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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술

예술작품의 자기반영성 및 자기지시성과 미장아빔

by 엉클창 2022. 2. 23.

 

미장아빔에 대한 가장 포괄적이면서도 모든 논의의 출발점이 되는 연구서는 루시앙 댈렌바흐(Lucien Dällenbach, 1940년생)의 [텍스트 속의 거울][#보기1 Lucien Dällenbach, Le Récit spéculaire(1977), trans. Jeremy Whiteley with Emma Hughes, The Mirror in the Text,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Chicago 1989.]이다. 여기서 댈렌바흐는 앙드레 지드의 1893년 일기에서 나오는 구절을 출발점으로 삼아 논의를 전개한다. 지드의 글에서 그것을 조금 길게 인용해 보자.

어떤 예술작품에서 나는 바로 그 작품의 주체가 캐릭터의 규모에서 뒤바뀌어져 있는 것을 보기 좋아한다. 그 어떤 것도 이것보다 작품에 더 명료한 빛을 비추거나 아니면 더 확실하게 전체의 올바른 관계(proportions)를 확립하지 못한다. 따라서 메믈링(Memling)이나 쿠엔틴 메치스(Quentin Metzys)의 어떤 작품들에서 어둡고 작은 볼록 거울은 그림의 그 장면이 발생하고 있는 방의 내부를 비춘다. 마찬가지로 벨라스케스의 그림 <시녀들>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약간 다르다). 마지막으로 문학에서 <햄릿>의 연극 장면에서 그리고 그 외에 많은 다른 연극에서도 그렇다. …… 이 예들 중 어느 것도 모두 정확한 것은 아니다. 더 많이 그러할 수 있는 것, ……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방패를 상감(象嵌)할 때 그 중심부에 더 작은 하나의 아빔(abyme)을 구성하는 문장(紋章)의 도안과 비교하는 것이다.[#보기2 André Gide, 앞의 책, p.17. 위 인용문에서 주체(subject)라는 용어는 프랑스어 ‘sujet’를 옮긴 것인데, 이 sujet는 작품의 테마, 주제이기도 하며, 작품이 묘사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미장아빔이라는 용어는 지드의 이 글에 그 기원을 가지며 그 이후 이 용어는 특히 1970-80년대 이후 프랑스의 글쓰기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이후 영미권의 비평에서도 많이 사용되고 있지만, 다른 언어권에서는 이것과 동등한 용어가 없다. 그런데 지드의 관점에 따르면 미장아빔은 소설에서는 액자소설, 즉 이야기 속의 이야기, 연극에서는 세익스피어의 [햄릿]을 비롯한 여러 작품에서 나타나는 액자구성 또는 극중극, 회화에서는 여러 화가들의 그림 속에서 나타나는 그림 속의 그림 등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이에 기초하여 댈렌바흐는 미장아빔을 어떤 텍스트 속에서 그것의 거울 또는 축소판(microcosm)으로 기능하는 하나 또는 여러 복제물(doubling)이라 정의한다. 따라서 이 미장아빔을 포함하는 텍스트는 수신자(addressee) 또는 수용자의 관점에서 포착되는 반영적 텍스트 또는 자기 반성적 텍스트의 하나가 될 수 있다. 다른 한편에서 미장아빔의 본질적 속성은 작품의 의미와 형식을 명백히 하는 것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댈렌바흐는 대부분의 미장아빔이 서사에서 중심적 지위를 차지하고 이미 일어난 일을 반성[반영]하거나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암시를 주는 것이라 이해한다. 그리고 앞의 인용문에서처럼 앙드레지드는 이것을 작은 볼록거울이 소설공간의 중심부에 박혀서 소설의 구조나 주제, 또는 그 자체를 반영하는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 미장아빔은 작가의 자기성찰의 이미지, 예술가의 성찰적 자기 인식을 보여준다.

이것이 그림 속에서 나타나는 예는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5-1441)의 그림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1434)>의 중

앙에서 그림 속에 직접 보이지 않는 뒷면을 비추는 볼록거울이다. 여기서 반 에이크는 우리의 가시적 영역의 한계를 보완하여 그 뒤의 비가시적 영역에 있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거울을 사용한다. 이것이 바로 ‘그림 속의 그림’으로서 미장아빔의 형식이다. 이 거울 속에는 부부를 마주보고 문 안쪽에 서있는 두 사람이 보이는데, 그 중 한 사람은 반 에이크 자신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그림에서 거울 윗부분 벽에 “얀 반 에이크 이곳에 있었다. 1434년”(“Johannes de eyck fuit hic. 1434”)라고 기입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댈렌바흐는 이 그림에서 미장아빔을 화가 반 에이크 자신의 자기의식을 드러내는 도구로 이해한다. 따라서 이때 미장아빔은 화가의 자기의식의 반영의 도구가 된다.

 

한편 푸코는 [말과 사물](1966)에서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 1599–1660)의 <시녀들 Las Meninas>에 들어있는 미장아빔을 ‘재현의 재현’으로 해석하고 있다. 푸코는 이 책에서 특정 시대, 특정 문화권에서 인식과 이론을 가능하게 해주는 토대, 그런 제도나 이데올로기를 가능하게 만든 하부구조[#보기3 Michel Foucault, 이광래 옮김, <말과 사물>, 민음사, 서울 1987, 18쪽 참조, Richard Kearney, Modern Movements in European Philosophy, 임헌규 외 2인 옮김, <현대유럽철학의 흐름>, 한울, 서울 2011, 369 쪽 참조.]로서 또는 “모든 지식의 가능조건”[#보기4 Michel Foucault, 같은 책, 208쪽.]으로서 통상인식소 또는 인식틀로 번역되는 에피스테메(episteme)를 바탕으로 르네상스에서 고전주의를 거쳐 근대(또는 현대)까지의 이행과정을 기술한다. 이때 그는 자신의 작업을 ‘고고학’이라고 부르면서 지식의 숨겨진 구조를 발굴하여 각 시대의 에피스테메를 규정한다. 그런데 푸코에 따르면 르네상스 시대의 에피스테메는 유사성(resemblance)이었고, 고전주의 시대의 에피스테메는 표상(representation/재현)이었으며, 근대(현대)의 에피스테메스는 주체이다.

 

인식론적으로 우리가 ‘표상’이라고 번역하는 ‘representation’은 회화 또는 예술론에서는 ‘재현’이라고 번역된다. 따라서 표상 또는 재현이라는 말은 언어나 회화의 지시기능과 연결된다 할 것이다. 푸코에 따르면 표상[재현]의 에피스테메로 특징지어지는 고전주의 시대에는 아직 인간은 인식되어야 할 대상 또는 인식될 수 있는 대상으로 등장하지 못했다. 따라서 푸코에게 벨라스케스의 그림 <시녀들>은 아직 주체로서의 인간이 인식대상으로 등장하지 못한, 재현[표상]의 세계상의 표현으로서 간주되며, 푸코는 <시녀들>이 고전시대의 에피스테메를 응축하고 있다고 본다.[#보기5 Michel Foucault, <담론의 질서>, 이정우 해설, 새길, 서울 1995, 107쪽.] 따라서 이 그림에서는 본래 이 그림의 대상인 모델,즉 주체(sujet)[#보기6 앞서 언급된 바 있듯이 주체라고 번역되는 이 프랑스어 ‘sujet’는 작품의 테마, 주제이기도 하며, 작품이 묘사하는 대상이기도 하다.](이 그림에서는 국왕부부)가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즉 이 그림에는 아직 주체가 부재한다. 이처럼 이 그림은 캔버스 속에서 재현되어야 어떤 존재를 생략하여, 그 존재를 캔버스 바깥으로 끄집어내어 캔버스에서는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게 한다. 그 대신 그림을 재현의 근본적인 세 구성 요소, 즉 모델(국왕부부), 관찰자(관람객), 화가(벨라스케스 자신)를 통해 장식하고 있다. 그리고 묘사된 장면의 중앙에는 거울 속에, 즉 미장아빔의 기법으로 국왕 부부가 묘사되어 있다. 비록 이 그림 속에서 미장아빔으로 재현되어 있는 국왕 부부는 가장 주목되지 않는 부분이라 하더라도 이 미장아빔을 통해 벨라스케스는 앞에서 인용한 앙드레 지드의 말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본래의 핵심, 또는 전체 주제를 드러내고 있다. 즉 이때 미장아빔은 전체를 반영하는 요약적 이미지에 의해, 전체를 강화하고 반복함으로써 문학작품 또는 회화작품에서 일관성과 응집성을 부여할 수 있다.[#보기7 Marian Hobson, Jacques Derrida Opening lines, Routledge, London 1998, p.75 참조. 그리고 그러한 작품은 반성적이며 자기를 반성(반영)하며, 또 반영(반성)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을 보이는 것이 말라르메식 해석의 전통이다. 이러한 관점에서이들은 자기지시적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그들이 그림 속에 직접적으로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것, 이 재현 대상, 또는 재현의 주체(sujet)의 부재, 그들이 직접적으로 이 그림속에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이 그림이 드러내는 일종의 연극의 핵심이 된다. 따라서 푸코의 해석은 <시녀들>을 재현 행위에 대한 반성, 다시 말해 재현이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자기 지시적 재현으로 포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그림은 재현의 재현, 다시 말해 재현에 대한 반성 또는 반영이다. 여기서 미장아빔은 재현의 재현, 즉 재현에 대한 반성 또는 반영의 장치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미장아빔은 예술작품의 자기 반영적, 자기 반성적 성격을 드러내 보여주는 장치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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