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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시기의 작품

요하네스 클리마쿠스

by 엉클창 2020. 4. 22.
  • Johannes Climacus, or De omnibus dubitandum est. A Narrative
  • Johannes Climacus, eller De omnibus dubitandum est. En Fortælling
  • 1842-43, left unfinished, published posthumously
  • KW7, SKS15, Søren Kierkegaards Papirer

두 번째 시기: 간접 전달(1843-46년)

요하네스 클리마쿠스Johannes Climacus

키르케고르는 여기서 그가 <결론의 비학문적 후서>에서 완성한 것, 즉 지식 획득에 대한 주관적 접근법으로 시작한다. 요하네스 클리마쿠스는 <철학의 부스러기>와 <결론의 비학문적 후서>의 저자다. 뿐만 아니라 사후 작품인 <요하네스 클리마쿠스 또는 De Omnibus Dubitandum Est>의 저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는 키르케고르의 가장 위대한 철학 작품의 저자일 것이다. 클리마쿠스의 스타일은 세 작품마다 다르지만 변증법적 사명에 관해서는 동일하다.

키에르케고르는 시내산에 있는 알렉산드리아의 세인트캐서린스 수도원(Saint Catherine's of Alexandia)의 수도사(c. 570-649)에게서 이 이름을 따왔다. 그는 <클림맥스 투 플라디수( Klimax tou Paradeisou)>, 또는 <천국의 사다리>의 저자였다. 이 책은 우연히 스페인어로 번역된 신대륙에서 인쇄된 최초의 책이다(멕시코, 1532년). 이 작품은 수도사와 같은 독자들을 위해 쓰여졌다. 그는 그 누구도 먼저 정욕에 맞서 싸우지 않고 억누르지 않고 사색적인 삶을 시도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사닥다리는 30개의 연속된 계단이 있었다. 이 계단은 결국 에피쿠로스 사람들의 아타락시아(쾌락)과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니고, 어떤 태평함과 평정(impassibility and imperturbability)의 상태로 안내한다. 다만 에피쿠로스 사람들은 조용한 사색적 쾌락을 위해 세상의 고통을 피하려 하지만 클리마쿠스는 천상의 환상을 추구한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 서양에서 성경 밖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경건한 작품 중 하나인 것처럼, 사다리는 오래 전부터 동양에서도 동일하게 중요성이 있다. 이 책은 정교회 수도원에서 매 사순절마다 읽혀지며, 교회나 평원에서 소리내어 읽도록 했다. 

키르케고르에게 요하네스 클리마쿠스라는 가명은 비록 이 클리마쿠스가 신봉자는 아니지만 지식에 대한 주관적인 접근을 나타낸다. 사다리는 그때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특히 데카르트와 헤겔로 대표되는 논리학자가 한 전제에서 다음 전제로 진행하여 올라가는 논리적인 상승을 염두에 두기 위한 것이다. 요하네스는 신념을 통해서가 아니면 어떤 식으로든 절대자에게 접근하는 것이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면서 영적인 문제에서 이 방법을 거부한다. 그는 주관적인 지식과 도약에 관심이 있다. 합리적 철학자들의 공언된 목표인 객관적 지식은 주관적 피조물에게는 적절할 수 없다. 더구나 키르케고르는 영혼이 하나님에게 눈을 돌리게 하는 지식에도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요하네스는 아직 하나님에 대한 그 지식에는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태평 (impassibility)을 향한 하나님께로의 엄격한 상승은 진리에 대한 열정적이고 주관적인 접근으로 대체되었다. 이로 인해 믿는 자는 모순의 도움으로 그리스도 앞에 있는 스스로를 깨닫는다.  

<요하네스 클리마쿠스>는 <반복>과 마찬가지로 내러티브 형태라는 점에서 비정통적인 철학적 작품이다. 1843년 미완성된 작품이지만 키르케고르는 그 이전 해부터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여기서 그는 가명을 작품의 주제로 삼는다. 라틴어 부제는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한다"는 뜻이며, 요하네스가 이를 실천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명상> (Meditations)을 시작한 젊은 데카르트를 상기하기 위한 것으로서, 다만 그 전제조건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자명하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전제를 없애려고 노력했다. 데카르트는 그의 유명한 명제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서 인지 과정의 활동이나 현존에 근거한 자기 존재를 실증했다. 즉, 데카르트는 자신의 '나'가 생각하고 있으므로, 사고 과정에 존재하는 '나'가 있다고 추론했다. 그는 신과 세계를 정립할 수 있도록 자기를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은 데카르트가 신의 존재를 덜 필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존재론적으로, 신의 존재는 인간의 존재보다 앞선다. 그러나 인식론적으로 데카르트는 인간에게 원시성을 부여할 수 밖에 없다고 느꼈다. 이 철학적 변화는 사상사에서 엄청난 순간이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성경이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서로 다른 종류의 진리를 구분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데카르트는 결국 어떻게 성서의 진실성을 알게 되었을까? 왜 성경은 그의 조사의 대상이 아니었을까? 성서의 선험적 수용에 호소하지 않는 그의 설명은 불신자들에게는 그것이 순환적인 논쟁으로 보일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방법"이 오직 불신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게 할 수도 있다. 데카르트가 성경에 긍정하는 것이 교회를 만족시키기 위해 고안된 것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키르케고르는 형이상학적 것과 육체적 것 등과 같은 어떤 종류의 진리의 이분법으로 고통당하지 않는다. 또한 그는 회의주의 방법론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데카르트가 자신의 '나'가 인지적 활동에 관련이 있기 때문에 '나'가 있다고 추론했을 때, '나'가 신앙의 행위나 사랑에 빠진 행위에 관련이 있기 때문에그가 '나'를 소유하고 있다고 똑같이 주장할 수는 없었을까?—물론 신이든 세상이든 사고의 대상이 생각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데카르트도 이것을 인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왜 자신의 '나'의 이 특정한 활동이 다른 어떤 활동보다 더 중요한지, 그것을 자신의 존재의 일차적 행위로 왜 내세우려 하는지 알고자 한다.

<결론의 비학문적 후서>에서 키르케고르는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을 가리키며, 이를 유의어 반복(tautology)라고 부른다. 즉 결론은 전제의 반복이다.

만약 코기토의 "나"가 개별적인 인간으로 이해된다면, 그 진술은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나는 존재한다"는 에르고를 내가 생각하고 있지만, 내가 만약 생각하고 있다면, 그때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놀랄 것도 없다; 그것은 이미 말한 것이었다... (p. 317).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년)은 키르케고르가 염두에 둔 두 번째 철학자다. 헤겔은 모든 사상을 포괄하는 철학적 체계를 고안해 내려고 했다. 그는 유명한 정반합을 제시하였다: 정립은 반정립의 결과를 낳는다. 이때 정립과 함께 종합 혹은 통일도 낳는다. 이는 결국 새로운 정립이 된다. 키르케고르는 인지 활동에 가장 높은 위치를 부여하기를 거부했다. 그의 자기에 대한 강조는 언제나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자기였고,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였다. 이것은 스스로를 일종의 전체(summa summarum)로 정립하는 고립된 자아가 아니었다. <요하네스 클리마쿠스>에서 키르케고르는 그런 철학의 발전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려한다. 하물며 그런 철학을 살아내는 것이 가능할까. 이는 특히 그의 당대의 대중적이고 영향력 있는 철학인 헤겔주의가 포괄적인 체제였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키르케고르는 자주 물었다. 어떻게 체계 안에 있는 사람(철학자)이 마치 체계 밖에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을 아우르는 체계를 고안할 수 있을까? 따라서 이것은 키르케고르의 사변철학에 대한 전면적 거부다. 특히 헤겔의 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다.

손으로 쓴 표제

키르케고르는 왜 현대철학이 의심에서 시작되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왜 회의론이 지식 획득의 우월한 방법인가? 회의주의(skepticism)의 과정을 제외한 모든 것을 의심할 것이기 때문에 완전한 회의주의에는 자기 모순이 없는가? 더구나 회의주의는 절대적인 것을 노골적으로 거부할 수 없다. 모든 것을 의심하는 전제조건이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의심하는 자는 어느 지점에서 의심의 방법을 거부하게 될 것이다. 철학함에 어떤 다른 근거가 있을 수 있는가? 키르케고르는 자신의 일기에서 대안을 제시했고, 회의주의의 한계점에 대한 비판을 했다.

회의론자들이 정말로 사로잡혀야 할 것은 윤리적인 것이다. 데카르트 이후 그들은 모두 의심하는 기간 동안 지식과 관련하여 어떤 확실한 것도 감히 표현할 수 없었지만, 한편으로 그들은 감히 행동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런 점에서 그들은 확률로 만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엄청난 모순인가! 마치 진술하는 것보다 의심스러운 일을 하는 것(그리하여 책임을 낳는 일)이 훨씬 더 무섭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아니면 윤리 그 자체가 불확실하기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그 다음에는 의심 그 자체가 도달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인간은 세계 속에 존재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있다. 그가 행하고 말하는 모든 것은 윤리적인 문제에 봉착한다. 일상 생활에서 회의주의를 일관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다. 진정한 회의주의란 사변적이고(speculative), 가정적이며(hypothetical), 결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non-existential)이다. 

요하네스 클리마쿠스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1부 제목은 "전통 사상의 도움으로 철학이 시작하는 요한스 클리마쿠스"이다. 이야기는 요하네스가 배운 철학의 세 가지 원리를 숙고하면서 시작된다. (1)철학은 의심에서 시작된다. (2)철학을 하기 위해서는 의심했음에 틀림없다. (3) 현대철학은 의심에서 시작된다. 논제 1번은 데카르트와 한스 L. 마르텐센(1808-1884년, 코펜하겐 대학 신학 교수, 이후 질랜드 주교)가 맡았다. 마르텐센은 후에 키르케고르가 공개적으로 반대할 헤겔주의자였다. 논제 2는 다시 당대의 지배적인 철학인 헤겔철학의 지지를 받고 있다. 논제 3은 데카르트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흔히 생각되는 현대 철학을 강조한다. 키르케고르는 철학에서 의심의 전제뿐만 아니라, 데카르트 이전의 철학이 의심을 전제했는지, 즉 의심이 필수불가결한 것인지, 따라서 철학의 특징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고 싶어했다. 1장의 제목은 "의심으로 시작하는 현대 철학"이다. 이 논제들을 살펴본 후, 키르케고르는 이렇게 묻는다. 

현대 철학이 어떻게 의심으로 시작하게 되었을까?

키르케고르는 우선 "현대 철학이 의심에서 시작된 것은 우연 때문"이었는지를 고려하지만 그 증거는 결론에 이르지 못한다. 다음으로 그는 "현대 철학이 의심에서 시작된 것은 필연 때문이었는가?"라고 묻는다. 

이제 [요한네스]는 그 앞에 놓인 것이 철학인지 다른 것이었는지, 의심으로 현대 철학의 시작을 필요로 하기 위해서는 그 앞에 놓인 것의 본질이 무엇이었는지 물었다. 그는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이 논제의 문구에 따르면 철학이 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현대철학이 의심으로 시작하는 것을 필요로 할 수 있는 철학은 어떤 본성이 있을까? 우선 현대철학이 의심으로 출발할 필요가 있었는지, 그 철학과 현대철학만이 철학이었는지, 그래서 이전에 어떤 다른 방식으로 시작되었던 철학이 세상에 존재했다면 그 철학은 스스로와 철학이 되는 것과 화해시켜야만 했던 것인지? 그는 그 선행철학 자체가 우연으로 시작된 것인지, 필연에 의해 시작된 것인지 더 자세히 물었다. 너무 끌려가지 않도록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려고 했다: 필연에 의해 현대철학이 의심에서 출발한다면, 그 시작은 이전의 철학과의 연속성으로 정의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철학이 무엇으로 시작되었는가에 대해 역사적인 말을 하고 싶다면, 현대 철학의 시작이 이전 시작 안에서의 결과인 한....현대철학이 나와 함께 시작했다고 말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없는 시작....이 모든 고찰에서, 요하네스 클리마쿠스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p. 137이후). 

요하네스는 철학이 엄청나게 어려워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헤겔주의의 덫에 대한 언급이며, 특히 시대정신(Zeitgeist)의 개념에 대한 언급이다. 시대 정신은 역사의 필요하고도 목적 있는 전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역사주의다. 즉 역사에는 내장된 목적(built-in telos)이 있다는 믿음이다. 

따라서 각각의 철학자는 자신을 의식해야 하고, 이 자신에 대한 의식에서도 현대철학의 한 순간으로서 그의 중요성을 의식해야 한다. 즉, 현대철학은 선행철학의 한 요소로 자신을 의식해야 하며, 이는 결국 영원한 철학의 역사적 전개의 한 요소로서 자신을 의식해야 한다....그는 낙담했다... (140 p). 

2장의 제목은 "철학은 의심으로 시작한다"이다. 요하네스는 다시 논제 1과 3이 실제로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데카르트(와 헤겔) 전후의 철학이 그들의 접근방식에서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 한다. 그는 전제에서는 차이를 볼 수 없다. 그는 "단독자와 저 논제는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라고 묻는다. 데카르트는 명상 중에 홀로 앉아 회의하면서 모든 것을 지웠다. 키르케고르의 고독한 철학자는 자기 자신만을 내세우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반대로, "결국 그는 그 논제와 철학과의 관계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 논제와 그와의 관계를, 그리하여 그와 철학과의 관계를 묻고 있었다."(p. 150) 키르케고르에게 그것은 개인의 관계 또는 철학과의 만남이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철학을 하기 위해 감각 지각(sense perception) 이상으로 자신을 끌어올리고, 같은 이유로 다른 사람이 감각 지각을 의심한다면, 두 사람 모두 아마도 같은 장소에 도착하겠지만, 운동(movements)은 다를 것이다. 물론 그 운동은 그가 특별히 묻고 있는 것이었다(p. 150). 

요하네스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1부의 마지막 짧은 장 제목은 "철학을 하기 위해서는 의심해야 한다"이다. 요하네스는 제자가 의심함으로써 스승과 대등한 지위에 있다는 점에서 의심의 역할이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 도움이 된다고 가정할 수 있을 뿐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는 이 원칙을 끝까지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2부는 작업이 미완성 상태로 남겨져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짧다. 이 책의 제목은 "요하네스는 Authis Apospiciis [자신을 대신하여]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기를 시도하다(De Omnibus Dubitandum Est)"이다. 그 이야기는 요하네스가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 한동안 이 논제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요하네스는 다른 철학자들의 말을 들으면서 낙담했다. 그는 철학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가능한 한 간단하게 만들 것"을 결심했다. 2부의 유일한 장은 "의심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제목이다. 특히 어려운 장이다. 

[요한네스]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 한다면 다른 길을 택해야 했다. 그는 의식 속에서 의심의 이상적 가능성(ideal possibility)을 찾아내야 했다. 이것은 물론 아무리 발생현상이 다르더라도 현상에 의해 설명되지 않고 현상의 효과를 설명했기 때문에 그대로 남아야 했다. 그렇다면 개인에게 어떤 의심을 낳든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 가능성이 개인에게 없다면, 그 어떤 것도 그것을 발전시킬 수 없다.... 그 후 그는 모든 특정한 의식을 설명하는 것처럼, 그러나 그 자체가 특정한 의식이 되지 않고 그대로의 의식에서 방향을 잡으려고 했다. 그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처럼 의식 속에서 스스로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마치 그것이 모든 특별한 의식을 설명하는 것처럼, 하지만 의식 그 자체로는 특별한 의식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는 자기 밖에서 의심할 때, 의식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직접성(Immediacy)은 막연하다. 직접성에서는 아무런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직접적으로, 모든 것이 진실하지만, 이 진리는 바로 다음 순간, 비진리다. 왜냐하면 직접성에서 모든 것은 진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식이 직접성에서 남아 있다면, 진리의 질문은 취소된다(p. 167이후). 

데카르트와는 달리 키르케고르는 인간의 의식보다 더 구체적인 어떤 것에 철학적 진리의 근거를 두고 싶어했다. 현상 자체를 설명할 수 없다면 현상의 결과를 설명할 수 있다. 그가 나중에 "실재성(reality)"이라고 정의하는 직접성은 언어(또는 관념성)의 매개 없이 물 자체(the thing is in and of itself)인 것이다. 완전한 실재성은 그 자체로 절대적으로 결정될 수 없다. 그것에 대한 언어의 묘사는 이상적이며, 물 자체(the thing itself)는 아니다. 더욱이 유한한 의식에게 모든 직접성(실재성)은 매개될 때까지 똑같이 진실이거나 진실하지 않다. 다시 말해, 매개되지 않는 실재성은 우리에게 불투명하다. 

직접성이 실재성이다; 언어는 이상(ideality)이다; 의식은 모순이다. 내가 실재성에 대해 진술하는 순간, 모순이 현존힌다. 내가 말하는 것이 이상이기 때문이다(p. 168). 

모순은 실재성(즉, 직접성이란 무언가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 것)의 표현에서(언어를 통해) 나타난다. 의식의 모순된 본성은 사물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그것을 표현하는 우리의 능력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대답이다. 키르케고르는 모순을 의식 속의 '반성'의 제 1원리로 내세운다. 그러나 모순 밖에 설 수 있는 마음(의식)은 관계에서의 제 3의 것이다. 

그러나 의식의 범주는삼 분법(trichotomous)다. 물론, 언어는 이것과 충돌하는 것 같다. 대부분의 언어에서....'의심하다'는 말은 어원론적으로 '둘'이라는 단어와 관련이 있다....이것은 단지 의심의 전제만을 암시했을 뿐, 그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내 마음이 둘이 되는 순간, 나는 그 자체로(eo ipso) 셋이다. 이분법만 존재한다면 의심의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의심의 가능성은 정확히 세 번째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성이 의심을 낳는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가 스스로를 역으로 설명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의심은 반성을 미리 전제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이전의 것(prius)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의심은 둘 사이의 관계에서 생긴다. 하지만 이 것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이 둘은 존재해야 한다.... 의심은 어떤 객관적 사고보다 더 고차원적 형태다. 이는 후자를 전제로 하지만 다른 것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세 번째로, 흥미나 의식이다(p. 169). 

다시 말하지만, 키르케고르는 여기서 이해하기 어렵다. 의심은 부정적인 입장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 즉 의심은 더 많은 데이터를 기다리는 멈춤이 아니라 무언가에 대한 단호한 입장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nothing이 아니라 something이다. 이 사실은 종종 간과된다. 회의론자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의 인식론적 입장을 긍정적으로 주장한다. 생각의 "삼분법(tricotimimulous)" 측면은 우리가 인지적 문제의 두 가지 인식된 측면에 적용하는 매개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요하네스는 그리스 회의론자들이 현대 철학자들보다 훨씬 더 일관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이 작업은 갑작스럽게 끝난다. 독자는 키르케고르가 자신을 어떻게 설명했을지, 요하네스를 어디로 데려갔을지 확신하지 못한 채 남게 된다. 

일기에서, 키르케고르가 그 일을 어떻게 마쳤는지를 시사한다. 

세상에 의심을 불러온 것이 믿음인 것처럼, 의심은 체계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 정복된다(Journal, IV B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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