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번째 운동: “부조리한 믿음의 운동”
두 번째 운동(믿음의 도약, Leap of Faith)은 “부조리한 믿음의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키르케고르는 이를 “신앙의 역설(paradox of faith)” 또는 **“부조리한 믿음(absurd faith)”**이라고 설명한다.
1️⃣ 첫 번째 운동: 무한 체념은 논리적으로 이해 가능하다.
• **무한 체념(den uendelige Resignation)**은 철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세속적 소망을 완전히 포기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토아 철학자나 불교의 해탈 개념처럼, 이 운동은 인간의 이성으로 납득할 수 있다. “나는 이삭을 잃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체념한다.” → 이 논리는 이해할 수 있다.
💡 즉, 무한 체념은 비극적 영웅도 할 수 있다. 세상의 의미를 초월하고, 고귀한 체념을 통해 영적인 자유를 얻는다. 하지만, 신앙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2️⃣ 두 번째 운동: 믿음의 도약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 두 번째 운동은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조리한 믿음(absurd faith)“이다. 무한 체념을 한 뒤, 그것을 다시 얻을 것이라는 부조리한 확신을 가지는 것이다. “나는 이삭을 잃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신앙 속에서 이삭을 다시 얻을 것이다.” 논리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신앙 속에서는 가능하다.
💡 이것이 바로 신앙의 역설(paradox of faith)이며,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부조리한 믿음(absurd faith)“이다.
3️⃣ 왜 “부조리한 믿음”인가?
✔ 신앙의 기사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믿는다. 그는 체념을 넘어서, “잃어버린 것을 신앙 속에서 다시 얻을 것”이라는 불가능한 믿음을 가진다.
• 비극적 영웅과의 차이: 비극적 영웅은 체념하고, 희생을 감수하며, 초연해진다. (이성적으로 설명 가능) 믿음의 기사는 체념한 뒤, 부조리한 믿음 속에서 다시 모든 것을 얻는다. (이성적으로 설명 불가능)
✔ “아브라함의 믿음은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다.”
•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칠 것이며, 논리적으로 이삭을 잃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는 이삭을 잃지만, 다시 얻을 것”**이라는 부조리한 믿음을 가졌다. 즉, 그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믿었다.
✔ 니체 vs. 키르케고르
• 니체는 키르케고르의 이러한 신앙을 **“노예의 도덕”**이라며 조롱했다. 왜냐하면, **“부조리를 믿는 것은 이성의 모독”**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키르케고르는 **“진정한 신앙은 이성을 초월하는 역설 속에서 존재한다.”**라고 주장했다.
💡 즉, 두 번째 운동은 “부조리를 향한 도약”이며, 신앙은 논리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 신앙의 기사는 철학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믿으며, 이것이 “신앙의 역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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