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epetition: A Venture in Experimenting Psychology
- Gjentagelsen: Et Forsøg i den experimenterende Psychologi
- Constantin Constantius
- 1843
- KW6, SKS4, SV3
두 번째 시기: 간접 전달(1843-46년)
반복Repetition
케르케고르는 세 단계, 혹은 삶의 "존재 영역"을 생각했다. 그리하여 심미적, 윤리적, 종교적인 것으로 구성된 3단계를 고안했다. 그가 일찍이 그의 글에서 "단계(stages)"라는 용어를 선호한 반면, 우리는 그것들을 순서에 따라 진행되는 삶의 기간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존재의 패러다임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게다가 예를 들어, 많은 개인들은 종교적인단계를 통과하지 못할 수도 있다. 반복은 윤리적 단계와 관련이 있다.
반복은 요하네스 클리마쿠스와 마찬가지로 미완성된 <요하네스 클리마쿠스>와 마찬가지로 내러티브라는 점에서 비정통적인 철학적 작품이다. 키르케고르는 사랑에 빠진 젊은 청년의 서신을 보여주는데, 그 자리는 윤리적 의무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결혼에서 관계를 완성시킬 수 없고, 한 사람에게 헌신하는 것, 즉 반복을 요구한다. 반면에 상기(recollection)는 심미적 범주에 속한다. 젊은이는 그녀를 떠난 후에야 사랑하는 사람을 소중히 여길 수 있고, 그 다음에는 시적으로만 사랑할 수 있다. 이 청년은 <이것이냐 저것이냐> 제1부의 저자/편집자인 A로 알려진 바로 그 청년일 가능성이 높다. 그는 '인 비노 베리타스(In Vino Veritas)'라는 제목의 <인생길의 여러 단계> 1부(미적 부분)의 연회 장면에 다시 등장한다. 콘스탄티우스 자신은 유혹을 심미적 게임으로 치부하는 그곳에서 대화 상대로 등장한다. 그는 여자에 대해 농담으로 말한다. 유혹자들은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야단법석을 떠는 바보들이다. 그에게 에로스는 도가 지나친다.
'저자' 콘스탄틴 콘스탄티우스는 한 여자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는 한 젊은이를 관찰한다. 그것은 그가 얼마 동안 감추고 있었지만 마침내 우리 작가에게 알려지게 된 사랑이다. 이 젊은이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욕망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사랑은 그를 우울하게 만든다. 콘스탄티우스는 왜 이것이 그렇게 되어야 하는지 의아해 한다. 그는 사랑은 보통 우울의 원인보다는 우울한 것의 치료법이라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그 젊은이는 약혼을 끝까지 따름으로 그의 윤리적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
콘스탄티우스는 그 젊은이가 윤리적 반복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반복이라는 생각는 두 개의 그리스 이론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첫째는 운동에 대한 이론이다. 운동의 불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인데, 특히 제논과 파르메니데스가 주장했다. 한 예를 들자면, 제논의 역설이다.
움직임이란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도착점에 도달하려면 중간 지점을 통과해야 하고, 중간 지점에 도달하기 전에 4분의 1지점을 반드시 통과해야 하고, 그 4분의 1지점을 통과하기 전에는 8분의 1지점을 통과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결코 출발할 수가 없다. 달리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선분 AB 위를 움직이는 어떤 운동체도 A에서 출발하여 B에 도달할 수 없다. A에서 B까지 움직이기 위해서는 선분 AB의 중점 C를 지나야 하고, 또 C에 가기 전에 선분 AC의 중점 D를, 마찬가지로 E, F, G, …를 지나야 한다. 이와 같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무한개의 많은 점을 통과해야 하므로 운동이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운동은 불가능하고 착각이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우리에게 한 그리스인이 단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왔다 갔다 하면서 이것을 반박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두 번째 그리스 개념은 지식 습득과 관련이 있는 플라톤의 상기(recollection) 사상이다. <파이돈(Phaedo)>에서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예전에 있던 특징으로부터 사물의 상기로서 지식을 어떻게 획득하는지 볼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소크라테스가 그의 친구들을 위로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러한 생각을 제시한다. 즉, 사람이 어떤 것을 배울 수 있다면, 그가 무엇을 배울 것인지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어떤 것도 배울 수 있도록 준비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삶에서) 가르침을 받지 않고 뭔가를 알았다면, 태어나기 전에 배운 것이 틀림없다. 만약 영혼이 태어나기 전에 존재했다면 그것은 죽음에서 살아남은 것이라는 이치에 맞으며, 따라서 그의 친구들은 슬퍼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이러한 선천적이고 이전에 있던 지식은 감각적 입력에 의해 의식으로 촉발된다. 플라톤은 이중의 역설을 넘어 서기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이 모르는 것이 있으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배울 수 없다. 반면에, 만약 그가 그것을 알고 있다면, 그는 그것을 배울 필요가 없다. 플라톤은 이 문제의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상기를 이용한다. 이 이론은 <메논(Meno )>과 <필레보스( Philebus)>에서도 추구된다.
콘스탄티우스는 책의 소개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한 작가(<이것이나 저것이냐>에서의 A )가 말한 적이 있었던 상기의 사랑이란 유일한 행복한 사랑이다. 물론, 처음에 그것이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을 기억하게 한다면, 그의 말은 전적으로 옳다. 반복의 사랑은 진실로 유일한 행복한 사랑이다. 상기의 사랑처럼, 희망의 안절부절못함, 발견의 불안한 모험심도 갖고 있지 않지만, 추억의 슬픔도 가지고 있지 않다. 즉 순간의 행복한 안전성을 가지고 있다(p. 131f).
콘스탄티우스는 운동과 반성(motion and reflection)에 관한 그 젊은이의 정신상태에 대해 궁금해 한다. <두 시대>에서 키르케고르는 열정 없이 반성하는 시대를 비판한다. 단순한 반성은 열정이 없고 의지가 없는 따분한 생각이다. 윤리적 반복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움직임과 열정적인 헌신을 가져다 준다. 이 작품에서는 거의 다루지 않았지만, 믿음의 질적 도약을 통해 종교적인 단계에 도달하게 되는데, 여기서 하나님께는 안식(운동 없는)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정말로 그 소녀를 사랑할까, 아니면 그녀가 다시 한번 그를 움직이게 하는 단순한 계기가 되는 것은 아닐까?... 그가 그녀와의 접촉에 의해 야기된 그의 분열은 그가 실제로 그녀에게 돌아왔을 때 화해될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그 소녀는 실제(actuality)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운동의 반영 (reflection)이자 운동의 선동(incitement) 이었다(p. 185).
상기는 비운동성(motionlessness)과 과거에만 국한되어 있다. 반면에 반복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개념은 끊임없는 움직임 속에 있으며 윤리적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 반복은 종교적 영역을 언급하는 것으로 끝난다. 콘스탄티우스의 관찰에 이어 그와 청년의 서신이 이어진다. 그리고 나서 그는 독자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로 끝을 맺는다. 키르케고르는 더 이상 그의 글에서 반복이라는 주제로 돌아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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