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Sickness Unto Death: A Christian Psychological Exposition for Upbuilding and Awakening
- Sygdommen til Døden. En christelig psychologisk Udvikling til Opbyggelse og Opvækkelse
- Anti-Climacus
- 1849
- KW19, SKS11, SV11
다섯 번째 시기: 직접 전달(1848-51년)
죽음에 이르는 병The Sickness Unto Death
이 작품에서 키르케고르는 새로운 가명인 안티 클리마쿠스를 소개한다. 1846년 《결론의 비학문적 후서》를 발표하면서 그는 집필을 그만두기로 결심했고, 이 작품에 첨부된 선언에서 자신의 모든 가명의 저자들을 밝혔다. 여기서 다시 가명 사용으로 돌아가지만, 다른 목적이 제공되고 있다. 여기서 가명은 작품을 속이기 위한 것이 아니며, 또는 심미적으로 자격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반대로 이 작품은 이상화된 기독교를 일깨우기 위한 것이었다. 키르케고르는 자기 자신이 그렇게 이상적인 기독교인이라 전하고 싶지 않았다. 원래 그는 작품 "직접"을 발표하기 위해 타이틀 페이지에 자신의 이름을 사용할 계획이었으나, 여전히 작품의 책임을 주장하기 위해 편집자로서의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안티 클라이마쿠스(Anti-Climacus)는 <기독교의 훈련>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는 요하네스 클라이마쿠스가 위대한 가명(심미적) 작품의 저자인 것처럼, 안티 클리마쿠스는 키르케고르의 가장 위대한 종교작품의 저자로 간주된다. 하워드 홍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접두사(반-)가 ‘반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기대(anticipate)'에서와 같이 '안테(ante, before)'의 옛 형태는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에서 '나 외에(before me)'과 같이 계급의 관계를 나타낸다. 키르케고르는 자신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클리마쿠스가 더 낮으며,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부인한다. 안티 클라이마쿠스(Anti-Climacus)는 더 높고, 특이하게 높은 수준의 그리스도인이다." 키르케고르는 기독교에서 이 작품과 <기독교의 훈련>이 그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불안의 개념>과 쌍을 이루는 작품이다. <불안의 개념>은 "심리학적" 성찰인 반면, <죽음에 이르는 병>은 죄에서 파생되어 오는 자유나 불안 앞에서 이전의 예비 심리적 불안을 뛰어넘는다. 이 작품은 짧지만 <불안의 개념>만큼 매우 밀도가 높다. 여기서 키르케고르는 절망의 정신적 측면을 고찰한다. 불안이 윤리적인 것과 관련되듯이 절망은 종교적인 것, 즉 영원한 것과 관련이 있다.
나는 키르케고르의 카테고리가 복잡하고 특이하기 때문에 키에케고르가 사용하는 챕터와 섹션 제목을 사용할 것이다.
1부: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다
A: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A: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절망은 정신(spirit)의 병, 자기(self)의 병이다. 따라서 절망은 세 가지 형태를 취할 수 있다: 자기가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절망(엄밀한 의미에서 절망이 아님), 자기 자신이 되지 않으려는 절망, 자기 자신이 되려는 절망
제1부의 시작 부분에서 키르케고르는 유머의 요소를 담고 있을 수 있는 복잡하고 밀도 있는 구절로 시작한다. 나는 그것을 인용하고 나서 해제를 시도할 것이다.
인간은 정신이다. 그러나 정신이란 무엇인가? 정신은 곧 자기(self)다. 하지만 자기란 무엇인가? 자기란 스스로와 스스로를 관계하는 관계다. 혹은 관계 안에서 스스로와 스스로를 관계하는 관계의 관계하기다. 자기는 관계가 아니라 스스로와 스스로를 관계하는 관계의 관계하기다. 인간은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의 종합, 시간적 것과 영원한 것의 종합, 자유와 필연의 종합, 한마디로 종합이다. 종합은 둘 사이의 관계다. 이렇게 생각하면 인간은 여전히 자아가 아니다.... 둘 사이의 관계에서, 관계는 부정적인 통합으로서 제 삼자이고, 이 둘은 관계와 관련이 있고, 관계 안에서 관계와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심리학의 자격 하에서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 사이의 관계는 어떤 관계다. 그러나 만약 그 관계가 스스로와 스스로를 관계한다면, 이 관계는 긍정적 삼자이고, 이것이 자기다.(본문 중에...)
이 본문을 읽는다는 것은 처음에는 꽤 당황스럽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자기란 관계의 관계하기다, 즉 무한과 유한, 필연과 자유 등과 같은 대립적 관계 속에 존재하는 매개 활동 mediating activity이다. 자기는 정립과 반정립에 의해 만들어진 관계나 종합이 아니다. 그것은 모순의 법칙을 파괴하기 때문에 그가 거부한 것은 헤겔의 체계일 것이다. 자기는 관계의 활동에서 발견되며, 키르케고르가 관계의 관계하기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것은 대립에 의해 만들어진 긴장을 통해 작용한다. 키르케고르는 적절한 관계는 "부정적인 통합으로서의 삼자"라는 것을 강조한다. 반면에 긍정적인 삼자는 "관계의 관계맺기"이다. 즉, 정적인 매개가 아니라, 진정한 매개를 구성하는 적극적 매개가 곧 자기다. 마치 키르케고르가 명사라기 보다는 동사로써 "자기"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과 같다. 어쨌든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기억은 망각과 반대되는 범주에 속한다. 그것은 극단적이다. 예를 들어, 키르케고르적인 언어를 사용하기 위한 플라톤적 상기는 자기 안에서 스스로를 관계하는 관계의 관계하기의 산물이다. 그것은 정신의 행위다. 그것은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 사이에 놓여 있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육체적인 것은 사건의 감각을 기록하고 정신적인 것은 기억을 처리하는 식별과 해석적 요소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관계의 관계하기에 관심이 있으므로, 중요한 것은 이것이 자기 내부의 상기(기억)을 되찾는 전 과정이라는 점이다. 키르케고르의 종합은 소크라테스(심포지엄 202a)를 통해 디오티마가 소개한 플라톤의 중기에 대한 정교함일 것이다. 어쨌든 키르케고르에서의 상기는 정신적으로 일어나는 일로 보아야 한다.
키르케고르는 변증론에 관여하고 있지는 않지만, 자기(self)란 운동(kinetic)이라 부를 수 있는 것으로 하나님을 기원으로 두고 있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스스로와 스스로를 관계하는 그런 관계인 자기란 스스로를 확립했거나 다른 사람에 의해 확립된 것이 틀림없다." "스스로를 확립한다"는 원칙은 실존적 개념이지만, 그것이 자기결정권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키르케고르는, 내가 생각하기에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그 결정권을 얻은 것이라 말한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이 요점을 발전시키지 않는다. 그의 관심사는 절망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이다.
만약 스스로와 스스로를 관계하는 관계가 다른 사람에 의해 확립되었다면, 그 관계는 정말로 제 삼자이지만, 이 관계인, 삼자는 다시 하나의 관계가 되고 전체 관계를 확립한 그것과 스스로를 관계한다(p. 13).
이 자기(정신)의 운동적인 측면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다면, 다시 한나님과 관계할 수 있는 탄력성도 가지고 있다. 키르케고르는 우리가 단 하나(고정된)의 본질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과 관계한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내면의 대화를 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키르케고르의 심리학에 자기의 다원적 성격은 본질적이다.
인간의 자기란 그렇게 파생되고 확립된 관계로서, 스스로와 스스로를 관계하는 관계이며, 스스로와 스스로를 관계함에 있어 스스로를 다른 사람과 관계한다. 그렇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두 가지 형태의 절망이 있을 수 있다. 만일 인간의 자기가 스스로를 확립했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의 형태만 있을 수 있다. 즉 스스로가 되지 안으려 하는 것, 자기 자신을 제거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형태는 있을 수 없다. 즉, 절망하여 스스로가 되려는 것이다(p. 13).
키르케고르는 아직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혹은 원하지 않는) 것을 정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독자들은 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절망은 결국 자신이 될 수 없는 절망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한편, 기꺼이 자신이 되겠다는 절망에 의해 절망에서 뛰쳐나오려는 자기의 시도는 실패한다.
절망이 완전히 제거되었을 때의 자기의 상태를 서술하는 공식은 다음과 같다:스스로와 스스로를 관계하고 자기자신이기를 원하면서, 자기는 그것을 확립했던 힘 속에 투명하게 안식한다(p.14).
B: 절망의 가능성과 현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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