신부의 친구들이 그녀를 감싼 것보다 더욱 은밀한 면사포 말입니다. 그것은 어떤 젊은 신부의 친구도 이에 대하여 알지 못했고, 그녀를 도울 수 없었던 신부의 드레스였습니다. 심지어 신부조차도 자신을 돕는 법을 알지 못했던 것이지요. 

면사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친근한 힘이었습니다. 신부를 꾸미며 기쁨을 찾는 힘, 그녀도 모르게 그 속에 그녀를 감싸는 힘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보았던 모든 것은 성전에 올라가며 걸어가고 있는 신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그의 뒤에서 문이 닫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더욱 차분해졌고, 더욱 행복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이전보다 더욱 그녀는 그가 자기의 소유라고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문이 열리자, 그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수줍어 눈을 떨구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있었음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늘이 신부의 아름다움과 그의 행복을 질투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전의 문이 열렸고, 젊은 신부의 친구들은 신랑이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있었음을 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신부를 돌보는 데 분주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신부는 처녀답게 앞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마치 왕비처럼, 신부의 친구들에 의해 둘러싸여 앞으로 나왔습니다. 젊은 소녀들은 언제나 신부에게 예의를 갖추듯 그렇게 그녀에게 예의를 갖추었습니다. 그리하여 신부는 이 아름다운 군중들 앞에 서서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성전 문이 닫히는 순간이 왔군요. 신랑이 왔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문을 지나쳐 걸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멈춥니다. 나는 시인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변증법적으로만 이 사건을 다룹니다. 첫째, 이 영웅은 결정적 순간에 이 정보를 얻었다는 점에 주의하십시오. 따라서 그는 순수하고 악의가 없습니다. 경솔하게 애인과 결합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둘째, 그는 자신 앞에 신적인 선언이 있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해, 그의 뜻과 반대되는 신의 뜻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변덕스러운 연애광이 궤변에 사로잡혀 고집스럽게 자기를 주장하는 것처럼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저 증언이 신부만큼이나 그를 불행하게 합니다. 심지어 조금 더 불행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 사건의 장본인이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점쟁이가 그에게만 불행을 예언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이 불행이 그에게 영향을 줄 때 또한 그들의 행복에 영향을 주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닌지에 대한 것입니다. 그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나요?

 

1) 그가 침묵하고 결혼한다면, 다음과 같이 생각할 것입니다.

“아마도 불행은 곧바로 일어나지 않겠지. 어쨌든 나는 사랑을 간직했어. 불행해지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도 않았다고. 그러나 나는 침묵해야 해. 그렇지 않다면, 이 짧은 순간조차 일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이것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그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저 경우에, 그는 그녀를 모욕한 것이지요. 어떤 의미에서 침묵함으로써 이 소녀를 죄를 짓게 만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예언을 알았더라면, 확실히 그와 같은 결합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불행의 때에, 그는 불행을 견뎌야 할 뿐 아니라, 침묵한 것에 대해, 침묵한 것에 대한 그녀의 의로운 분노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2) 그가 침묵하고 결혼하지 말아야 할까?

이 경우, 그는 거짓말에 연루될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그녀와의 관계에서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갈 것입니다. 아마 미학은 이것을 승인할 것입니다. 그때 불행은 실제와 같은 방식으로 일어나고 말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어떤 설명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일이 발생한 후에 나타나지요. ㅇㅙ냐하면 이런 종류의 지식이 저 운명적인 예언을 취소할 수 있음을 알지 못한다면, 미학적 관점은 그가 죽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행동이 아무리 고상해도, 이것은 이 소녀와 그녀의 사랑의 실제에 대한 모욕입니다. 

 

3) 그는 말해야 하는가?

물론 우리의 영웅이 그의 사랑의 포기가 너무 시적이어서 이것은 그에게 실패한 사업의 모험 정도 외에 다른 의미가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가 말한다면, 이 전체는 악셀(Axel) 과 발보르그(Valborg)처럼 불행한 사랑의 이야기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들은 하늘이 갈라놓은 부부가 될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 지점에서 다른 변증법적인 방향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하늘이 그의 결혼이 불행으로 끝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래서 그는 소녀를 포기하지 않은 채 결혼하지 않고 지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소녀에 대한 모욕을 암시합니다. 그는 그녀를 위한 사랑에서 보편자를 표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녀와의 낭만적인 결합(en romantisk Forbindelse) 속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것은 결혼을 옹호하는 시인과 윤리학자 모두를 위한 과제입니다. 만약 시(poetry)가 종교적인 것과 개성의 내면성을 알게 되었다면, 지금 시가 하고 있는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한 과제를 얻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반복적으로 시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듣습니다.
“한 남자는 한 소녀와 인연을 맺어야 한다. 그녀는 그가 한 때 사랑했거나 결코 적절하게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상적인 다른 소녀를 보았기 때문이다. 남자는 삶에서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이 길은 옳았으나 틀린 집으로 들어갔다. 왜냐하면 이상형은 그 길을 가로질러 2층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시를 위한 주제였습니다. 애인이 실수한 것이지요. 그가 인공적인 불빛으로 연인을 본 것이고, 그녀가 검은 머리를 가졌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보십시오. 더 가까이 보니 금발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동생이 이상형이었습니다. 이것이 이 시를 위한 주제입니다. 내 생각에, 이와 같은 남자는 누구나 삶에서 참지도 못하면서 시에서 중요하게 만들고 싶어 하자마자 야유를 받으며 무대에서 즉시 퇴장해야 하는 라반(Laban)과 같습니다. 단지 열정에 반한 열정(passion against passion)만 시적 충돌을 제공합니다. 동일한 열정 내부에 있는 잡다한 이런 소문, 야단법석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중세 시대에 한 소나가 사랑에 빠진 다음, 이 땅의 사랑이 죄라는 확신이 들어, 오히려 하늘의 사랑을 더 좋아했을 때, 이것은 시적 갈등입니다. 이 소녀는 시적입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삶이 이상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경우, 이렇게 갈라진 것은 조금 다르게 고려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또한 개인의 자유로운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의 변증법적인 큰 어려움은 불행이 오직 그에게만 들이 닥쳐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악셀과 발보르그처럼 그들은 자신의 고통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을 얻을 수 없는 반면, 하늘은 악셀과 발보르그를 똑같이 갈라놓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 똑같이 가깝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이것이 사실이었다면, 거기에는 어떤 출구가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하늘은 그들을 갈라놓기 위해 눈에 보이는 힘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맡기므로 이 불행에 대해 하늘에 대항하기로 함께 결정했다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윤리는 그가 말하는 것을 요구합니다. 그의 영웅심(Heltemod)은 본질적으로 미적 자부심(Høimod)을 포기하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in casu) 암묵적으로 숨겨진 허영이 주입되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이 소녀를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은 그에게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영웅심의 현실은 그가 전제조건(sin Forudsætning)이 갖고 있으며 그것을 제기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시대에 수많은 영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중간에 있는 것들을 뛰어 넘고, 최고의 것을 만드는 속임수에서 놀라운 기교를 발전시킬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비극적 영웅 그 이상을 나아갈 수 없는데, 왜 이런 개요입니까? 왜냐하면 결국 이것이 역설에 대한 약간의 빛을 던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관계에 달려 있으며, 이 관계에서 어떤 식으로든 점쟁이의 발언이 신랑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이 발언은 publici juris(공적 문제)일까요, privatissimum(사적 문제)일까요?

이 장면은 그리스입니다. 점쟁이의 발언은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는 단독자가 내용을 어휘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점쟁이가 하늘의 결정을 단독자에게  선포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점쟁이의 발언은 영웅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지요. 결국 이 발언은 신적인 것과의 어떤 개인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그는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예언하는 무엇이든 일어날 것입니다. 그는 그것을 행하거나 하지 않음으로써 신적인 것과 더욱 가까운 관계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는 신적인 긍휼이나 진노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모든 개인은 영웅만큼이나 그 결과를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웅만 이해할 수 있는 어떤 비밀 암호는 없습니다. 그가 말하고 싶으면 그냥 말하면 됩니다. 자신을 이해시킬 수 있으니까요.

그가 침묵하고 싶다면, 그것은 단독자가 되는 능력에서 보편자보다 더 높아지고 싶어 하기 때문이며, 그녀가 얼마나 빨리 이 슬픔을 잊을 것인지 등과 같은 온갖 종류의 공상적인 생각으로 자신을 기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뜻이 점쟁이에 의해 그에게 선포되지 않았더라면, 하늘의 뜻이 개인적으로 그의 지식이 되었더라면, 하늘의 뜻이 순수하게 그와 개인적 관계로 들어갔다면, 그때 우리는 역설의 현존에 있게 됩니다. 조금이라도 이런 역설이 존재한다면(나의 고찰은 딜레마에 빠지기 때문에), 그가 아무리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 그는 침묵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당하지만, 이것은 그가 의롭다는 증거입니다. 

그의 침묵은 단독자로서 그가 보편자(the universal)와 절대적 관계에 서고 싶어 했기 때문이 아니라, 단독자로서 절대자(the absolute)와 절대적 관계에 서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한, 그는 그곳에서 내적인 평안을 찾을 수 있는 반면, 그의 고상한 침묵은 언제나 윤리적인 것의 요구에 의해 방해를 받습니다. 미학은 수많은 세월동안 끝났던 곳에서 자부심의 착각으로 다시 시작한다면, 이것이 전적으로 바람직한 일일 것입니다. 미학이 그렇게 하는 순간, 종교적인 것과 손에 손을 잡고 함께 일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윤리적인 것과의 싸움에서 미적인 것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에섹스(Essex)에 대한 사랑을 국가에 바치기 위해 그의 사형 집행에 서명했습니다. 비록 그가 반지를 그녀에게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약간의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지만 이것은 영웅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알려진 바와 같이, 그는 실제로는 반지를 보냈습니다만, 악의를 품고 기다리던 여성이 그것을 막았습니다. ni fallor(내가 착각하지 않았다면) 엘리자베스는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열흘 동안 한 손가락을 입에 물고, 물어뜯고 한 마디도 말하지 않고 앉아있었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비밀을 캐내는 방법을 아는 시인의 주제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요즘 시인이 자주 자신을 혼란스럽게 하는 발레 대가에 의해 가장 잘 활용될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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