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개
이 글은 키르케고르가 1848년에 저술한 『기독교 강화』 제 2부 “고난의 싸움 중에 있는 마음의 상태(Stemninger i Lidelsers Strid)”를 번역한 것입니다. 전체 4부로 구성된 『기독교 강화』 중에서 이 강화는 무엇보다 고난당하는 자의 “기쁨”을 다루고 있습니다. 역자는 키르케고르의 고난을 주제로 한 강화가 기독교 문학의 백미(白眉)라고생각합니다. 이 강화는 고난에 대한 엄청난 통찰이 있습니다.
키르케고르의 작품 중에 고난에 대한 강화가 하나 더 있습니다. 1847년에 저술한 『다양한 정신의 건덕적 강화』 제 3부에 실린 “고난의 복음”입니다. 이 두 작품은 고난이 주제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고, 또한 고난당하는 자의 “기쁨”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도 같습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고난의 복음>은 고난을 대부분 “제자의 길”이라는 관점에서 다루고 있는 반면, 이 강화는 “시간과 영원”의 관점에서 고난을 다룹니다.
2. 제거불가능한 고난
우리는 일반적으로 고난을 싫어합니다. 고난, 역경, 환난을 극복하기 위해 기도하며 매달립니다. 하지만 이 강화는 고난을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고난을 필연적인 것으로, 제거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이 작품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고난의 복음>에 나오는 이야기를 인용하자면 환란의 길, 고난의 길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아니, 표현은 무한히 바뀌어야 합니다. "고난의 길"이라고 말할 때에는 마치 고난과 길을 분리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기도실에 들어가서 기도했던 겁니다.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기독교의 본질은 고난 자체가 길이라는 겁니다. 고난 자체가 길인 경우, 고난을 제거하면 길이 사라집니다. 따라서 고난은 이 길을 가는 자에게 필연적입니다. 결코 제거할 수 없을 뿐더러 제거하기 바라는 것은 말 그대로 지옥행 열차를 타겠다고 결심한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고난을 제거해달라고 기도합니까? 인간적으로 말해, 고난을 원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이것이 맨 정신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물론, 키르케고르는 고난을 원하는 것은 맨 정신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3. 불가능한 소원
세상에서 고난 당하기를 원했던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제 강점기에 독립을 위해 투쟁하기를 선택했던 독립 운동가들도 고난당하기를 소원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키르케고르는 이런 사람들도 고난당하기를 원한 것 같지만 실상은 싸우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쾌락을 즐기며 인생을 잠에 빠져 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노력 없이 이익을 얻기 위해 재치가 넘치는 삶을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싸우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싸움을 위해 싸우기를 원하는 것은 결코 고난 당하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최고의 것을 닮은 정반대의 것입니다.
화살의 자존심은 싸움에서 당겨지기 원하는 것입니다. 화살이 창고에 쳐박히는 것, 이것은 화살의 자존심에 상처를 줍니다. 이렇듯, 고난당하기 원했던 자도 실상은 싸움을 원했고, 싸움을 통해 자존심을 세우기 원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인간의 마음으로는 고난을 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것을 원할 수 있습니까? 키르케고르는 기꺼이 고난의 길을 가기 원했던 예수 그리스도께 배울 때만 가능하다는 겁니다.
4. 시간과 영원
키르케고르에게 시간과 영원은 이질적입니다. 마치 물과 기름과 같습니다. 사람은 이미 시간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따라서 영원의 사고를 갖기 어렵습니다. 시간에서 사람은 자유로울 수도 없습니다. 시간을 저지하는 힘, 시간을 억누를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영원입니다. 이 작품은 시간 안에 살아가는 우리가 영원에 의존해서 살 수 있도록 초청합니다. 이때 우리는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을 체험합니다.
5. 금이 불속에서 깨끗해지듯이, 영혼은 고난 속에서 깨끗해진다
제1강화의 핵심 내용 소개하고 마무리 합니다.
한 번의 고난은 이동, 통과일 뿐이다. 당신은 고난을 통과해야 한다. 이 고난이 당신의 인생만큼 길다할지라도, 마음을 찌르는 칼이 된다 할지라도(눅2:35), 그것은 겨우 통과에 불과하다.
당신을 통과하고 있는 것이 고난이 아니다. 당신이 고난을 통과한다. 영원의 의미에서, 당신은 절대로 다치지 않는다.
시간에서, 시간의 이해에서, 고난은 끔찍한 것처럼 보인다. 시각적인 착각에 의해, 고난이 마치 당신을 뚫고 지나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래서 당신은 고난 속에서 죽어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오히려 고난을 통과하고 있는 것은 바로 당신이다. 바로 이것이 시각적 착각이다.
이것은 마치 한 배우가 다른 배우를 죽이는 연기와 같다. 이 연기에서 한 배우가 다른 배우를 정확히 찌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이것은 그렇지 않다. 그는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는다.(눅21:18) 살해당한 배우가 해를 당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듯이, 다니엘이 해를 당하지 않고 사자 굴에서 나오듯이(단6:10-14), 그의 세 친구들이 용광로 속에 걸어 들어가지만 해를 당하지 않듯이(단3:8-27), 믿는 자의 영혼도 모든 일시적인 고난에 의해 해를 당하지 않고 영원으로 걸어간다. 죽음에 의해 다치지 않는다.
모든 일시적인 고난은 신기루다. 영원의 의미에서 죽음 자체는 어릿광대다! 좀과 동록이 영원의 보물을 소멸할 수 없듯이 이보다 더 불가능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도둑이 그것을 훔칠 수 없듯이(마6:19-20), 일시적인 고난은 그것이 아무리 오래 지속된다 해도, 눈곱만큼도 영혼에 해를 가할 수 없다.
어떤 병도, 어떤 기근이나 궁핍도, 어떤 추위나 더위도, 아무리 많은 것을 소멸한다 해도, 영혼을 소멸할 수 없다. 어떤 중상모략도, 어떤 모욕도, 어떤 인격적 공격이나 핍박도, 아무리 훔치고 강탈한다 해도, 영혼을 소멸할 수 없다. 죽음도 영혼을 소멸할 수 없다! 한 번의 고난은, 영혼에 어떤 흔적도 남길 수 없는 통과이다. 아니, 훨씬 더 영광스럽게도, 이 고난은 영혼을 완전히 깨끗하게 하는 통과다. 결과적으로 청결은 통과가 뒤에 남겨 놓은 흔적이다.
금이 불 속에서 깨끗해지듯이, 영혼은 고난 속에서 깨끗해진다.(말3:3) 그러나 불은 금에서 무엇을 제거하는가? 이것을 제거한다고 부르는 것은 이상한 말일 수 있다. 왜냐하면 불은 금 속에 있는 불결한 요소들만 제거하니까. 그렇다면, 금은 불 속에서 무엇을 상실하는가? 이것을 상실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상한 말일 수 있다. 왜냐하면 금은 불 속에서 모든 비천한 것들만 상실하고 있으니까. 다시 말해, 금은 불을 통해 이득을 얻고 있다.
모든 일시적인 고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고난이 아무리 힘들고, 아무리 오래 지속되더라도, 고난은 본질적으로 무기력하다. 고난은 불결한 것만 제거할 뿐이다. 다시 말해, 고난은 청결함을 준다.
그때, 마음이 청결한 자만 하나님을 본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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