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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시기의 작품

철학의 부스러기(업데이트 중...)

by 엉클창 2020. 4. 21.

  • Philosophical Fragments, or a Fragment of Philosophy
  • Philosophiske Smuler eller Smule Philosophi
  • Johannes Climacus, ed. S. Kierkegaard
  • 1844
  • KW7, SKS4, SV4
  • 한글 번역판: <철학의 부스러기>, 표재명 역, 프리칭 아카데미(옆의 그림 참고)-현재는 절판된 상태임

키르케고르 손글씨 표지


두 번째 시기: 간접 전달(1843-46년)

철학의 부스러기Philosophical Fragments

키르케고르는 여기서 그가 <결론의 비학문적 후서>에서 완성한 것, 즉 지식 획득에 대한 주관적 접근법으로 시작한다. 요하네스 클리마쿠스는 <철학의 부스러기>와 <결론의 비학문적 후서>의 저자다. 뿐만 아니라 사후의 작품인 <요하네스 클리마쿠스 또는 De Omnibus Dubitandum Est>의 저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는 키르케고르의 가장 위대한 철학 작품의 저자일 것이다. 클리마쿠스의 스타일은 세 작품마다 다르지만 변증법적 사명에 관해서는 동일하다.

키에르케고르는 시내산에 있는 알렉산드리아의 세인트캐서린스 수도원(Saint Catherine's of Alexandia)의 수도사(c. 570-649)에게서 이 이름을 따왔다. 그는 <클림맥스 투 플라디수( Klimax tou Paradeisou)>, 또는 <천국의 사다리>의 저자였다. 이 책은 우연히 스페인어로 번역된 신대륙에서 인쇄된 최초의 책이다(멕시코, 1532년). 이 작품은 수도사와 같은 독자들을 위해 쓰여졌다. 그는 그 누구도 먼저 정욕에 맞서 싸우지 않고 억누르지 않고 사색적인 삶을 시도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사닥다리는 30개의 연속된 계단이 있었다. 이 계단은 결국 에피쿠로스 사람들의 아타락시아(쾌락)과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니고, 어떤 태평함과 평정(impassibility and imperturbability)의 상태로 안내한다. 다만 에피쿠로스 사람들은 조용한 사색적 쾌락을 위해 세상의 고통을 피하려 하지만 클리마쿠스는 천상의 환상을 추구한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 서양에서 성경 밖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경건한 작품 중 하나인 것처럼, 사다리는 오래 전부터 동양에서도 동일하게 중요성이 있다. 이 책은 정교회 수도원에서 매 사순절마다 읽혀지며, 교회나 평원에서 소리내어 읽도록 했다. 

키르케고르에게 요하네스 클리마쿠스라는 가명은 비록 이 클리마쿠스가 신봉자는 아니지만 지식에 대한 주관적인 접근을 나타낸다. 사다리는 그때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특히 데카르트와 헤겔로 대표되는 논리학자가 한 전제에서 다음 전제로 진행하여 올라가는 논리적인 상승을 염두에 두기 위한 것이다. 요하네스는 신념을 통해서가 아니면 어떤 식으로든 절대자에게 접근하는 것이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면서 영적인 문제에서 이 방법을 거부한다. 그는 주관적인 지식과 도약에 관심이 있다. 합리적 철학자들의 공언된 목표인 객관적 지식은 주관적 피조물에게는 적절할 수 없다. 더구나 키르케고르는 영혼이 하나님에게 눈을 돌리게 하는 지식에도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요하네스는 아직 하나님에 대한 그 지식에는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태평 (impassibility)을 향한 하나님께로의 엄격한 상승은 진리에 대한 열정적이고 주관적인 접근으로 대체되었다. 이로 인해 믿는 자는 모순의 도움으로 그리스도 앞에 있는 스스로를 깨닫는다.  

키르케고르는 비록 다른 방법과 결론을 사용했지만 플라톤처럼, 주관성의 표현불가능성에 지식의 기반을 세우려 했다. 플라톤에게 지식은 주관적으로(내부적으로) 오고, 키르케고르에게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온다. 소크라테스가 <메논>에서 노예들을 위한 촉진자가 된 것처럼, 믿음의 사람에게 하나님 역시 이와 같이 하신다. 키르케고르는 또한 열정과 관계가 있다."...역설은 생각의 열정이다. 역설 없는 사상가는 열정 없는 연인과 같다. 그냥 평범한 동료와 같다."(p. 37). 역설은 탐구의 형이상학적 성격에 의해 필요하다. 믿음을 통한 지식만이 역설에 접근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의상 우리의 지식을 넘어선 것이기 때문이다. 열정은 믿음의 도약과 함께 동반해야 한다. 믿음의 사람을 위한 지식 획득은 하나님에 의해 인도되기 때문이다. <철학의 부스러기>는 키르케고르의 인식론과 플라톤의 상기 이론에 대한 강렬한 관심과 더불어 변증론에 대한 혐오감을 반영한다. 편집자로 자신을 기재했고, 앞서 초안에서도 자신을 저자로 기재했었기 때문에 이것은 아마도 그의 생각에 가까운 작품일 것이다. 

이 작품의 부제는 다음과 같다: "영원한 의식을 위해 역사적 출발점을 부여할 수 있는가, 그러한 출발점이 어떻게 역사적 관심 이상의 것이 될 수 있는가, 영원한 행복이 역사적 지식 위에 구축될 수 있는가?" 이것은 이론뿐만 아니라 실용적이라는 점에서 전체 연구를 나타낸다. 서문에서 키르케고르는 이 작품을 "정확한 정당성을 획득하는 과학적인 노력의 일부라는 어떠한 주장도 없는" 팜플렛이라고 부른다."(p.5) 이것은 제목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부스러기(Smuler)는 조각이나 찌꺼기를 의미한다. 키르케고르는 헤겔과 같은 체계를 형성하기는커녕 논문 같은 것을 쓰려고 애쓰고 있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단지 그의 몇 가지 요점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다. 

I: 사고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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