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ear and Trembling: A Dialectical Lyric
- Frygt og Bæven: Dialectisk Lyrik
- Johannes de Silentio
- 1843
- KW6, SKS4, SV3
- 한국어: 공포와 전율, 입춘갑 역, 2011년 치우
두 번째 시기: 간접 전달(1843-46년)
두려움과 떨림Fear And Trembling
책 소개에 앞서 한 말씀 드린다. 입춘갑 교수님은 이 책을 [공포와 전율]로 번역하였으나, 성서적 의미에서 보면 [두려움과 떨림]으로 번역하는 것이 맞다. 왜냐하면 이 책의 제목은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따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나와 있다. 따라서 독자들은 이 책을 읽을 때, 두려움과 떨림은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이 책을 읽어야 하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내용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키르케고르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여기에서만 쓴 것이 아니다. 짧은 이야기이지만 이 이야기는 다시 후기 작품은 <자기 시험을 위하여>에서 등장한다. 자기 시험을 위하여는 총 세 개의 장으로 이루어저 있는데, 3장을 보면 "이것이 성령이다"라는 장이 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부분을 소개하며 "죽음"의 의미를 밝힌다.
다시, 이 책은 두 개의 뚜렷한 면에서 의미론적으로 존재하는 개인적인 작품이다. 표면적으로는 이 작품은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중지(teleological suspension of the ethical)"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해, 더 고차원적인 법을 위한 도덕법을 중단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창세기를 인용하는데, 그곳에서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삭을 죽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는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지만 살인은 부도덕하다. 아직 십계명이 나타난 것이 아니므로, 모세의 율법에 저촉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그것은 우리의 양심에 저촉되는 것이다. 따라서 윤리적인 것은 더 고차원적인 목표(telos)를 위해 중지된다.
또 다른 관점에서, 이 작품은 그가 레기네 올센과의 실패한 약혼에 관한 것이다. 그는 아브라함이고 그녀는 이삭이다. 그는 자신이 그녀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혼해야 한다. 하지만 일부 비평가들은 이 역할을 뒤집는다. 키르케고르의 글의 개인적인 면은 때때로 단점으로 보여진다. 작품이 수준 이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은 단순히 작가의 천재성의 일부일 뿐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미학적이고 윤리적인 것에 관계되는 것처럼, <두려움과 떨림>은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것에 관계된다. 키르케고르는 윤리적인 것에 있는 무비판적인 안식 상태를 약화시키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때로는 허무주의로 가는 길을 닦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하지만 이런 입장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 글에 대한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다.
키르케고르는 하만을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타르퀴니우스 슈퍼부스가 양귀비를 이용하여 정원에서 한 말은, 아들은 이해했지만 사자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만(p. 3).
Was Tarquinius Superbus in seinem Garten mit den Mohnköpfen sprach, verstand der Sohn, aber nicht der Bote
하워드 홍은 이 인용에 대한 배경을 설명한다.
타르퀴니우스 슈퍼부스의 아들이 교묘하게 가비이(Gabii)의 권력을 잡았을 때, 그는 아버지에게 도시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는 사자를 보냈다. 사자를 믿지 않는 타르퀴니우스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정원으로 데리고 들어갔고, 거기서 지팡이로 가장 키가 큰 양귀비의 꽃을 잘랐다. 아들은 이것으로 도시의 주도적인 사람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를 보라... 페리안데르에 관한 비슷한 이야기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발견된다.... 비문은 G. E. 레싱에 의해 논의된다... (p. 339).
양귀비를 베는 행위, 즉 적들의 제거라는 명백한 내용은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키르케고르가 강조하는 것은 어떤 행위가 특별한 지식을 가진 사람에게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 같다. 아들은 아버지와 특별한 관계 때문에 이해했다. 마찬가지로 신앙을 가진 사람은 보통 사람이 보게 될 것과 같은 자료를 보게 되겠지만, 신앙 때문에 거기서 다른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평범한" 사람에게 아브라함은 살인을 시도한다. 믿음의 눈으로 그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다. 부자 관계도 또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서문
서문에서 요하네스라는 가명은 독자에게 작가로서의 위치를 알려준다.
현재의 저자는 결코 철학자가 아니다. 그는 체계를 이해하지 못했다. 과연 그 체계가 있는 것인지, 체계가 완성된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엄청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요즘에 모든 사람들이 얼마나 엄청난 머리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를 이미 그의 약한 머리로는 충분히 숙고할 수 있다. 비록 누군가가 믿음의 전체 내용을 개념적인 형태로 번역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그가 믿음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다시 말해, 그가 믿음으로 어떻게 들어갔는지, 혹은 믿음이 그에게 어떻게 들어갔는지를 이해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현재의 저자는 결코 철학자가 아니다. 그는 시인이며 시적으로 우아하게 말하자면 엑스트러 작가이다. 그는 체계나 체계의 약속을 쓰지 않는다. 체계에 의지해 서약하거나 체계에게 몸을 팔지도 않는다. 그는 글을 쓴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에게 더욱 즐거움을 주는 사치이고, 그가 쓴 글을 사서 읽은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이런 즐거움은 더욱 명확해지기 때문이다(p.7)
"체계(system)"는 헤겔의 철학 체계를 말한다. 이것은 종교적인 것을 포함한 모든 현상과 철학을 설명하고자 했다. 키르케고르는 이 과업을 터무니없고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 철학자는 겉으로 보기에는 외부에서 평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 체계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는 스스로를 시인이라고 여겼지만, 요하네스가 시인인 동안 그는 철학자는 아니지만, 다른 곳에서는 "나는 시인이 아니며, 단지 변증법적으로 일을 처리한다"고 말한다(p. 90). 이 작품의 부제는 "변증법적 서정시(Dialectical Lyric)"이다. 키르케고르의 가명은 변증법가와 시인(서사 작가)을 교대로 주장하고 있다. 요하네스는 시인의 임무의 본질에 대해 곰곰이 생각한다.
시인이나 웅변가는 영웅이 하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고 기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역시 행복하다. 말하자면, 영웅은 그가 열중하고 있는 그의 더 나은 본성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그 자신이 될 수 없고, 그의 사랑이 찬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행복하다. 그의 사랑은 감탄이 될 수 있다. 그는 기억(recollection)의 천재다(p. 15).
"글을 사고 읽는 사람이 적을수록" 즐겁다는 말에 대해서는 키르케고르의 작품이 잘 팔리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그것들은 그의 비용으로 출판되었다. 1849년이 되어서야 그의 작품 중, <이것이냐 저것이냐>만 2쇄를 찍었다.
서론Exordium
서론은 아브라함이 아들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산에 오른 이야기를 네 가지 다른 환상적인 버전으로 구성된다. 각각은 본문을 비추는 대안적 관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우선 서론은 한 남자(아마도 키르케고르)가 어렸을 때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어떻게 들었는지, 그리고 그가 남자로 자라면서 어떻게 자주 이 이야기로 되돌아왔는지를 말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저 사람은 사상가가 아니었다. 그는 신앙을 넘어서야 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는 믿음의 아버지로 기억되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를 생각했다. 아무도 이를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런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부러운 운명인지를 생각했던 것이다. 저 사람은 성경 주석가도 아니었다. 그는 히브리어를 알지 못했다. 만일 히브리어를 알았다면 아마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쉽게 이해했을 것이다(p. 9).
요하네스는 어느 정도의 학자나 사상가로 알려지길 꺼린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주목하라. 그러나 우리는 요하네스의 생각을 키르케고르의 것으로 돌리면 안 된다. 그가 히브리어를 모른다고 주장하는 반면, 키르케고르는 알고 있었다.
설명의 첫 번째 부분에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희생시킬 준비를 한다. 아브라함이 말한다.
“어리석은 자야, 내가 네 아버지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우상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 이것은 나의 욕망이다. . . .”
그러나 아브라함은 홀로 부드럽게 말했다. “하늘에 계신 주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가 나를 괴물이라고 믿는 것이 당신에 대한 믿음을 잃는 것보다 낫습니다.”(p. 10f)
편집자들은 여기에서 키르케고르와 한 때 약혼했던 레기네 올센의 관계를 보았다. 사실, 키르케고르는 곧 남편으로서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을 때, 레기네가 그와 같은 관계를 맺지 않도록 그가 악당이라는 것을 납득시킬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 해석으로, 그는 자신이 아브라함이고 그녀가 이삭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를 보존하기 위해서 모두 검정색으로 자신을 칠함으로써 관계를 끊을 필요가 있었다.
창세기에 대한 두 번째 설명을 보면, 아브라함은 양을 제물로 바쳐 이삭을 구한다.
“그 날 이후로 아브라함은 늙었다.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명령하신 것을 잊을 수 없었다. 이삭은 예전처럼 번창했지만, 아브라함의 눈은 어두워졌고, 더 이상 기쁨을 보지 못했다.”(12쪽)
세 번째 설명에서 아브라함이 홀로 땅바닥에 몸을 던지며, 이삭을 희생할 생각을 하고 윤리적 의무를 잊은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한다. 네 번째 설명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일 마음이 들지 않아 그들은 함께 집으로 걸어간다. 이삭은 이것 때문에 믿음을 잃었다. 서론은 요하네스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누구도 아브라함만큼 위대하지 않다. 누가 그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14쪽)
서론에서 성서를 설명하는 각 이야기 끝에 키르케고르는 아이에 대한 짧은 부록을 추가한다. 아마도 요하네스가 아이였을 때 처음으로 창세기 설명을 들었을 때인 것 같다. 다음은 첫 번째 부록이다.
“아이가 젖을 떼면 엄마는 가슴을 검게 한다. 아이가 젖을 그만 먹어야 할 때, 엄마의 가슴은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다. 가슴은 변했지만, 아이는 엄마가 여전하다고 믿고 있다. 그녀의 시선은 여느 때처럼 다정하고 사랑스럽다. 젖을 떼기 위해 더 끔찍한 수단이 필요하지 않은 아이는 얼마나 행운인가!” (11쪽)
이것은 전체 작품을 안내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독자)는 창세기에 대한 설명을 이해할 수 있는 종교적 사고방식으로 성장할 필요가 있다. 요하네스 자신이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들은 첫 번째 아이인 것처럼, 키르케고르 자신도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가슴을 검게 해야 하는 엄마일 것이다. 이 일을 위해서 그는 변증법적으로 말하는 시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키르케고르 역시 레기네 올센에 대한 거부감을 염두에 두고 있을 수 있다.
아브라함에 대한 찬사Eulogy on Abrah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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