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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인문학

성경에 나오는 사탄을 어떻게 볼 것인가?

by 엉클창 2025. 3. 18.

키르케고르의 사유에서 보면, 성경 속 사탄(Satan)을 단순히 초자연적인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상실한 실존적 상태”의 상징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할 수 있다. 즉, 사탄은 하나의 “독립적 실체”라기보다는, 불자유(Ufrihed)와 절망(Fortvivlelse)이 극단적으로 구현된 존재로 해석될 수 있다.

 


1. 키르케고르의 "악마적인 것(Det Dæmoniske)"과 사탄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악마적인 것(Det Dæmoniske)”은 자신을 완전히 폐쇄(Indesluttethed)하고, 자유를 거부하며, 선(Gode)에 대한 불안을 가지는 상태이다.

💡 그렇다면, 성경 속 사탄도 이 개념과 연결될 수 있을까?

✔ 성경 속 사탄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하며, 자신을 폐쇄하고, 절망 속에서 자유를 왜곡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 “자신을 신으로 만들려 하면서도, 실제로는 완전한 불자유 상태에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키르케고르의 악마적인 개념과 연결될 수 있다.
✔ 즉, 사탄은 “불자유가 자유의 한 현상”이라는 키르케고르의 개념을 극단적으로 구현한 존재라고 볼 수 있다.


2. 성경 속 사탄과 키르케고르의 개념 비교

성경 속 사탄 키르케고르의 “악마적인 것”
하나님과 단절된 존재 자유를 상실한 존재
스스로 신이 되려 하지만, 결국 절망에 빠짐 자유를 원하지 않지만, 동시에 자유를 부정하는 존재
선(Gode)에 대한 증오와 거부 선에 대한 불안(Angest for det Gode)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를 이간질함 타자와의 소통(Communication)을 거부하고 폐쇄됨
빛의 천사(Lucifer)였지만, 타락하여 어둠 속에 갇힘 원래 자유를 가졌지만, 그것을 상실하여 완전히 폐쇄됨

 

💡 결론:

👉 사탄은 자신을 신으로 만들려 하지만, 실제로는 절대적으로 폐쇄된 존재라는 점에서 키르케고르의 “악마적인 것” 개념과 맞아떨어진다.


3. 성경에서 사탄을 이해하는 키르케고르적 접근

💡 사탄을 단순히 “초자연적 악한 존재”로 볼 것이 아니라, 그를 “실존적 폐쇄와 불자유의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다.

1. 사탄은 자유를 왜곡한 존재이다.

그는 자유를 원하지만, 그것을 자기 안으로 가두고 폐쇄적인 방식으로 사용하려 한다.
그는 자신이 신이 되고 싶어 하지만, 결과적으로 절망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
이는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자신을 원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원하고 있는 상태”와 연결된다.

2. 사탄은 선에 대한 불안을 가진다.

키르케고르는 “악마적인 것”은 선에 대한 불안을 가지며, 그것을 피하려는 존재라고 설명한다.
성경에서 사탄은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구원을 거부하도록 유혹한다.
이는 자유가 선 안에서 실현되는 것을 거부하고, 불자유 속에서 머물려는 악마적 상태와 일치한다.

3. 사탄은 완전한 자기 폐쇄 상태이다.

키르케고르는 “악마적인 것은 자기 자신과 소통할 수 없고, 타자와도 관계를 맺지 않는 폐쇄적 존재”라고 말한다.
성경에서 사탄은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를 단절시키고, 자신도 하나님과 완전히 단절된 존재로 묘사된다.
이는 소통이 단절되고 자기 안에 갇힌 실존적 절망의 극단적인 형태이다.


4. 키르케고르적 해석이 가지는 의미

성경 속 사탄을 키르케고르의 “악마적인 것” 개념으로 해석하면, 사탄은 단순한 “외부의 악한 힘”이 아니라, 인간이 실존적으로 빠질 수 있는 상태의 상징이 된다.

사탄은 단순히 “타자”로서의 적대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 실존 속에서 벌어지는 자기 폐쇄와 불자유의 상징이다.
따라서, “악마적인 것”은 단순한 신화적 개념이 아니라, 실존적 문제로 다루어야 한다.
사탄을 단순히 외부적 적으로만 보면, 우리는 그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정당화할 위험이 있다.
그러나 사탄을 “실존적 가능성”으로 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서 일어나는 “자기 폐쇄의 위험”을 경계할 수 있다.


5. 결론: 키르케고르적 관점에서 사탄 이해하기

💡 사탄은 단순한 “초자연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 실존 속에서 벌어지는 “자유의 왜곡과 폐쇄”를 상징한다.

👉 사탄은 자유를 가지지만, 그것을 폐쇄적으로 사용하려 하면서 결국 절망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
👉 그는 선을 두려워하고, 그 두려움 속에서 자신을 계속해서 폐쇄한다.
👉 그는 타자와 소통하지 않으며, 자기 안에 갇혀 있다.
👉 결국, 사탄은 실체적 존재라기보다는, “절망 속에서 자유를 왜곡하고 폐쇄된 존재”의 궁극적 상징이다.우리 자신의 실존적 위험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깊은 해석이 될 수 있다.


성경에서 “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나온 악령들이 돼지 떼에 들어간 이야기”(마가복음 5:1-20, 누가복음 8:26-39, 마태복음 8:28-34)는 문자적으로 보면 사탄(악령)이 실체적 존재처럼 보이는 사건이다. 그러나 키르케고르의 철학을 적용하여 이 사건을 해석하면, “악마적인 것(Det Dæmoniske)“이 실존적으로 드러나는 방식에 대한 깊은 통찰을 얻을 수 있다.

 


1. 돼지 떼에 들어간 악령 사건 개요

예수께서 거라사인의 지방에서 귀신 들린 사람을 만난다. 이 사람은 무덤 사이에서 살고 있었고, 스스로를 해치며,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 예수께서 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려 하시자, 귀신들이 자신들을 내쫓지 말아 달라고 간청한다. 이 귀신들은 자신을 “군대(Legion)“라고 부른다. 예수께서 귀신들이 돼지 떼로 들어가도록 허락하시자, 그 돼지들은 미쳐서 바다로 돌진하여 몰살당한다.

💡 문제 제기: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귀신(Legion)이 실제 독립적 실체인가? 아니면,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악마적인 것”의 실존적 현상인가?

 


2. 키르케고르적 해석: 악마적인 것과 자기 폐쇄

🔹 1) 악마적인 것은 실체가 아니라 실존적 상태이다.

키르케고르는 “악마적인 것”을 하나의 실체(substantial being)로 보지 않고, 자유가 왜곡된 실존적 상태라고 이해한다. 그렇다면, 귀신 들린 사람은 자유를 상실한 상태, 즉 극단적 불자유(Ufrihed)에 빠진 상태로 볼 수 있다. 그는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고, 사회로부터 단절된 채, 무덤에서 살아가며, 자신을 파괴하는 상태에 있었다. 이는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악마적인 것의 본질(자기 폐쇄, 소통 단절, 절망의 극단적 형태)”**와 일치한다.

🔹 2) “군대(Legion)“라는 자기 이해는 자기 상실의 표현이다.

귀신 들린 사람은 자신을 “군대(Legion)“라고 부른다. 이는 그가 자기 자신을 하나의 통합된 존재로 인식하지 못하고, 산산이 조각난 존재로 느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키르케고르는 자기 폐쇄(Indesluttethed) 속에서 인간은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고, 자기 자신과도 소통할 수 없게 된다고 보았다. 즉, “군대”라는 표현은 악령들의 실체적 다수가 아니라,그 사람이 자기 자신을 온전한 존재로 인식하지 못하는 절망의 표현일 가능성이 크다.

🔹 3) 돼지 떼로 들어간 악령: 자기 폐쇄의 전이(Transfer)

예수께서 악령을 쫓아내시자, 그것이 돼지 떼에 들어가게 된다. 그 결과 돼지들은 광기에 사로잡혀 바다로 돌진하여 몰살당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돼지 떼로 들어간 악령”이 실제 존재로서 옮겨갔다기보다는, 악마적인 상태가 어떻게 전이(transfer)되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즉, 악마적인 것은 실체가 아니라, 특정한 존재(귀신 들린 사람) 안에서 자유의 왜곡으로 나타났다가, 또 다른 대상으로 전이되었을 때, 결국 파괴적인 결과(돼지의 몰살)를 가져온다.

💡 돼지 떼 사건은 악마적인 것의 본질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악마적인 것의 본질은 자유를 거부하고 폐쇄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온전히 폐쇄될 수 없는 순간, 그것은 또 다른 대상으로 전이되며, 결국 파괴적인 결과를 낳는다.

 


3. 키르케고르적 해석과 성경적 의미

키르케고르의 관점에서 보면, 이 사건은 단순히 **“초자연적인 존재가 동물에게 옮겨간 이야기”**가 아니라, 악마적인 것의 본질이 어떻게 인간 실존 속에서 작용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다.

전통적 해석 키르케고르적 해석
악령이 실제 독립적 존재로서 사람에게서 돼지로 옮겨갔다. 악마적인 것은 실체가 아니라, 자기 폐쇄와 자유의 왜곡이 전이된 것이다.
귀신 들린 사람은 단순히 악령의 피해자이다. 그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자유를 상실하고, 자기 폐쇄에 빠진 상태이다.
돼지 떼는 단순한 초자연적 사건의 일부이다. 돼지 떼 사건은 악마적인 것이 자기 폐쇄를 유지하려다 결국 파괴로 이어지는 것을 보여준다.

 

💡 결론:

👉 악마적인 것은 실체적 존재가 아니라, 실존적 상태이다.
👉 귀신 들린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잃고 자기 폐쇄 속에서 고립된 상태였다.
👉 예수가 그의 악마적 상태를 깨뜨렸을 때, 그것은 돼지 떼로 전이되었고, 돼지들은 미쳐서 자멸했다.
👉 이는 “악마적인 것”이 궁극적으로 자기 파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4. 최종 결론: 실체적 존재 vs. 실존적 현상

이 사건을 문자적으로 보면, 악령이 실체처럼 보이지만, 키르케고르적 관점에서 보면 이는 악마적인 것의 실존적 구조를 드러내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다.

1. 사탄과 악령은 실체라기보다, 자유가 왜곡된 상태이다.
2. 귀신 들린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폐쇄적 존재였으며, “군대”라는 표현은 자기 상실을 의미한다.
3. 돼지 떼 사건은 “악마적인 것”이 파괴적이며, 자기 폐쇄의 결과가 필연적으로 소멸로 이어짐을 상징한다.
4. 따라서, 이 사건은 단순한 귀신 쫓음 이야기가 아니라, 악마적인 것의 실존적 본질과 그 종말적 귀결을 보여주는 상징적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 키르케고르적 해석을 따르면, 이 사건은 단순한 초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인간 실존 속에서 자유의 상실과 자기 폐쇄가 가져오는 결과를 깊이 있게 성찰하도록 만든다.


어거스틴(Augustinus)이 “악(악마적인 것 포함)은 실체가 아니라 존재의 결핍(privatio entis)이다”라고 본 것은, 키르케고르가 “악마적인 것(Det Dæmoniske)은 실체가 아니라 왜곡된 자유의 상태이다”라고 말한 것과 연결될 수 있다.

 


1. 어거스틴의 “악은 존재의 결핍” 개념

어거스틴은 “악(Malum)은 실체적인 존재(ens)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Being, ens)의 결핍(absence) 혹은 왜곡(perversion)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플라톤적 기독교 철학을 받아들여, “모든 존재는 선(Goodness)의 창조물”이며, 악은 그 선이 결핍되거나 왜곡될 때 발생한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맹목(blindness)은 “존재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시력의 결핍”이듯이, 악은 독립적 실체가 아니라 선이 결핍된 상태일 뿐이다.

💡 결론:
👉 악은 실체적 본질이 없다.
👉 악은 선이 결핍되거나 왜곡된 상태이다.

 


2. 키르케고르와 어거스틴의 공통점

키르케고르는 “악마적인 것(Det Dæmoniske)은 실체적 존재가 아니라, 자유(Frihed)가 왜곡되고 자기 폐쇄에 빠진 상태이다”라고 본다. 어거스틴과 키르케고르는 모두 “악은 실체가 아니라 상태(state)이다”라고 주장한다.

💡 비교 정리

어거스틴 키르케고르
악은 존재의 결핍이다(privatio entis). 악마적인 것은 자유가 왜곡된 실존적 상태이다.
악은 실체적 본질이 없다. 악마적인 것은 실체가 아니라 실존적 현상이다.
선이 결핍되거나 타락할 때 악이 발생한다. 자유가 자기 폐쇄에 빠질 때 악마적인 것이 발생한다.

👉 둘 다 악을 실체적 존재로 보지 않고, 실존적 상태로 본다.
👉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악을 “자유와 연결된 실존적 개념”으로 설명하려 한다.

 


3. 어거스틴과 키르케고르의 차이점

어거스틴 키르케고르
악을 형이상학적으로 해석(선의 결핍) 악을 실존적으로 해석(자유의 왜곡)
악을 신학적·철학적으로 설명 악마적인 것을 실존적 선택과 관련하여 설명
신의 선함과 조화를 강조 인간의 실존적 선택과 책임을 강조

💡 핵심 차이점:

어거스틴은 악을 존재론적으로 설명하며, 신의 선하심(God’s Goodness)을 강조한다.
키르케고르는 악마적인 것을 실존적 관점에서 이해하며,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강조한다.

 


4. 결론: “악은 실체가 아니다”

어거스틴과 키르케고르의 공통된 핵심 메시지는 “악은 실체가 아니라 상태이다.”

악은 실체적 존재가 아니다.
악은 선의 결핍(어거스틴) 혹은 왜곡된 자유(키르케고르)로 인해 발생한다.
따라서, 악을 “독립적 존재”로 보기보다는, 인간과 세계 속에서 발생하는 실존적 문제로 이해해야 한다.

💡 즉, 성경 속 사탄도 실체적 악으로 보기보다는, 왜곡된 자유와 존재의 결핍을 상징하는 실존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키르케고르적 해석에 더 적합하다.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키르케곡르의 차이

자유주의자들이 초자연적 개념을 거부하고,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설명하려 한다면, 키르케고르의 관점은 그들과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 보자.

 


1. 자유주의적 입장: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주의적 사고는 계몽주의적 이성주의(Rationalism)의 영향을 받았다.
초자연적 현상(예: 사탄, 악령, 신적 개입 등)은 이성적으로 증명할 수 없으므로 부정된다.
악(Det Onde)도 독립적 실체가 아니라, 심리적·사회적 요인으로 설명하려 한다.
따라서, “사탄”이나 “악마적인 것” 같은 개념을 미신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거부한다.

💡 핵심: 자유주의적 사고에서는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인정되지 않는다. 악도 실체가 아니라, 단순한 인간의 윤리적 문제, 사회적 문제로 환원된다.

 


2. 키르케고르적 입장: “악마적인 것은 실체는 아니지만, 실존적 현상이다.”

키르케고르는 초자연적 존재로서의 “악마”를 문자적으로 믿는 방식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악이 단순한 윤리적 문제나 사회적 현상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본다.
즉, “악마적인 것”은 실체는 아니지만, 실존적 경험 속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악마적인 것은 이성으로 완전히 설명될 수 없는 실존적 문제이다.

💡 핵심: 키르케고르는 “악마적인 것”을 단순히 미신적 개념으로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실존적 문제로 본다.  즉, 단순한 윤리적 개념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 자체와 연결된 문제이다.

 


3. 자유주의와 키르케고르의 차이점

자유주의적 관점 키르케고르적 관점
이성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은 부정함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실존적 문제가 존재함
악은 심리적·사회적 요인에서 비롯됨 악은 실체가 아니라, 자기 폐쇄와 절망의 실존적 현상
악마적인 것은 미신적 개념 악마적인 것은 실체가 아니지만, 실존적으로 경험됨
이성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음 이성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으며, 실존적 결단이 필요함

💡 핵심 차이:

자유주의자들은 **“이성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키르케고르는 “이성이 해명할 수 없는 실존적 문제가 있다”고 본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악을 단순한 윤리적 문제로 환원하려 하지만, 키르케고르는 악을 인간 실존의 근본적 문제로 본다.

 


4. 키르케고르적 입장에서 자유주의의 한계

자유주의적 사고가 악을 “도덕적 문제”나 “사회적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결국 악의 깊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될 수 있다.

1. 악은 단순한 윤리적 문제가 아니다.

자유주의는 악을 비도덕적인 행동으로 이해하지만, 키르케고르는 악을 “자유의 왜곡된 형태”로 본다. 즉, 악은 단순한 비윤리적 행위가 아니라, 인간이 자기 존재를 거부하고 자기 자신을 폐쇄하는 상태이다.

2. 이성은 인간의 실존적 문제를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

자유주의는 이성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지만, 키르케고르는 “인간의 실존 속에는 이성이 다 해명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본다. 특히 불안, 절망, 악마적인 상태 같은 것들은 단순한 심리적 문제가 아니라, 인간 실존의 깊은 차원에서 발생하는 문제이다.

3. 실존적 결단이 필요하다.

자유주의적 사고에서는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으려 하지만, 키르케고르는 “악을 극복하려면 단순한 논리가 아니라, 실존적 결단이 필요하다”고 본다. 즉, 이성적 분석만으로는 악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인간이 자기 존재에 대해 결단하는 순간이 필요하다.

 


5. 결론: 자유주의적 관점과 키르케고르적 실존의 차이

자유주의적 사고는 “이성이 모든 것을 해명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지만,키르케고르는 “이성으로 다 해명되지 않는 실존적 문제가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 자유주의자들은 초자연적 존재로서의 악을 부정하면서, 동시에 악을 단순한 윤리적 문제로 환원하는 경향이 있다.
✔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악을 실체적 존재로 보지는 않지만, 그것을 단순한 윤리적 개념으로도 축소하지 않는다.
✔ 악은 실체가 아니라 “자유의 왜곡된 형태”이며, 그것은 인간 실존 속에서 경험되는 문제이다.

💡 따라서 키르케고르적 입장은 자유주의적 사고와 초자연적 존재론적 사고의 중간에 위치하며, 악을 실체로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단순한 윤리적·사회적 문제로 환원하지 않는 독창적인 접근법을 제시한다.


악마적인 것 개념 정리

키르케고르가 “악마적인 것(Det Dæmoniske)”을 논할 때,그가 참고한 헬라어 개념은 δαίμων (daímōn) 혹은 δαιμονικός (daimonikós)일 가능성이 크다.

 


1. “악마적인 것(Det Dæmoniske)“의 헬라어 근원

δαίμων (daímōn)

본래 헬라어에서 δαίμων은 단순히 “신적 존재” 또는 “영적 존재”를 의미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다이몬(δαίμων)”**을 “내면의 신적 목소리”로 여겼다. 즉, 원래는 “악마적인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초월적인 영적 존재”를 의미했다.

 

δαιμονικός (daimonikós)

“δαίμων(daímōn)“에서 파생된 형용사로, 일반적으로 ‘신적인 것’ 혹은 ‘영적 존재와 관련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기독교 이후, “δαιμονικός”는 악령과 관련된 의미로 변화했다.

💡 정리: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악마적인 것(Det Dæmoniske)”은 헬라어 “δαίμων” 또는 “δαιμονικός”의 개념에서 발전했지만, 기독교적 맥락에서 “악령적인 것”이라는 의미를 더 강조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2. 키르케고르의 “악마적인 것”과 헬라 철학의 차이

헬라 철학에서 “δαίμων”은 반드시 부정적인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키르케고르의 “악마적인 것”은 “자기 폐쇄(Indesluttethed)“와 “선(Gode)에 대한 두려움”을 의미한다.
따라서 키르케고르는 헬라 철학의 “δαίμων” 개념을 가져오되, 그것을 기독교적 실존 개념으로 변형하여 사용한 것이다.

💡 즉, 키르케고르의 “Det Dæmoniske”는 헬라적 개념을 넘어서, 인간 실존 속에서 자유가 왜곡되는 상태를 묘사하는 용어로 발전된 것이다.


“δαίμων (daímōn)“과 관련된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여러 번 등장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헬라 철학에서처럼 중립적이거나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1. 성경에서 “δαίμων (daímōn)“과 “δαιμόνιον (daimónion)“의 사용

헬라어 **“δαίμων (daímōn)”**과 그 변형인 **“δαιμόνιον (daimónion)”**은 신약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악한 영, 귀신, 마귀”**를 뜻하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된다.

“δαίμων” 자체는 성경에서 단 한 번 등장한다.
✔ 그러나 “δαιμόνιον”은 여러 번 등장하며, 대개 악령이나 우상과 연결된다.

 


2. 신약성경에서 “δαίμων (daímōn)“이 등장하는 구절

📖 마태복음 8:31

“οἱ δὲ δαίμονες παρεκάλουν αὐτόν λέγοντες· εἰ ἐκβάλλεις ἡμᾶς, ἀπόστειλον ἡμᾶς εἰς τὴν ἀγέλην τῶν χοίρων.”

“그때 귀신들이 예수께 간청하여 말하였다. ‘우리를 쫓아내시려거든, 돼지 떼 속으로 들여보내 주소서.’”

 

✔ 여기서 **“δαίμονες” (daímones, 복수형)**는 귀신 혹은 악령을 의미한다. 즉, 성경에서 “δαίμων”은 헬라 철학처럼 중립적 존재가 아니라, 분명히 악한 존재로 묘사된다.

 


3. “δαίμων”보다 더 많이 등장하는 “δαιμόνιον”

신약성경에서는 “δαίμων”보다 “δαιμόνιον”이 훨씬 더 자주 사용된다.

📖 예를 들어:

마태복음 9:33“귀신(δαιμόνιον)이 쫓겨나니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였다.”
마가복음 7:26“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그녀가 예수께 귀신(δαιμόνιον) 쫓아내 주기를 간구하였다.”
누가복음 8:2“일곱 귀신(δαιμόνια)이 나간 막달라 마리아라 하는 여자…”

💡 여기서도 “δαιμόνιον”은 귀신(악한 영)으로 번역된다. 성경에서 “δαιμόνιον”은 언제나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4. 차이점: 헬라 철학 vs. 성경의 “δαίμων”

 

헬라 철학에서의 “δαίμων” 성경에서의 “δαίμων”
신과 인간 사이의 중개자 악령, 귀신
선한 다이몬도 존재 가능 언제나 부정적인 존재
소크라테스의 “다이몬”처럼 긍정적 역할 가능 사람을 해치는 존재
중립적이고 철학적인 개념 신적 선에 대항하는 악한 존재

💡 즉, 헬라 철학에서는 “δαίμων”이 반드시 악한 존재가 아니었지만, 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항상 “악령, 귀신”을 의미하는 부정적인 개념으로 사용된다.

 


5. 키르케고르가 “Det Dæmoniske”를 사용할 때, 성경과의 연결점

✔ 키르케고르는 “Det Dæmoniske”를 헬라 철학의 “δαίμων” 개념에서 출발했을 수 있지만, 성경적 개념(악령, 자기 폐쇄)을 반영하여 사용했다.
✔ 그는 “악마적인 것”을 헬라 철학처럼 중립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실존적 상태(자기 폐쇄, 자유의 왜곡)로 해석했다.
✔ 이는 성경에서 “δαίμων”이 단순한 영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단절된 악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 결론:

👉 성경에서도 “δαίμων”은 항상 악한 존재로 사용된다.
👉 키르케고르도 “Det Dæmoniske”를 단순한 중립적 개념이 아니라, 인간 실존에서 자유가 왜곡된 상태로 해석했다.
👉 즉, 그의 “악마적인 것” 개념은 헬라 철학보다는 성경적 개념과 더 가깝다.


그리스 철학적 개념의 배제

키르케고르는 **“악마적인 것(Det Dæmoniske)”**을 설명할 때, 헬라 철학의 “δαίμων (daímōn)” 개념을 철저히 배격하고, 기독교적 실존 개념으로 새롭게 정의하려고 했다.

 


1. 헬라적 개념과의 차별화

헬라 철학에서는 “δαίμων”이 선과 악의 중립적 존재였다.
키르케고르는 “악마적인 것”을 실존적 폐쇄와 왜곡된 자유로 해석했다.
그는 “악마적인 것”을 선과 연결될 가능성이 있는 중립적 개념으로 보지 않았다.
즉, 헬라 철학과 완전히 단절된 기독교적 개념을 확립하려 했다.

💡 핵심:

👉 헬라 철학의 다이몬(δαίμων) = 중립적 존재
👉 키르케고르의 “악마적인 것” = 자기 폐쇄와 자유의 왜곡 상태
👉 즉, 그는 철저히 헬라적 개념과 구별하려 했다.

 


2. 왜 키르케고르는 헬라 개념을 배격했는가?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면, 헬라 철학의 “다이몬” 개념은 인간 중심적이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악마적인 것”을 신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실존적 문제로 보았다.
특히 그는 “자기 폐쇄”와 “선(Gode)에 대한 불안”을 강조했다.
이는 헬라 철학의 “다이몬” 개념과 완전히 다른 방향이다.

💡 즉, 키르케고르는 기독교적 실존 개념을 확립하기 위해 헬라 철학과의 차별화를 명확히 했다.

 


3. 최종 결론: 키르케고르는 헬라 개념을 철저히 벗어나려 했다

그는 “δαίμων”을 헬라 철학처럼 중립적 개념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악마적인 것”을 자유의 왜곡과 실존적 자기 폐쇄로 해석했다.
즉, 그는 철저히 헬라적 개념과 단절하고, 기독교적 실존 개념을 강조했다.

 

💡 결론:

👉 키르케고르는 철저히 헬라적 개념을 배격하고, 기독교적 실존 개념을 확립하려 했다.
👉 그의 “악마적인 것”은 헬라 철학과는 전혀 다른, 기독교적 실존에서의 자유와 절망의 문제로 해석해야 한다.