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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강화/고난의 기쁨

시간과 영원 두 번째 시간입니다

by 엉클창 2021. 4. 15.

“누군가 이 땅의 유익을 얻기 위해 영원한 것을 붙잡기 원한다면, 그는 상실된다. 누군가 성령을 돈을 주고 사기를 바란다면(행8:18-20), 그는 상실된다. 그는 왜 상실되는가? 왜냐하면 그는 영원한 것을 시간적인 것으로 축소함으로 영원한 것을 상실한 것이다.” -「고난의 기쁨」 중에

영원과 시간의 문제 한 번 더 정리 들어갑니다.

사도행전 8:18-20절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여기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 걸까요?
시간과 영원의 문제와 버무려 생각해 봅시다.
또한 목적과 수단의 문제와 버무려 생각해 봅시다.

먼저 시간과 영원을 생각하자면,
시간(돈)이 영원(성령)에 봉사해야 합니까,
영원이 시간에 봉사해야 합니까?

다음으로 목적과 수단을 생각하자면,
성령을 수단 삼아 돈을 버는 게 목적입니까,
돈을 수단 삼아 성령을 얻는 게 목적입니까?
혹은 시간적인 것(돈)으로 영원한 것(성령)을 살 수 있습니까?

목표나 목적은 수단보다 언제나 높습니다. 그때, 이 땅의 유익을 얻기 위해 영원한 것으로 얻으려 한다면, 이 땅의 유익이란 그에게 영원한 것보다 더 높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 그는 영원한 것을 상실합니다. 이건 한 마디로 멸망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잘 보십시오.

이 땅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사익을 위해,
자신의 영적 우월을 뽐내기 위해,
자신의 영적 자만에 봉사하기 위해,
성령을 이용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시간에서 영원을 얻기 위해 살지 않고,
시간적인 것을 포획하기 위해 영원을 이용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를

우리는 무엇보다 “시간을 성화”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원의 도움으로 말입니다.

기억의 지속, 살바도르 달리, 1931년 뉴욕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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