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영역본 134쪽 하단
아래 글은 키르케고르의 유고작 무장 중립에 나오는 일부의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Ydmyg for Gud)하며,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실제로 무엇을 뜻하는지(hvad det dog vil sige, i Sandhed at være en Christen)에 대한 제 지식과, 저 자신에 대한 제 지식을 가지고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저는 특별한 의미에서 기독교인(Christen)이라고 주장할 수도 없고, 또 제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에 어떤 "특별함"의 강조( Udmærkelsens Eftertryk)를 둘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감히, 특히 크리스텐덤(Christenheden) 안에서,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순교(Martyr)나 박해를 받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에 저 자신을 노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는 것에 대해 독자께서는 성급히 판단하지 마시고, 차라리 시간을 들여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기꺼이 기독교인으로서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너무 쉽게 “확신”하지만, 정작 어려움은 그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전혀 다른 곳에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을 제가 가정해 보겠습니다. 제 머리 위에 칼이 놓여 있고,[i] 제가 기독교인(Christen)인지 아닌지를 말하라고 요구받는 상황입니다. 제 대답은 이럴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있습니다. 저는 기독교인이라고 믿으며, 하나님께서 저를 기독교인으로서 은혜( Naade)로 받아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 대답에 만족하지 않고 “당신은 기독교인이라고 하든가, 아니라고 하든가 둘 중 하나를 반드시 말해야 한다”고 한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아니요, 저는 그렇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다시 “그렇다면 우리가 당신을 죽이겠다, 왜냐하면 당신이 우리가 요구하는 대로 대답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한다면, 제 대답은 이럴 것입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거기에 대해서 저는 아무런 이의가 없습니다. 이 순교(Martyrium)는 제 이해 속에서 동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죽임을 당하는 것을 두려워한다기보다는, 제 자신에 대해 너무 많은 말을 하게 될 것을 두려워합니다. 저는 비겁하게 순교(Martyrium)를 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제가 어디에서 순교로 쓰러질 수 있는지를 스스로 이해하고, 제 자신과 일치한 상태에서만 그것을 감당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ii]
제가 기독교인(Christen)인지 아닌지(그리고 각 개인(den Enkelte, 단독자)이 기독교인인지 아닌지)는 사실상 전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reent Guds-Forhold)에 속한 문제입니다. 제가 “나는 기독교인이다”라고 말할 때―그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인간(Mennesker)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제가 인간과 대화하고 있다 할지라도―사실 저는 그 순간 하나님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하나님께 말하듯이밖에 말할 수 없고, 다른 방식으로는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즉, 제가(그리고 언제나 각 단독자가) “나는 기독교인이다”라고 말할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들으십니다. 따라서 저는 단지 인간적 기준(menneskelig Maalestok)이나 인간적 비교(menneskelig Sammenligning) 안에서 “나는 기독교인이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이제 하나님 앞에서 감히 “저는 기독교인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저는 감히 그렇게 말하지 못합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저는 또한 “내가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라는 강조(Eftertryk)를 둘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하나님께서 다른 판단을 내리신다면? 그리고 제가 제 자신에 대해 말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존경(Respekts Hensynet til Gud)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이 심판자(Dommeren)이심을 잊어버린 채 내 자신을 단정적으로(apodiktisk) 기독교인이라고 말해버린다면?
그렇게 되면, 저는 기독교인이라고 제 스스로 단정적으로 증언한 그 때문에 죽임을 당하게 되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잃는 것은 가장 작은 것이지만, 그것으로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원(Evigheden)에서 제가 어려움(Vanskeligheder)에 부딪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즉, 제가 경건하게 가정적으로(gudfrygtig hypothetisk) 말하지 않고, 오히려 단정적으로(apodiktisk) 제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말한 것이 오만(Anmasselse)이었음이 드러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결국 심판(Dommen)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심판의 날(Dommens Dag)에 저는 다시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내 자신의 증언(eget Udsagn) 때문에 기독교인이라 하여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제가 그렇게 말한다면, 저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하는 셈이 됩니다. “저는 기독교인이었습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확실합니다. 저는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말을 하나님께 감히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서 훨씬 더 겸손한 표현을 써야 합니다.
“저는 하나님께 소망을 둡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기독교인으로서 은혜( Naade)로 받아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i] “머리 위의 칼(Med Sværdet over Hovedet)”: 이는 다모클레스(Damokles) 전설을 가리킨다. 다모클레스는 기원전 3세기 시라쿠사의 참주 디오니시오스 1세(Dionysios I)의 궁정에 있던 아첨하는 귀족이었다. 그는 참주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찬양했는데, 디오니시오스는 자신의 행복이 어떤 성격인지를 보여주려 했다. 그는 다모클레스를 화려한 식탁에 앉히고 가장 진귀한 음식과 가장 아름다운 시종들로 시중들게 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번쩍이는 칼 하나를 말총(hestehår)에 매달아 다모클레스의 머리 위에 매달아 두었다. 이 이야기는 키케로(Cicero)의 ≪투스쿨룸 대화(Tusculanae Disputationes)≫ 제5권, 21장 61-62절에 전한다. 참조: Marcus Tullius Cicero, Tusculanische Untersuchungen, Übers. J.D. Büchling, Halle 1799, s. 414-417 (ktl. 1236); M. Tullii Ciceronis opera omnia, ed. J.A. Ernesti, Halle 1756-57, 6 vols. (ktl. 1224-1229), bd. 4, 1756, s. 443f.
[ii] 해설: 키르케고르에게 순교(Martyrium)란 죽음을 두려워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는 "나는 기독교인(Christen)이다"라고 스스로를 과도하게 내세우는 증언이 오히려 죽음의 의미를 왜곡할 수 있다는 점을 두려워한다. 다시 말해, 그는 순교를 회피하지 않지만, 그것이 자기 자신과의 일치 속에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키르케고르의 순교 이해는 "죽음 자체의 공포"가 아니라, 이상(Idealet) 앞에서의 자기 증언이 은혜(naade)와 합치되는가라는 문제에 초점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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