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the Lily Could Speak: On the Contentment and Glory of Being Human
Sylvia Walsh
실존 영역에서의 클리마쿠스의 도식(schema)과 다양한 정신의 건덕적 강화의 계획
다양한 정신의 건덕적 강화의 세 부분은 서로 관계가 있다. <비학문적 후서>에서 도식화된 실존 영역에서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책에서 가명의 저자 요하네스 클리마쿠스는 실존을 세 가지 영역으로 나눈다. 심미적 실존, 윤리적 실존, 종교적 실존이다. 이런 구분에 어떤 경계를 추가한다. 아이러니irony와 유머humor다.
아이러니는 심미적 실존과 윤리적 실존을 구분하는 경계이고, 유머는 윤리적 실존과 종교적 실존을 구분하는 경계다.(CUP, 1:501-02) 이런 도식을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이 도식은 이후에 확장되고 다음의 주석에서 더욱 명확해진다.
이 영역은 다음과 같이 관계되어 있다. 직접성; 유한한 상식common sense; 아이러니; 미행incognito으로 아이러니가 있는 윤리; 유머; 미행으로 유머가 있는 종교성--- 그리고 그때 결국 본질적으로 기독교적인 것은 실존의 역설적 강조에 의해, 역설에 의해, 내재immanence와의 결별에 의해, 모순에 의해 구별된다. 따라서 미행으로 유머가 있는 종교성은 아직 기독교적 종교성이 아니다. 이것이 숨겨진 내면성hidden inwardness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스스로를 역설과 관계한다. 확실히 유머도 역설과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끊임없이 스스로를 내재 안에 제한하고 끊임없이 다른 무언가를 의식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이유로 농담jest이다. (CUP, 1:531-32, 약간 수정)
키르케고르는 1847년 일기에서도 이와 같은 도식을 말한다. <다양한 정신의 건덕적 강화>는 다음과 같이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1부("특별한 때를 위한 강화")는 본질적으로 윤리적 아이러니이고, 2부("세 개의 들의 백합 공중의 새의 강화")는 유머러스하고 3부("고난의 복음" 부제: "기독교 강화")는 일기에 명확하게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종교적이다. 더 특별하게 그 계획에 있어 기독교적이다.(JP, 5:5975) 따라서 이 책은 전체적으로 윤리적 아이러니/유머/기독교적 구조를 갖고 있는 샘이다. 키르케고르는 조금 더 나아가 2부의 강화를 실존 영역에서 다시 세 가지 영역으로 구분하여 제시한다. 곧, 세 강화가 다시 심미적으로, 윤리적으로, 종교적으로 관계한다는 것이다.(JP, 5:5975; cf. JP, 5:5970)1)
<비학문적 후서>에서 명시한 확장된 실존의 도식과 관련하여 본다면, <다양한 정신의 건덕적 강화>의 세 부분은 이 실존적 도식에 잘 맞는다. 책 전체의 건덕적 특징이나 의도는 이 세 부분을 일반적으로 윤리-종교적 영역의 관점에서 기획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명확하지 않는 점은 2부의 강화가 어떤 점에서 유머러스한 것인지 그 의미다. 이 강화가 어떤 점에서 윤리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 사이의 유머인지, 어떤 점에서 종교적 영역에서 미행으로서 유머의 표현인지 명확지 않다.
클리마쿠스가 유머의 경계를 서술할 때, 이 유머의 역할은 모순contradiction을 일깨우는 것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실제로 그 생각과 관련된 유머 작가 없이도 다른 무언가와 연결지어 일깨우는 것이다.(CUP, 1:505) 그러나 <인생길의 여러 단계>에서 "유죄인가, 무죄인가Guilty?/Not Guilty?"에 대한 그의 비평을 담은 "덴마크 문학에 대한 일견A Glance at Danish Literature"에서, 클리마쿠스는 또한 유머를 기독교-종교적인 것과 관련하여 "최종 출발점terminus a qua"을 구성하는 것으로, "내재 안에서 내재를 종결짓는 믿음 앞에서의 실존-내면성의 최종 단계"를 구성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CUP, 1:291, cf. 271-72)
따라서 그에게 유머란 두 개의 영역을 나누는 경계로 사용된다. 특별히 윤리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의 경계다. 조금 더 넓게, 내재적 종교성과 기독교 양자를 통합하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내재적 종교성(종교성 A)과 기독교(종교성 B) 사이의 경계다.2) 게다가 두 번째 예에서의 유머는, 내재적 종교성의 미행으로서의 유머인데, 윤리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의 경계로서 유머에서 결핍된 심각함seriousness 혹은 진지함earnestness을 지닌다.
후자의 예에서, 유머러스한 사람humorist은 농담조로 실존적 고난의 본질을 제거한다. 반복 혹은 실존적 분투를 결단하기보다 상기recollection를 통해 영원한 것으로의 도피를 선택한다.(CUP, 1:242, 447) 이런 유머의 심각성이 제거된 표현과 대조적으로, 클리마쿠스는 "거룩한 농담holy jest"이라 부르는 다른 형태의 농담을 종교적 영역에서 실존을 향한 가장 강력한 진지함을 지닌 미행 혹은 흔적과 동일시 한다.(CUP, 1:462, 471-72) 이런 형태의 농담에서, 종교적인 개인은 외적으로는 유머 작가인 것처럼 보이나, 내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그가 종교적 이상에 헌신하는 한, 유머를 이런 종교적 열정을 위한 간접적 표현으로 활용하는 한, 그렇지 않다.
1) 이 책의 2부와 전체의 계획은 학자들에 의해 잘못 해석되었다.월터 라우리는 이 책의 전체 내용을 심미적, 윤리적, 종교적으로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1부는 분명 윤리적이 내용을 담고 있다. 키르케고르는 1부에 아이러니하게 웃을 수 있는 코믹한 부분을 담았다. 그는 이런 지적을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심미적 특징"을 나타내는 법을 몰랐던 것 같다. 라우리는 2부가 유머러스하다고 정확하게 주석을 달았으나, 2부에서 고통당하는 백합의 비유가 3부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인식한 것은 잘못이다.
2)On the role of humor in Concluding Unscientific Postsript, see also my Living Poetically: Kierkegaard's Existential Aaesthetics(University Park: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1994) 212-17, together with other works cited therein. One should add to this list the more recent work by John Lippitt, Humor and Irony in Kierkegaard's Thought(New York: St. Martin's Press,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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